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부자지간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계약이다.
넌 남의 머리 탐험할 때 허락받고 읽니? 난 몰래 들어가~ 왜? 더 짜릿하니까. 당연한 걸 물어~ 우아한 척, 고상한 척, 도도한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이들조차도 머릿 속은 모두 평등했어. 탐욕, 질투, 분노, 사랑, 연민 말로 다 표현 못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 데 그걸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 쉽게 내놓지 않아서 더 궁금한 속사정 내가 먼저 알아내어 긁어주니 멱살을 잡을 줄 알았는데 내 손을 잡으며 고마워했어. 치부가 드러났음에도 분노하지 않고 차분해지게 만드는 나만의 비결 궁금하지 않니? 그럼 조용히 따라와 그들만의 비밀이야기를 들려줄테니.
“ 맹랑하기 그지없군. ”
“ 길거리를 떠도는 이들 중 오래 살아남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거지아이들은 본능에
충실하여 살아남는 데 모든 것을 겁니다.
눈치가 빠른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입니다.
헥터공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맞춰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
“ 무슨 당연한 이야기를 조건까지 걸고
허참... ”
“ 저의 계약조건에선 신분의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었으나 공께서 그것을 연장
하기를 원하시기에 그것에 대해서 사소한
대가를 원합니다. 절대 곤란하거나 어이
없는 것이 아닌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그것 하나만 허락해주신다면 원하는 기간
동안 헥터공께서 필요로 하시는 이로
곁에서 도울 것입니다. ”
“ 내가 만약 거절한다면 어쩔 테냐? ”
“ 그러실 수 없으실 것입니다. 저만큼
사리와 이치에 빠른 이는 찾을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
“ 하~ 도대체 뭘 믿고 이리.. ”
“ 헥터백작님께선 동생 분께 그러니까
제게는 큰 숙부님이 되시겠군요. 그분에
대한 신망이 남다르시다 들었습니다. ”
“ 선을 넘는 건 딱 질색이다. 내 아무리
자유롭다곤 하나... ”
“ 끝까지 들어보시고 결정하셔도 늦지
않으십니다. ”
“ 내게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진정 괜찮은
것이어야 할 것이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
헥터공과 대면했을 시 자신의 지위를 이용
하여 고압적인 선점을 할 테니 그것에 대응
하기 위해 미리 헥터가의 소문을 건졌다.
헥터가에는 아들만 넷인데
첫째는 딸 하나를 가진 소심한 사내로 재물
에만 눈이 밝고 명예에는 관심이 없다. 고로
작위를 물려준다고 하여도 도로 내놓을 게
뻔하다.
둘째인 나의 아비역할을 할 헥터공은 말
그대로 개망나니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나
마찬가지라 관심밖에 인물이며 막내는 아직
어린데다 어미의 출신이 미천하여 함께
살지 않고 따로 나가 있는 상태이다.
자식들이 하나같이 부족함 투성 인데 그나마
셋째인 비토 인토르 헥터경은 황제에게 기사
서임까지 받아 활약 중으로 잡음이 없고
사생활이 비교적 순탄한 편이다. 그렇기에
손자가 태어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작위가
넘어가는 것은 당연할 터. 그것에 대한 것을
꼬집어 말해주니 발끈하는 헥터공의 머릿
속이 활짝 열렸다. 참으로 어렵게 열린
문이니 경계를 하며 신중해지기 전에
헥터공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
하여 나를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 헥터백작님께서는 이제 모든 것이
버거워 지셨습니다. 이쯤 되면 후계결정을
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
“ 아직 아버님은 건재하시다. ”
“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 하였습니다.
언제까지고 백작님의 그늘 밑에서 편안한
숨을 쉬시려고 하십니까.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걱정을 덜어드린다면 조금이나마
헥터공께 마음이 기울지 않겠습니까. ”
“ 네가 아직 아버님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굴러다니는 소문들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
“ 그렇다고 하여도 오랫동안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물에 바위가 닳아진다고 하지요.
