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어리석은 두 마리 토끼
넌 남의 머리 탐험할 때 허락받고 읽니? 난 몰래 들어가~ 왜? 더 짜릿하니까. 당연한 걸 물어~ 우아한 척, 고상한 척, 도도한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이들조차도 머릿 속은 모두 평등했어. 탐욕, 질투, 분노, 사랑, 연민 말로 다 표현 못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 데 그걸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 쉽게 내놓지 않아서 더 궁금한 속사정 내가 먼저 알아내어 긁어주니 멱살을 잡을 줄 알았는데 내 손을 잡으며 고마워했어. 치부가 드러났음에도 분노하지 않고 차분해지게 만드는 나만의 비결 궁금하지 않니? 그럼 조용히 따라와 그들만의 비밀이야기를 들려줄테니.

" 재판장님 2번째 목격자이신 헥터가의
비네 인토르 헥터영식입니다. "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나의 등장을 알리는
수석행정관의 목소리를 따라 자리에 서서
선서를 한 뒤 착석했다.
" 헥터영식은 사실에 근거하여 본 그대로에
대해 말할 것을 맹세한 바 그 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빠짐없이 전하도록 하게. "
" 네 재판장님. 저는 평소에도 조용히
산책과 독서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산책
하다 중간 중간 그늘이 드리워진 아름드리
나무는 쉼터로서 안성맞춤이라 발트호수를
자주 찾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
대기실에 나서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고 연습하며 확인했던 음성변조는
어색하지 않게 변성기가 지났으나 허스키
함이 살짝 묻어나는 정도의 가벼운 톤으로
조절되어 억지스럽지 않았다.
허나, 조심스러운 건 어쩔 수 없어 평소와
달리 긴장감이 고조된 목소리로 시작했다.
" 그 날은 특히나 제가 좋아하는 노란색
페고니아가 호수 주변으로 흐드러져 야외
수업하기에 알맞은 날이라는 슈테른 공의
말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나선 날입니다.
일부러는 아니지만 제가 성격이 조용한
편이라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을 싫어하여
되도록 사람들이 많지 않은 시간대를
찾았기에 그 곳에서 공녀님과 마주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
" 그렇다면 처음부터 공녀의 발걸음을
알고 간 것은 아니겠군. "
" 물론입니다. 아무리 어여쁘신 영애이시나
이제 겨우 다섯에 머무시는 모습을 훔쳐
본다는 것 자체는 큰 결례를 임을 아는
저입니다. 사생아라 하나 귀족의 반피를
가진 자로서 본분을 잊지 말라신 제
아버님의 명예를 걸고 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 허나,
영식의 방문을 증명해 줄 이가 있는가?
먼저 발언한 첫 번째 증인은 신빙성과
물증이 될 만한 증거물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가 없었네. 확실한 사실이 뒷받침 되지
않는 한 물증은 심증에 근거한 불확실한
산물이거나 조작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잠시 보류하고 두 번째 증인인
영식의 말도 들어보고자 함일세. "
콧대위로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도수 높은
안경을 집게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선한
얼굴과는 상반된 강한 악센트가 실린
어조로 다름이 있는지를 재판장은 노련미를
더한 눈빛으로 요구했다.
조금은 긴장이 누그러진다. 결국은 귀족은
귀족만 믿는다라는 내 생각이 옮음을 증명
되는 순간이다. 어차피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한낱 사용인의 말과
반이라도 귀족의 피를 가진 헥터영식의
말의 경중에서 그렇게 내가 우위를 선점
했다.
