52화 호랑이굴에서 살아남기
넌 남의 머리 탐험할 때 허락받고 읽니? 난 몰래 들어가~ 왜? 더 짜릿하니까. 당연한 걸 물어~ 우아한 척, 고상한 척, 도도한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이들조차도 머릿 속은 모두 평등했어. 탐욕, 질투, 분노, 사랑, 연민 말로 다 표현 못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 데 그걸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 쉽게 내놓지 않아서 더 궁금한 속사정 내가 먼저 알아내어 긁어주니 멱살을 잡을 줄 알았는데 내 손을 잡으며 고마워했어. 치부가 드러났음에도 분노하지 않고 차분해지게 만드는 나만의 비결 궁금하지 않니? 그럼 조용히 따라와 그들만의 비밀이야기를 들려줄테니.
“ 허허.. 그런 일이 있었더냐. 내게 도움을
청했더라면 힘이 덜 들었을 것을. ”
“ 아닙니다. 어찌 괜한 일로 할아버님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
공녀께서 돌아오실 수 없는 걸음을 하여
처음부터 무거운 공판으로 이루어졌기에
마음이 약해질 할아버님 걱정이 먼저
였습니다. ”
“ 너의 걸음이 조금만 빨랐어도 공녀께서
그리 허망하게 떠나시진 않았을 테지.. ”
“ 형님~! ”
“ 저도 책망하지 않을 수 없던 순간입니다.
그리하여 대공께 죄를 물어 달라 간청
하였으나 저로 인해 편히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하시며 큰마음으로
저를 품어주셨습니다. 저의 뒤에 있는
할아버님을 염두 하시고 말씀을 내려 주신
거라 얼마나 감사하였는지 모릅니다. ”
루이는 그리 말을 하며 밑으로 헥터공의
자켓을 지긋이 잡아당겨 고개를 자신에게로
돌리게 한 뒤 도리질과 웃음을 함께 건네
좌중하도록 유도하였다. 이에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 저는 괜한 일에 말려들까 걱정이 들어
비네를 설득하였지만 보고서 모른 척 하는
것은 헥터가의 일원으로 불명예스러운
행동임에 나서야 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허락하였습니다. 아이의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맞는 말 이거니와 그로 인해 좋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동안
헥터가를 중심으로 안 좋던 평판들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였고 신흥귀족들의
입김에 무게가 실려 정계에서의 부름이
곧 있을 거란 소식까지 전해져 이번
일이 굉장히 좋은 흐름이 되고 있습니다. ”
“ 입지가 단단해진다면야 좋은 일이지.
법조계로 나아가 버려진 것들이나 주워
먹는 것들과는 암~ 차이가 있어야지. 우린
어찌되었든 황실에서 인정하는 신귀족이
아니더냐~ 아주 잘 했구나. 잘했어~
허허허 ”
후사를 은근히 기다렸던 백작이었기에
원하던 손자에 거기다 영특하기까지 이는
헥터가의 명예를 드높임과 동시에 이제껏
어렵게 얻은 작위와 귀족신분이 마치 돈을
주고 산 것 마냥 소문이 나 있어 덕망
높은 가문과의 조우는커녕 박대를 받던
터라 자존심이 많이 상한 상태에서 그들의
시선을 돌리는 계기를 만든 비네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저녁식사 후 루이와 난 곧바로 빠져나와
헥터공의 서재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헥터공을 기다리는 동안 루이는 잠시
풀어져 긴장을 놓고는 자리에 털푸덕
앉자마자 투덜거렸다.
“ 하아..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경계서린
눈빛 앞에선 썩은 고기보다도 못하다니
도대체 어디로 먹었는지 맛조차 모르겠더라.
어떻게 너도 식사를 해야 할 텐데 이렇게
나와서 먹지도 못하니. ”
“ 걱정 하지 마. 주인들의 식사가 끝난
뒤엔 주방에서 따로 식사를 한다기에
오늘은 너의 첫 입성이라 긴장하였을 것
같아 시중을 들어야 한다고 하여 따로
받아두었어. 주인과 달리 사용인들은 대면
대면하여 그들 속에 섞이는 건 무리가
없을 듯해. ”
“ 네가 누려야 할 것들인데. ”
“ 네가 먹고 입고 누리는 것이 내가 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았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르니 실컷 즐기기나 하라고.”
