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반성의 시간
넌 남의 머리 탐험할 때 허락받고 읽니? 난 몰래 들어가~ 왜? 더 짜릿하니까. 당연한 걸 물어~ 우아한 척, 고상한 척, 도도한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이들조차도 머릿 속은 모두 평등했어. 탐욕, 질투, 분노, 사랑, 연민 말로 다 표현 못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 데 그걸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 쉽게 내놓지 않아서 더 궁금한 속사정 내가 먼저 알아내어 긁어주니 멱살을 잡을 줄 알았는데 내 손을 잡으며 고마워했어. 치부가 드러났음에도 분노하지 않고 차분해지게 만드는 나만의 비결 궁금하지 않니? 그럼 조용히 따라와 그들만의 비밀이야기를 들려줄테니.
" 그럼 재판날짜와 담당 재판관님이 정해지기
전까지 3일간 머무르실 곳으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주 및 증거 은폐, 조작을
막고자 하는 사항임을 다시금 알려드리며
그 곳으로 이동 전 소지하신 물품들을 모두
탁자 위에 올려 주십시오. ”
담당자의 말에 따라 라올은 자켓 안주머니에
있던 손수건과 휴대용시가 그리고 아버지의
유품인 회중시계를 꺼내놓았다.
담당자는 물품들을 확인하며 이름표를
붙인 후 상자에 담은 뒤 메모를 붙여 바깥에
있던 이에게 전달했다.
" 이제 장소를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의 조치는 이동 시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니
기본적인 조치에 잘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
그 말을 끝으로 담당자는 라올의 두 손에
수갑을 채웠다. 처음 이 곳으로 올 때까지
라올은 긴장감에 떨림은 있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손목에 닿는 딱딱하고
차가운 무언가가 느껴져 내려다보는 순간
이 곳이 어디며 자신이 무었을 했는지
인지되자 두려움이 물 밀 듯 밀려와 자신도
모르게 아니라고 실수한 것 같다 외치고
싶었다. 허나 만약 핏셔가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자리엔 분명 백작부인이 대신
할 것을 아는 그로선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말들을 억지로 삼키며 담당자의 뒤를
따라 죄수들을 태우는 마차에 오른
뒤 딱딱한 긴 등받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마부의 채찍질 소리와 동시에 마차가 덜컹
거렸고 어디론가 움직였다. 작은 통구멍
사이로 빛 한줄기 외엔 어둠이 가득한
마차 안에서 라올은 생각이 많아졌다.
파엘 대신 게일이 자리하는 것을 알았을 때,
파엘의 자식이라고 믿고 있는 어머니의
성화에 메어리를 찾아갔던 날,
유모와 노만을 덫에 빠뜨렸던 그날,
만약 단 한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더라면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라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국 내 명망 깊은 가문의 장남이라는
것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존감으로
인하여 자신의 행보는 항상 옳았고
그래서 거침없었다.
허나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모든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오만에서 비롯된 잘못임을 이제야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렇게 괴로워할 때쯤 담당자가
도착했음을 전했다.
" 내리시지요. "
마차 문이 열리자 작은 통으로 비집고 들어
오던 햇살이 한꺼번에 라올을 덮어 질끈 눈을
감았다 천천히 눈을 뜨니 당도한 곳은 깊은
숲속 작은 오두막이었다.
" 구금 장소는 정해진 것이 아닌 상황에 따라
변동되어 이번은 이 곳이 선택되었습니다.
지금부터 3일간 반성의 시간이라 생각하시고
기거를 하시면 됩니다. 최소한의 생필품과
혹여 잘못된 선택을 방지하기 위한 보호
조치가 있을 것이니 불편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재판날짜와 함께 3일 뒤 찾아
오겠습니다. "
이 말을 끝으로 담당자는 오던 길을 되돌아
갔고 라올 곁엔 안전 및 사고방지를 위해
가드 2명이 배치되었다. 그들의 인도로
라올이 오두막으로 들어서자 곧 문이 잠겼다.
안은 낡긴 하였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라 그닥 나쁘진 않았다.
작은 창 한켠으로 밀어젖혀진 두툼한
암막 커튼을 손으로 당겨 남은 햇살마저
내보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이 구분
되지 않겠지만 마음을 다스리기에는
이 편이 나을 것 같았다.
