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이제 남은 것은 보이지 않는 진실
넌 남의 머리 탐험할 때 허락받고 읽니? 난 몰래 들어가~ 왜? 더 짜릿하니까. 당연한 걸 물어~ 우아한 척, 고상한 척, 도도한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이들조차도 머릿 속은 모두 평등했어. 탐욕, 질투, 분노, 사랑, 연민 말로 다 표현 못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 데 그걸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 쉽게 내놓지 않아서 더 궁금한 속사정 내가 먼저 알아내어 긁어주니 멱살을 잡을 줄 알았는데 내 손을 잡으며 고마워했어. 치부가 드러났음에도 분노하지 않고 차분해지게 만드는 나만의 비결 궁금하지 않니? 그럼 조용히 따라와 그들만의 비밀이야기를 들려줄테니.
" 기록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찾아보고
얘기하시오들. 내 평생 부끄러운 짓이라곤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거늘 손녀를 애타게
찾는다기에 딱한 사정이 안쓰러워 여태껏
도와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나 원 참~! ”
꼼꼼히 찾아보는 이들에게 다시금 산파는
결백을 주장하며 뒤로 물러났고 이에
크렌백작은 라올을 향해 말했다.
“ 산파가 저리 역정을 내니 다시 한 번 더 봐야
할 필요가 있겠구나. 어쩜 형수님께서 기쁜
나머지 놓친 것일 수도 있으니 이 참에 네가
다시 확인해 보거라. ”
그렇게 직접 찾아보라는 숙부의 말에 똥 씹은
표정을 한 라올. 그런 라올이 어떻거나 말거나
원로장은 안경을 고쳐 쓴 뒤 태연히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로아의 필체와 대조해 나가기
시작했다.
* 백작부인의 방.
게일의 장례식인지 파엘의 장례식인지 이젠
분간도 되지 않는다. 억지로 울어야 할지
아니면 파엘이 죽던 그날 밤 몰래 삼키며
참았던 슬픔을 이제 제대로 쏟아 내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망연자실 하고 있을 때 바깥에서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 할머니 메어리입니다. 들어가도 될런지요. "
" 들어오너라. "
무늬 없는 까만 드레스를 차려 입은 아이가
방으로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은 뒤
" 마님. 이제 진실을 말씀해주십시오. "
갑작스레 달라진 아이의 태도와 말투에
당황한 백작부인은
" 아가 왜 내게.. "
" 할... 아니 마님 마님께선 제가 파엘도련님의
아이일 거라 믿고 이 곳에 데려오신 것입니까? ”
“ 무슨 말이냐? ”
“ 마님께선 정말 손녀를 애타게 찾으신 것이
맞으십니까? ”
갑작스레 아이가 말을 바꾼 것이 달튼
자작이나 다른 이들에게서 무슨 말이라도
들었나 싶어 아이를 달래었다.
“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나 어른들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오고가는 중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말거라. 그러니... "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얼버무리는 백작부인
말에 실망한 듯 메어리는 아무런 말없이
사진 한 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메어리는 믿고 싶었다. 이 곳으로 오기 전부터
백작부인이 진실로 아들의 아이를 찾고자
했기를 간절히 바랬다. 만약 그렇다고 단
한마디만 해 준다면 그깟 상처 따윈 아무러면
상관없었다. 허나 부인은 아이가 건넨 사진을
보는 순간 눈물로 자신에게 진실을 알려 달라
매달리는 메어리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 그래서 그런 것이었구나. 하아... ’
파엘의 방으로 처음 들어왔던 날 병상에 누워
있던 이를 대면하였을 때 아이가 보였던
행동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땐 낯설어
그러려니 했던 것이 사진을 봄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다. 메어리가 살아남기 위해
약기는 했지만 거짓에 익숙할 만큼 영악
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기약 없는 시간 동안
이지만 언젠가 파엘을 만나게 되면 핏셔가의
아이라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 로아는
오래 전부터 세뇌하다시피 메어리에게
핏셔가의 가훈을 반복하여 말해 왔기 때문.
친아비라 믿고 있던 이를 대면한 그날 밤
메어리는 베게 맡에 낡은 사진을 꺼냈다.
그것은 엄마가 가지고 있는 단 1장의
친아빠 초상화였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보았지만 분명 달랐다.
초상화의 눈은 에메랄드 색인데
아까 병상 위에 있던 이의 눈은 잿빛.
" 메어리. 내게 할 말이 없구나. ”
" 아니어도 원망하지 않을 테니. 제발
여쭙니다. 손녀를 찾으려 애쓰신 것이
맞으신가요? ”
" 돌아가거라. 너에게 더는 할 말이 없어...
그만 나가주렴. "
결국 자신을 외면하며 회피하는 백작부인의
태도에서 모든 것이 거짓 이였음을 알게 된
메어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낡은 쪽지를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
" 이제 여기는 내 집이 아니야. 엄마한테 가고
싶어. 엄마.. 엄마.. 흐..흑.. "
* 접견실
" 아직인가? ”
급한 성격의 크렌백작은 여전히 안경을 쓸어
올리며 보고 있는 원로장을 다그쳤다.