“ 하~ 즐기라니 이런 특이한 즐거움이라면
난 사절이다. ”
여전히 낯설은 곳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부담스러운 루이는 차라리 거리가 더
연극무대로 제격이라며 한 켠으로 비껴나
있었다. 헥터공과 나 단둘이서 독대를
하여도 되겠지만 지금부터 헥터공은 새롭게
태어난 사람마냥 달라져 있어야 하므로
하나하나 신중하기로 했다.
“ 대공각하께서는 이후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 ”
“ 현재로썬 참담해 하시고 계신 대공비께
신경을 쓰시기로 하여 남쪽 별장으로 떠나
셔서 하시기로 한 일이 잠시 중단을 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곧 그 일을 대리할 이가
결정될 예정이니 헥터공께서는 분명한
선택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
“ 그러기 위해서 이번 황실 연회에 참석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
“ 이번 재판을 계기로 초청장이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 그래. 네가 일을 잘 해결한 덕에 본의
아니게 이리 받아두었지. ”
“ 백작님께선 아직 모르시는 일이지요? ”
“ 형님이야 사교계는 질색을 하시는 분이고
셋째는 기사단 일에나 매진 중이니
아버님께서 검토를 하셔야 하는 데 마침
자리를 비우셨을 때 도착하여 집사에게
받아둔 상태였다. ”
“ 잘하셨습니다. 이번 연회는 아슬란왕국의
시찰단을 위한 연회이니 어쩜 그들과의
교역도 시도해 볼만한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
“ 욕심이 과하구나. ”
“ 기회는 쉬이 오지 않는 법입니다. 대공
각하께 위임받을 가문이 누구인지를 두고
눈치를 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우선 헥터공께선 핏셔가의 백작님에게
서찰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하십시오. ”
“ 페이가도 무시 못 할 세력이다.
만약 각하께서 페이가의 손을 들어주신다면
우리는... ”
“ 그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페이가는 가문의 몰락을 막기 위해 급급해
있을 테니까요. ”
페이가에서 일이 실패하여 목숨이 위태로
워진 파이가 어리석게도 대공가로 숨어들
었다. 이를 충분히 예상했던 난 재판이
끝나고 얼마 뒤 대공각하에게 죄를 물어
달라 간청하기 위해 만남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어 허락받아 대면했을 당시
처음부터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고자
페이가의 세작으로 파이가 들어온 것을
넌지시 전하니 이에 대공각하께서 그것을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딸아이를 위험에
빠뜨려놓고선 뒤늦게 수습하려 했다는
사실에 대로하여 파이를 내침과 동시에
페이가와의 인연을 단칼에 잘라낸 것이다.
이 같은 일이 사교계로 조금씩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페이가에 투자를 했던 이들이
하나 둘 투자금을 회수 하려는 항의가
빗발쳤다.
“ 헥터공께선 소문이 많이 늦으십니다. ”
“ 내가 정치 같은 건 딱 질색이여서 말이다. ”
“ 하지만 지금부턴 조금이나마 관심을
보이시는 게 좋습니다. ”
“ 골치만 아픈 싸움이다. 거기에 휘말려서
좋을 것이 없거늘 억지로 끌어들일 생각일랑
일체 말거라~! ”
“ 백작의 지위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적절히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줄을 탔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지 않다면 정말 작위와
신분을 돈으로 샀다고밖에. ”
“ 선이라는 게 없구나. ”
“ 좋은 약은 몸에 쓴 법입니다.