그렇게 좋은 출발로 이 기세를 몰아 난 좀
더 강한 어조와 여태 배웠던 억지스러운
귀족가의 자제들이나 쓸법한 제스처를 소심
하게 구사하며 내가 아는 것들을 모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저는 아카데미 시절 중 승마수업을 하다
낙마사고를 당해 졸업을 하지 못하고
나오는 바람에 나머지 마쳐야 할 교육을
집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앞서 말을
하였듯이 마침 역사 선생님이신 슈테른공이
발트호수에 페고니아가 제법 피어있는 데
야외수업을 하면 어떻게냐 권하여 즉흥적으로
행한 것입니다. 수업이 끝난 뒤 슈테른 공은
다음 약속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고 다른
일이 없어 무료했던 전 하인에게 시간을
정해준 후 마저 책을 읽고 있던 중 공녀께서
걸음 하셨습니다. "
" 흐음.. 슈테른공이 있을 당시에 공녀께서
오셨더라면 영식의 말에 무게가 실릴 듯
하나..... "
" 보지는 않았지만 하녀아이 하나가
공녀께서 뜀박질 하시는 지 연신 불러
댔습니다. 솔직히 그 소리에 짜증이 살짝
밀려오더군요. 방해를 받은 것은 저였으니
그러나 곧 뒤를 이은 말소리에 제가 피해
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너무나도
귀여운 목소리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때 분명히... "
" 그때 분명히 무엇이라 하였는가? "
" 공녀께서 말씀하시길
' 세실 걱정 하지 마. 내 말이면 유모도
꼼짝 못해. 넌 그낭 내 뒤에만 있으면 돼.'라고
하셨습니다. "
그렇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판정 안
청중석 맨 끝자리에 앉아있던 이가 벌떡 일어
나더니
" 네~! 맞아요~~흐....흐..흑 아가씨께서
분명...그리..흑.. 제게 말씀해주셨어요..
그리.. 흐흑... "
울음을 터트리는 하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확실히 내가 그 곳에 있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하지만 자칫 하녀와 내가 짜고 한
연극처럼 느껴질 수도 있음에 의심을 두는
자들에게 미리 매수해 둔 행정관이 중얼
거리듯 증명했다.
" 자리보전하던 자가 하녀와 말을 섞을
시간이 얼마나 있었을라고... "
그랬다.
마침 난 첫 재판 날 쓰러진 뒤 두문불출
했다. 뜨문뜨문 내가 헥터가에 있음을 증명
하기 위해 가문사람들이 요양을 위해 기거
하는 서쪽별장에 잠시 내려가 미리 준비
해두었던 약소한 선물을 마을 이들에게
풀었고 보답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얼굴을
잠시 비춤으로써 나는 계속 거기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켰다.
하녀와 접점이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를
대라하면 마을 사람 아무개를 불러도
똑같은 대답이라는 것. 그리고 난 오늘
대기실을 들어가기 전 공녀와 관련된
하녀들이 올 것을 예상하고 쭈욱 그들을
훑어본 것이 다였다. 혹시나 했던 것이
이렇게 들어맞을 줄이야.
" 흠흠.. 조용히 좀 시키시게나. "
" 네. 모두들 정숙, 정숙 하시오. "
수석행정관의 짜증 섞인 말에 중얼거리던
행정관은 서둘러 사람들을 향해 정숙을
요청했다.
" 공녀께서 유모 다음으로 신뢰를 하는
하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확실히 헥터
영식이 그 자리에 있음이 증명되었네.
그렇다면 그대는 그날 무엇을 본 것에 대해
소상히 알려줄 수 있는가. "
" 네. 그날 제가 분명히 본 것은 공녀께서
실수로 물에 빠지셨다는 겁니다. "
파이의 증언을 토대로 모든 계획인 공녀살인
사건으로 시작되었던 판을 나는 완전히
뒤집었다.
솔직히 파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잘하면 몬스터도 버릴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루이와 아이들이
안전할 때나 가능한 일이고 라쿤이라도
물고 늘어질 수도 있었던 것을 좀 꼬았다.
이런 나의 엉뚱한 대답에 눈에 보이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나에게 주사위를 던져
칩을 올린 던컨 수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두들 무슨 헛소리냐며 웅성거렸고 도대체
누굴 변호하려고 하는 거냐며 거세게 항의
까지 하기 시작했다.
서신까지 받아 확실한 답을 기대했던 수비
대장은 매서운 눈초리로 해명을 재촉
하였지만 잠시 침묵했다. 난 이들의 반응이
아닌 파이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
아까부터 닫혀있어야 할 대기실 문이 활짝
열려있는데다 아에 대놓고 의자를 문 앞에
끌어와 관전하는 모습에서 난 기대를 했다.
' 어때? 네가 잡아넣은 고기들이 이젠 어망
속을 빠져 나가려고 해. 이걸 그대로 지켜만
보면 넌 나한테 지는 거야. 욕심 많은 거
알고 있어 어디 무슨 말이라도 해보시지~ '
솔직히 실패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녀석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은
아니었기에 둘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기회가 날라 갔을 때 과연 어떻게 나설지를
보려는 것이다. 허나 파이 자신은 증인으로
나온 것이지 변호인이 아니기에 선뜻 나설
수 없을 테니 머릿속을 이리저리 굴릴 테지.