* 구금 3일 째 되는 날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잠이 깬 라올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뒤 대답을
하였고 이에 담당자가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 3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
" 네. "
" 재판날짜전달과 함께 재판장으로 인도 전
3가지의 질문을 하겠습니다. 답변이 재판에
반영되는 만큼 최대한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네. "
라올은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모든 것에 솔직해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 식사로 넣어드렸던 검은 빵과 멀건 채소죽이
입에 맞으셨습니까? "
조용히 담당자의 질문을 기다리던 라올은
뜬금없이 구금 생활동안 먹은 음식에 대해
물으니 고개를 들어 담당자를 마주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담은 아닐 테고 무슨
말인가 싶어 물으려는데 상대방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고 답을 기다리는 눈치였기에
잠시 뜸을 들인 라올은 천천히 입을 뗐다.
" 솔직히 첫날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생전 먹어본 적 없던 것이라 하지만 곧
찾아온 허기 앞에선 어쩔 수 없더군요. "
" 그럴 테지요. 부드러운 흰 빵과 고소한 크림
스프를 곁들인 고급 진 음식들이 당연하다
여기셨을 테니."
" 배부른 생각이라 여겨 두 번째 날부턴
무엇이 되었든 감사히 먹었습니다. ”
" 그렇군요. "
라올의 목소리에서 그 어떤 거짓이 느껴지지
않고 마음을 읽는 내내 고요함과 맑게
흔들리는 심정을 확인한 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갔다.
" 시트도 없는 딱딱한 침상과 홑이불 하나가
전부인 잠자리가 불편하진 않으셨습니까? ”
" 처음엔 딱딱함에 등이 배겨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설쳤지만 좀 더 지내다 보면
나을 것도 같더군요. ”
" 불 지필 장작이 충분하지 않아 이불을 더
부탁해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
" 죄를 지은 자가 호사스러운 생활을 이어
간다면 우스운 이야기 아닐까요.
억울한 것도 없는 저인 것을요 오히려
빼앗아 간다고 하여도 당연하다 여겼을
겁니다. "
라올은 진실을 담아 대답을 이어나갔다.
머릿속은 복잡한 심정이 사그라들었고
오로지 백작부인의 안위만이 남겨진
상태였다. 마지막 질문을 하여도 될
시간이 온 것이다.
" 마지막이군요. 지금의 솔직한 심정을
재판장에서도 여과 없이 보여주신다면
재판관님을 비롯한 두 명의 행정관들의
마음을 좀 더 얻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두 번째 질문에서도 언급되었던
불씨에 대한 것인데 충분하지 않은 장작을
가지고 버티시는 것이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그것에 대한 불만은 없으셨는지. "
" 불씨 하나로도 밤을 버틸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습니다. 추워도 내일 아침이 오면
따뜻한 햇살이 보태져 넘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부족하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요. "
그렇게 그의 말에서 굳이 들여다보지 않고도
느껴지는 진실이 보였다.
첫 번째 질문의 검은 빵과 멀건 채소죽은
어린 메어리가 나의 저택에서 일을 하기
전까지 먹었던 하루 한 끼의 식사.
두 번째 질문의 딱딱한 침상은 게일이 파엘을
대신한 원치 않았던 삶이며 이부자리는
충분히 살릴 수 있었던 기회.
마지막 질문에 얼마 남지 않은 불씨는
배신이라고 생각 했지만 노만을 데려다
준 것에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한 유모의
마지막 믿음이었다.
어린 메어리의 배고픔을 이용해 거짓인 줄도
모르는 연극에 동참하게 한 것,
게일의 처지를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것,
유모가 마지막으로 믿고자 했던 마음을
저버린 것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는 라올의
마음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얼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 저는 교만하고 자만하여 어리석음을
인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착하고 순진한 아이를 속여 마음을 다치게
한 죄,
형제와도 같은 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죄,
그것을 반성하지 못하고 형제의 부모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죄
이 모든 것에 대한 벌을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
끝으로 담담하게 죄를 인정하며 진심으로
속죄하였다. 이를 모두 지켜보며 듣고 있던
크렌백작과 노만은 조심스레 곁에 있는
유모를 바라보았다. 머리로 수십 번 다짐
하며 냉정해지려 했던 그녀는 얼어붙어
있던 가슴이 녹는 것에 화가일어 눈물만
흘렸다. 그런 그녀와 라올을 번갈아
보던 크렌백작은 안쓰러움과 죄책감에
한숨만 쉬어댔고, 노만의 안경은 뿌옇게
흐려졌다.
" 네, 라올영식의 답변 잘 들었습니다. 이는
이제 재판장에 기다리고 있으신 1명의
재판관님과 2명의 행정관님에게 그대로
전달 될 것입니다. 부디 형량에 영향을
주어 좋은 결과로 반영되길 기대해
보도록 하지요. 그럼 이동을 위한 마차가
곧 준비될 터이니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
그렇게 오두막을 나선 나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들로 가득한 세 명을 마주했다.