저는 헥터공을 위해서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니 여기서 멈추시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저희는 그럼 연극을
그만두고 떠나도록 하지요. ”
헥터공은 계속 귀에 거슬리는 아이의 말에
화가 나 당장에라도 이들을 내치고 조용히
멋대로 지내고 싶은 욕심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가 생각에 잠시 머물렀다. 맹랑한
녀석의 말대로 아버님께선 평생을 곁에
계시지 않으시거니와 연로하신 뒤에는 분명
뒤를 이어야 할 이가 있어야 한다. 만약에
형님이나 아우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행동에 분명 제약이 걸리게
될 테고 그것을 무시한 채 멋대로 군다면
분명
“ 내쳐지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되실지
저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실 지는 헥터공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
생각하기 무섭게 마치 자신의 마음속이라도
다녀간 듯 말을 꺼내는 녀석이 아주그냥
얄미웠지만 틀린 말이 아니기에
“ 그럼 그 연회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무엇인지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
“ 백작님에게 초청장을 보여드리기 전
헥터공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
“ 무엇이냐? ”
“ 핏셔가에 연통을 넣어 만나 뵙기를
청하십시오. ”
“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데다 사교계에서도
마주칠 일이 없었거늘 쉬이 허락할까? “
“ 그 전이라면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대공저에 다녀간 것을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단칼에 거절하시진 않으실 것입니다. 가벼이
친분을 돈독히 하고자 하신다며 선물을
준비하신 뒤 제가 대동하여 헥터공을 곁에서
보필 하겠습니다. ”
“ 너에게 꿍꿍이가 따로 있나보구나. ”
“ 헥터공께서 처음부터 머리 아픈 일이
생긴다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으니 제가
동행하여 뒤에서 철저히 공략 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간단하게 담소를 즐길 이야기
거리만 염두 해두시기 바랍니다. ”
그렇게 하여 헥터공이 집사에게 적당한
선물을 준비 하라 이른 뒤 핏셔가에 서신을
쓰기 위해 우리는 물러났다.
지금쯤 핏셔가에서는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있을 터이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번 일에 쉘이 증언을 하여 괜시리 그들과
엮인 것은 아닌지 의심을 받을 수도 있을 터
그것을 이용하여 원하는 걸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먼저 할 일은
일이 조금씩 진행 되어갈수록 외출이 잦아질
테니 루이의 홀로서기를 준비해야 한다.
물론 워낙에나 능청스러운 녀석이라 많이
걱정되진 않지만 혹시 모를 것에 대비는
해두는 게 맘이 편할 듯하다.
우선 루이에겐 교육이 필요하기에 나와
헥터공이 외출을 하였을 시 티쳐를 불러
타이트한 수업을 부탁했다. 이것이 핑계가
되어 되도록 헥터공의 형제들과 부딪히는
일을 최소화하고 나와 헥터공의 일을
무사히 마칠 시간까지 벌 수 있을 것이다.
사탕발림에 홀랑 넘어간 백작은 티쳐를
부르는 일에 흔쾌히 허락하시며 아에
상주하도록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티쳐가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던컨의
그 자에게 동태가 전달되는 게 잦아 질
테니 최소한 그것을 막기 위해 시간과
시기를 정하였다. 어찌되었든 티쳐는
그 자의 사람이니 완전히 믿을 순 없다.
“ 그럼 난 여기서 얌전히 수업만 듣고
있으면 되는 거네? ”
“ 좀 힘들겠지만 나중을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을 수업이니 죽었다 생각하고 잘 들어~ ”
“ 야이~ 죽기는 내가 왜 죽냐~ 이 참에
귀엽고 사랑스러움에 우아하고 고상함까지
더한다면 나의 연극무대는 더 넓게 뻗어
나갈 테니 나쁠 거 없지. 그나저나 너
괜찮겠냐? ”
“ 걱정 마. 오랜 시간만 들이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어. 헥터공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핏셔가의 노인네
머리를 털어서 어떻게든 우리 쪽으로 넘어
오게 만들어야지. ”
“ 너 가면 갈수록 너무 멀어진다.
징그러워. ”
“ 야~ 뭐가 징그럽냐~ 내가 귀족도
아니구만. ”
“ 말투나 행동이 요새 들어 가끔씩 정
떨어지게 할 때가 있어서 그래. 정말 싫다.