좀 더 약을 바짝바짝 올릴 필요성을 느낀
난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공녀께선
안타깝게도 발을 헛딛으셨습니다. "
" 영식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그날
영식이 그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네만 "
" 네. 맞습니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아서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
아직 뚜렷하게 자신을 지목하지 않고 말을
흐리는 날 곁눈질 하는 게 느껴진다.
도대체 무얼 생각하는 것인지 정확한 녀석의
속셈을 알기 위해 사람들을 스윽 둘러보는 듯
하다가 우연인 척 파이 앞에서 시선을 멈췄다.
" 지금 그 자식에게서 빼앗은 주머니 속
물건은 돈이 아닌 다른 걸로 채워질 거야. "
" 그게 지금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이지? "
" 넌 평소 반짝거리는 거라면 미친 듯이
모은다지? "
" 하~ 내 취미생활일 뿐이다. "
" 그럼 우선 말을 하기 전 하나만 묻지. "
" 얘기해. "
" 넌 그날 무엇을 가지려고 한 거지? "
파이는 라쿤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물었고
라쿤은 잠시 머뭇거리다 별거 아니라는 듯
바로 내뱉었다.
* * * *
' 그거였어...?
내가 잘못 짚었구나. 아이에게 손을 대려고
한 줄 알았는데.. 하.. 내가 더러운 거였나... '
반짝이는 아이를 가지려고 했는 줄로
몬스터와 난 착각을 하고 미친놈이라고
욕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다행인건지
녀석은 그 정도로 미친 건 아니었나보다.
그렇다는 건 이야기를 내 맘대로 만들 수
있다는 것.
‘ 파이 네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내게
들킨 이상 넌 언제까지고 내 아래다. 잠깐
동안의 시선 교환으로 난 우위를 선점
했으니 그렇다면 제대로 밀어붙여 녀석이
빈틈을 가지지 못하도록 해야겠지. ’
" 공녀님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일어서려는 데 부정하는 공녀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라도 확인을
하고 도움을 청했다면 그리 황망하게는..... "
" 영식이 본 것만을 말하도록 하게. "
재판장은 약간 답답함을 감추지 못한 듯
언성을 살짝 높여 재촉하였다. 확실히
내 쪽으로 집중하도록 그리고 판단력이
흐려지기 딱 좋은 상태.
" 누구에게 경고하는 듯 하였습니다.
고개를 들어 확인을 하려하니 공녀께 감히
다가가는 것도 모자라 손을 뻗으려 하기에
주변에 없는 하녀들을 부르려 소리치려는
데 정말 순식간에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뒤늦게 또 다른 자가 나타나
공녀를 공격하려 했던 이와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구요.. 제가... 제가... 다리만
멀쩡했더라도... "
파이의 직적접인 언급은 피하였지만 분명
누군가가 공녀를 해하기 위한 이와 다툼을
벌였다는 것으로 파이의 증언과 나의
증언이 이어졌다.
' 이가 아주그냥 가루가 되겠군. 그래도
내가 라쿤을 밀어 넣었으니 조금은 풀어
져야지. 널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 '
대기실 문 앞에서 몬스터가 빠져나가는 걸
목격하였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을
것이다. 더 이상 파이에게서 건질 것이
없던 난 곧바로 라쿤을 향했다.
나의 시선에 따라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로
쏠리는 걸 직감한 라쿤은 안 그래도 둘 중
하나가 공녀의 익사사고의 주범으로 몰린
마당인 데 바로 자신을 지목이라도 하듯 바라
보니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 그럼 공녀께서 익사사고를 당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이가 이 둘 중에 누구인지
알 수 있겠는가? "
" 물론입니다. "
" 그럼 대답해보게나. "
" 그 자는... "
남의 이야기는 끄집어 내어 해결하면서 정작 주인공의 이야기는 유일한 정신적 지주인 모엘신부외엔 알아주지 못해 아쉬웠네요. 그래도 글을 쓰면서 현실에선 소심하고 콩알만한 심장이 이야기 속에서는 대담하고 솔직하며 단단한 심장으로 버틸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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