" 어찌 재판의 결과를 내려 주셔야 할 텐데
세분 모두 생각이 더 필요하실까요? "
3일이라는 시간이 지금까지 달려온 시간에
비하면 턱 없이 짧아 생각이 모자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연극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죄인은 눈치를 챌 것이
분명하기에 난 이들에게 답을 재촉하였다.
이에 먼저 크렌백작이 입을 열었다.
" 반성의 시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지
않나 싶은데. "
" 시간의 길고 짧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각이 많아지면 복잡
하기만 할 뿐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백작님께서
굳이 원하신다면 진짜 행정담당자와
한번 연결해 보도록 하지요. “
“ 아..아니 내 말은 라올이 좀 더 반성을
했으면 한다는 소리지. 무슨 말도 못하나.
크흠, 노만 자네 생각은 어떤가? "
" 물론 저를 살인자로 만든 것에 대해선
신분이고 뭐고 그냥 멱살부터 올려붙여
내팽개치고 싶지만 그런다고 하여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충분히 반성하고 뉘우치는 것이
속이 완전히 썩지 않은 듯하여 한번
치료해 볼 만할 것 같습니다. 썩어
문드러진 것을 도려내어 고치다보면
언젠간 다른 사람이 되지 않겠나 마리아. "
그렇게 조심스레 유모를 부르며 눈치를 보는
노만과 함께 크렌백작이 기대하는 듯 유모를
쳐다보지만 유모는 눈물을 거두고 침묵만
할 뿐이었다.
" 어차피 최종 결정권은 유모의 손에 있는
것이니 유모, 자네가 원하는 대로 내 해 줄
터이니 그 어떤 말이라도 해보게. 그 무슨
말을 하여도 이 분들께선 토를 달 수 없으니
개의치 말고 ”
“ 하... 산파로 만났을 때가 더 편했는데
제 속내를 그리 쉽게 꺼내던 그 양반이
그립군요. ”
" 후후.. 내가 좀 사람 마음을 잘 어루만져
주긴 하지. ”
" 자네~ 그 얼굴로 노파목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속이 울렁거리겠구만. "
" 크렌백작님께서도 참~ 아주 그냥 완벽하게
속으셔놓고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후후 "
" 아깝군. 산파할멈이 맘에 들어 꽃이라도
건네려 했건만. "
" 아.. 노만선생님께서도 참~ 걱정 마십시오.
제가 대역을 한 산파 분은 따로 계시니 언제
한번 자릴 마련해 드리지요. ”
유모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나를 비롯한
두 사람은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눈치를 살폈고 한동안 침묵을 이어가던
유모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 도련님과 대면하여 말을 나눈 뒤 결정해도
될까요.? "
이에 나는 문의 손잡이를 잡으며
" 그러지. 죄인은 이미 심판을 받을 준비를
마친 듯하니 "
" 아니 제가 열고 들어가겠습니다. "
그렇게 재판관님이 직접 심문하시겠다하니
두 행정관은 말을 아낀 채 길을 열어 직접
문을 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유모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아직까지도
시퍼런 가슴팍을 한손으로 조심히 감싸며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지런히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기다리고 있던 라올과
마주했다.
" 유.. 유모가 여긴... "
" 재판장에서 증언을 하기 전 제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 왔습니다. "
" 아 그러한가 물어보게. "
문이 반쯤 닫힌 상태가 되어 또렷하게 보이는
유모의 모습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숙인 라올은 그녀에게서 그 어떤 말도 들을
각오를 하며 기다렸다. 그런 라올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모는 만감이 교차했다.
남의 이야기는 끄집어 내어 해결하면서 정작 주인공의 이야기는 유일한 정신적 지주인 모엘신부외엔 알아주지 못해 아쉬웠네요. 그래도 글을 쓰면서 현실에선 소심하고 콩알만한 심장이 이야기 속에서는 대담하고 솔직하며 단단한 심장으로 버틸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말해봅니다.
- 작가의말
너무 많이 돌아와 쓴 잔을 마셨으나 그 것에
대한 분노보다 인정하고 뉘우치며 진심을
다해 반성하는 이에게
우리는 세상에 모든 욕설을 그러모아 입에서
죄다 뱉은 뒤 결국엔 용서를 한다. 용서라는
그 단어가 죄를 지은 이의 가슴에 제일
무겁게 얹혀 평생을 속죄하는 기회를 주기
위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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