천천히 다가설 수 있도록 제가 중간에서
역할을 다해보겠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한번 굳건해지면 그 어떤 것에 부딪힌다
하여도 쉬이 깨어지지 않기 마련이니
어떻게 저에게 한번 맡겨보시겠습니까? ”
“ 만약에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내 네가
원하는 것 하나 정도는 들어주도록 하지. ”
“ 알겠습니다. 백작님께서 오로지 헥터공의
바라기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
그렇게 말을 마친 헥터공은 지켜보겠다는
말과 함께 짧은 대화를 끝으로 시선에서
사라지니 던컨의 그가 나타나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 흠... 아무리 좋은 옷과 기름칠을 하여도
그릇은 어쩔 수 없나보군. ”
“ 오히려 제게는 다행이라고 봅니다. ”
“ 어떻게 구워삶을 생각이지? ”
“ 아직 구체적인 것은 세우지 않았으나
제 목적을 위해선 최선을 다해보아야
겠지요. ”
“ 훗~ 어디 한번 기대해 보지. 네가 결정
하였다. 번복은 없으니 울고불고 매달리지
말거라. ”
“ 저는 나아가는 방법밖에 모릅니다.
걱정 마십시오. ”
* 헥터가
“ 정녕 너의 핏줄이 맞더냐.. ”
“ 혈연임을 증명하는 과정이 까다롭기
그지없어 돈과 시간낭비를 좀 하였지만
분명 제 자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은근 기대를 하는 백작과 달리 무슨 속셈
이냐는 듯
“ 하~ 여지껏 잘도 숨겨놓다가 이제야 꺼내
다니 너무 늦은 게 아니냐 ”
형이 이죽거렸다. 이에 헥터공은
“ 제가 결혼도 실패한 마당에 갑작스러운
자식이 반가웠겠습니까? 솔직히 돈을
노리고 제게 접근한 이들만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제 자식은 정원을
채우고도 남을 테지요. ”
“ 둘 다 그만 하거라~ ”
헥터백작은 오늘 자신의 아이가 집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둘째아들의 통보에 기가
찼지만 평소와 다른 진중한 모습에 자식이
생기니 좀 철이 들었나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큰 아들내외는 딸 하나만을
둔 채 더 이상 자식을 두지 않기에 은근
욕심을 들이밀었다가 질색하는 며느리의
싸늘한 시선으로 뿔이나 있는 상태였고,
그나마 제정신이 박혀있는 셋째에게 결혼
이야기를 들이밀었더니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일에 더 집중하는 바람에 괜히
더 밀어붙였다간 첫째 꼴 날까싶어 포기
한 상태였다. 황실에 연줄을 대기 위해
뿌린 돈이 얼마인지 셀 수도 없다. 작위
하나만 바라보며 진짜 귀족이 되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안 해본 것이 없던
백작이었다. 그랬기에 어렵사리 사교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백작이라는 지위에 목숨을
걸었으니 당연 그것을 이을 자식에 연연해
할 수밖에.
하지만
내 맘대로 될 수 없는 것이 자식농사라
하였으니. 하나같이 제 욕심만 채우고 있어
속이 타들어가던 차에 엉뚱한 녀석에게서
손을 보게 될 꺼라 곤 생각지도 못했다.
“ 헥터영식께서 도착하였습니다. ”
손주 녀석이 도착했다는 집사의 말에
마음은 이미 달려 나간 상태.
어떤 녀석일까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 비네 인토르 헥터 조부님과 백부님을
뵙습니다. ”
15살이라고 하더니 한 없이 작아 보이는
데다 계집에처럼 곱상한 외모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백작은 둘째를 향해 시선을
돌리니
“ 오느라고 수고하였다.
힘들지는 않았느냐? ”
“ 힘들 리가 있겠습니까. 제게 아버님을
선물로 주신 할아버님의 덕망을 익히 알고
있기에 너무나도 설레고 기대하였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가르침이 되어 주시고자
이리 저를 불려주셔서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
능청스러움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차
오르니 대놓고 혀를 차는 백부와 달리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백작은 눈을
반달로 접으며 루이를 반겼다.
* 헥터백작저로 들어가기 일주일 전
“ 그저 몇 마디만으로 충분한 것을 굳이
사람을 바꿔서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나? ”
“ 자랑은 아니지만 전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너무 솔직한 것이 문제가
될 수 있기에 혹여 백작님 외 이들 앞에서
무심결에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되는 지라 헥터공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는 하인으로 따라붙고 적당한 이를 앞
세우고자 합니다. ”
던컨에서 마지막 점검을 마친 난 루이를
앞세우려는 계획을 설명하였다. 능청스러운
연기라면 루이만한 이도 없거니와 정말
죽이 맞는 우리기에 난 먼발치서 모른 척
그들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루이에게 전달
함으로서 손을 맞출 속셈이다. 당사자가
된다면야 더 가까이 할 수도 있겠지만
능구렁이 같은 이의 속셈을 파고들기란
쉽지 않을듯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분명 필요로 하는 이로 곁에 있겠
다고 했지 자식이라고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허점을 노려 말장난에
당한 헥터공 이었지만 나보단 루이가 좀
더 편했던 것인지, 루이의 말에 녹았던
것인지 흔쾌히 넘어가주었다.