그냥 예전에 네가 정말 귀여웠는데...”
“ 헛소리 작작 하고 잘 버티고나 있어. 여차
하면 드러눕던지. 네 주특기 잘 살려봐~ ”
“ 나의 천재적인 연기는 언제나 옳았지.
알았어~ ”
그렇게 루이를 주의시킨 뒤 핏셔가의
소식을 기다렸다.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헥터가에 대해서도 조사를 위해 사용인들과
조금씩 친분을 쌓아갔다. 제 아무리 헥터공의
편에 서서 도움을 주는 입장이지만 언제든
수가 틀리면 내쳐지는 건 한순간이니 그때를
대비해 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사용인들 중 수다쟁이 베키는 하녀장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인물인데 무슨
말이든 들은 것은 곧바로 풀어내야 할
정도로 입이 가벼운 이로 조심스럽긴
하지만 나의 정보수집에는 안성맞춤
이였다. 루이가 나눠준 디저트를 두었
다가 준다던지 입에 발린 소리로
조금이라도 흔들어주면 금세 헤헤
풀어져서는 있는 소리 없는 소리까지
내어줘 제법 쓸 만한 이다.
성격 자체가 가벼운 건 아닌 데 유독
입이 가벼워 주변인들이 별로 상대를
해주지 않는 터에 살갑게 대하는 내가
맘에 들었는지 베키 역시 싫지 않은 듯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헥터공이
나를 불렀다.
“ 내일 정오에 차를 함께 하자시구나. ”
“ 잘되었습니다. 지금 쉘의 증언으로 핏셔가
역시 껄끄러운 것은 마찬가지 일 테니 조금
이나마 연결 고리가 되어 주기라도 한다면
나쁠 것도 없지요. 아... 오늘 낮에 있었던
오찬 후 백작님께서 먼저 자리를 뜨신 것이
무릎 통증 때문이라고 하시더군요. “
“ 고질병이 된지 오래다. 노인네가 치료를
하자고 하여도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보니
내가 일전에도 말했듯이 당신께선 아직
건재함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
이신지 원. ”
“ 무릇 몸이 약해졌을 때가 적기입니다. ”
“ 하~ 뒤통수라도 치라는 것이냐? ”
어떻게 입에 나오는 말들이 죄다 격 떨어
지는 말만 골라서 하는지. 누가 들으면
폐륜이라도 저지르라고 하는 줄 알겠다.
속으로 한숨을 쉰 뒤 난 어이없는 표정을
애써 감추고
“ 4살 아이와 70대 노인의 정신은 비슷
하다고 합니다. 약해져 있을 때 살살 달래
주기만 해도 같은 결과를 볼 테니 이것을
차로 내려서 직접 드리십시오. ”
“ 아랫것들에게.. 아니 정 그러하면 내가
보냈다고 하며 네가 가면 되겠구나. ”
“ 항상 곁에 계셔야 하시는 분이 없으니
자제분들 중 누군가는 대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약해져 계실 때 살뜰히 했던
이는 죽기 전에 제일 기억에 오래 남는
법입니다. ”
정말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알아들어 먹는 것인지 짜증이 치밀었지만
틀어졌던 부자지간을 회복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으니 어떻게든 헥터공을 설득
하여 홍화차를 손에 들린 뒤 백작의
집무실로 밀어 넣었다.
남의 이야기는 끄집어 내어 해결하면서 정작 주인공의 이야기는 유일한 정신적 지주인 모엘신부외엔 알아주지 못해 아쉬웠네요. 그래도 글을 쓰면서 현실에선 소심하고 콩알만한 심장이 이야기 속에서는 대담하고 솔직하며 단단한 심장으로 버틸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말해봅니다.
- 작가의말
약해진 마음을 비집고 들어올 때가
치명적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속고
알면서도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진심일 때는 한 없이
베풀고 또 베풀어 녹여내니
힘들 때 놓치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집중할 수 있기를...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