그렇게 하여 나와 루이는 함께 헥터가에
입성하게 되었다.
“ 휴우... 엄청 쫄았네. 네가 부탁해서 들어
오기는 하였지만 정말 자신 있는 거야? ”
“ 걱정 마. 나이가 들수록 칭찬에 약해지는
게 귀족나부랭이들이야. 하물며 귀족이라는
허울을 썼지만 아직까지 존경을 표하는
이를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게 눈에 다
보일 지경이니 너의 말솜씨로 충분히 넘어
오게 하고도 남을 거야. ”
“ 모르겠다. 난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조금 있다가 헥터경이 도착하면 함께
저녁을 하자시던데 거기서 제대로 할 수
있을지.. ”
“ 내가 설명한대로만 하면 돼. 조금은
어설퍼도 빈정거릴 사람은 하나뿐이니
신경 쓰지 말고 ”
혹시 몰라 티처를 다시금 부탁하여 간단한
예절수업만을 배운 뒤라 조금은 걱정이
되지만 내가 익힌 것을 조금씩 알려주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방에서 잠시 쉬고 있으려니
하녀가 올라와 저녁시간임을 알려주어
루이를 앞세운 뒤 조용히 뒤를 따랐다.
비네의 숙부인 헥터경은 헥터공의 형님과
달리 자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같이
백작을 닮아 날카로운 외모였는데 숙부는
돌아가신 백작부인을 닮아 선이 고왔다.
거기에 성격까지 유순하여 나와 루이를
환영해 주었다. 그렇게 차례로 인사를
나눈 후 난 루이에게 미리 준비한 멘트를
꺼내도록 눈짓하자
“ 할아버님께서는 증조부님의 역량을
그대로 물려받으시어 자수성가함은 물론
이거니와 청렴하신 성품 덕에 저택 내
사용인들마저 존경해마지 않는다고
아버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귀족의 귀감이 되고도 충분하다 사려
됩니다. ”
사탕발림 같은 루이의 살살 녹는 말에
누구는 콧방귀를 누구는 입이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못 이기는 듯
백작이 잔을 내려놓으며 한마디를 거들었다.
“ 그렇지. 귀족이랍시고 제대로 구실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저 오래부터 내려오던
가문의 재산과 명예를 거저 얻은 이들과는
우린 확연히 다르지 암~ 스스로 찾은 것이고
스스로 만든 것이니 이 또한 영광일 수
밖에.. ”
“ 비네 네가 이번에 대공가의 큰일을 제대로
해결하였다 전해 들었다. ”
“ 별일도 아닌 것을 그저 부끄러울 따름
입니다. 아버님에게 지혜를 얻어 말을 하였을
뿐인 것을요.”
“ 아우에게서? 하~ 별일이구나. ”
“ 형님께서 남다르다고 전부터 느꼈지만
이리 출중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총명하기 그지없는 조카가 확실히 형님의
자식이 맞나봅니다. 하하하~ ”
하...
순진한 듯 자상한 말투와 부드러운
모습에 또 속을 뻔 했다. 샤말에게서
느꼈던 이질감이 숙부라는 자에게서
느껴져 웃음소리에 맞춰 고개를 드니
역시나...
속마음은 너무나도 다르게 삐죽거리고
있었으니 고개를 다시 숙이며 한숨을
토해냈다. 신부님의 말은 틀린 것 같다.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저주가 확실하다고 기운다. 차라리 속을
알지 못한다면 겉모습에 속아 행복할 수
있을 텐데 쓴 웃음을 애써 감춘 채
백작의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남의 이야기는 끄집어 내어 해결하면서 정작 주인공의 이야기는 유일한 정신적 지주인 모엘신부외엔 알아주지 못해 아쉬웠네요. 그래도 글을 쓰면서 현실에선 소심하고 콩알만한 심장이 이야기 속에서는 대담하고 솔직하며 단단한 심장으로 버틸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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