" 9년 후의 기록까지 찾아보아도 비슷한
필체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본이
맞다고 한다면 분명 안에 있어야 할 텐데. ”
다른 곳에라도 로아의 사인이 남아있어야
확실하게 라올의 거짓을 증명할 수 있으나
그러지 못한다면 자신의 주장 역시 증명
하지 못하는 꼴이 되니 다시 라올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음에 초조해지던 차
접견실 안으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 찾지 못하십니다. 제대로 쓰질
않았으니까요. "
* 메어리의 방
" 미안해 아가. "
" 어..엄마? 엄마야? 어허헝.. 엄마~~ "
엄마가 보고 싶어서 나타난 꿈이려니 했는데
꼭 안아주는 것이 분명 엄마였다.
" 에휴 할미한테 부탁했으면 더 빨리 만나게
해주는 것을. "
" 흐..흐흑...산파할머니~ "
" 그래그래. 아가.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라 곧 들어 가야 하니 자네는 내가
신호를 줄 때 바로 들어오도록 하게. ”
“ 네 알겠습니다. ”
그렇게 접견실로 들어선 이는 좀전 산파와
함께 메어리 방을 먼저 찾았던 메어리의
어미 로아였다. 로아를 마주한 라올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어떻게
된 것이냐 물으려 입을 떼려는 데 라올의
앞을 가로막으며 원로장은 우선 산파
일지를 로아에게 건내며 본인의 사인을
직접 찾도록 하였다.
* 3일 전 정보상의 집
리안이 다녀간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로아는
자린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회복해갔다.
그런 그녀가 달라진 걸 느낀 건 얼마 되지
않은 오후.
평소 유령처럼 행동했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딴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린의 말에
곧잘 답을 하는가 하면 핏기 없던 얼굴에
희미하지만 미소가 간간히 떠오르며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이에 자린은 다행이다
싶어 이제 스스로 거취를 정하도록 도왔다.
만약 저택에 남겠다고 한다면 주인님에게
나중에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사용인들의
방을 주려는데 뜻밖에 집으로 돌아
가겠다고 했다. 혹시나 마음이 바뀌려나
싶어 재차 물어도 답은 똑같기에 자린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집으로 가는 길에
동행을 하기로 하고 나섰다.
그렇게 도착한 집 앞엔 이미 리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맨발로 저택을 찾았던 리안의
피투성이 발은 어느 새 아물었는지 낡았지만
신발이 신겨져 있었고 집안에선 맛있는
냄새와 함께 문을 여니 너무나도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이 로아와 자린을 반겼다.
이에 감동을 한 로아의 얼굴을 본 자린은
그제야 안심을 하며 그들을 남겨둔 채
마음 놓고 돌아섰다.
* 핏셔가 접견실
원로장에게 산실기록지를 건네 받은 로아는
몇 장을 넘기더니 한 페이지를 고정한 후
원로장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 여기 이 페이지입니다. "
" 페이영애 그곳은 이미 내가 확인하였네만. "
" 원로장님 영애라는 호칭은 존재하는
가문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페이가는
이미 몰락하여 사라졌으니 편하게
로아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
" 흠흠 그래도. 그건 그렇고 그 페이지의
필체는 그대의 서신에 있는 필체와
달라서 말이지. "
" 다를 수밖에요. 왼손으로 쓴 것이니까요.
혹여 파엘 오라버니보다 라올 오라버니께서
저와 메어리를 먼저 찾게 된다면 아이만
빼앗길 수도 있어 두려운 마음에 그리 해둔
겁니다. 그땐 그게 최선이었으니까요. "
그렇게 얘기하며 로아는 왼손으로 기록지에
있는 사인을 그대로 써내려갔다. 직접
눈으로 보아야 믿는 크렌백작의 성격을
어릴 적부터 봐왔던지라 그런 것이다.
이로써 모든 이들 앞에서 증명된 로아의
필체를 통해 메어리가 파엘의 자식이 아님을
알게 되었으니 이로서 가면 쓴 이가 말한
보이는 진실이 해결되었다. 이제 보이지
않은 진실만이 남았는데 이것에 대해
어찌할지 크렌백작은 고민에 빠졌다.
양심고백이라도 하듯 이것을 만천하에
드러낸다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형수와
조카를 고발하는 꼴이 되고 나아가 그들의
죄로 인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 이를 모른 척
넘어가기엔 실로 무거운 일이 아닐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 레드크렌 "
골똘히 고민하는 백작 옆으로 산파가 슬며시
다가와 소싯적 애칭을 다정히 부르는 것에
놀란 크렌이 산파를 바라보니 싱긋이 웃는
그녀.
" 어찌 이야기가 재미있게 흘러가는군요.
보이던 진실이 제대로 해결되었으니
이젠 보이지 않는 진실을 터트릴 때가
된 듯 합니다만.. "
" 이..이런... 자네였었나? 감쪽같이 속았군. ”
어이없어 하는 크렌백작의 모습에 쭈글거리는
주름이 한번에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하며
말을 이었다.
"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제가 워낙 못하는
게 없어서. "
" 허 참. 그건 그렇고 내게 잠시만 시간을
주게. 아직 결정을 못하였어. 라올의
이야기도 제대로 듣지 못했고... "
" 핑계입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
한 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요? 아비 없는 자식
소리 듣지 않게 하신다더니 나이는 어쩌지
못하나봅니다. 쯧쯧 "
" 자네 맹랑한 건 알지만 선을 지키게. 나머지
반을 날리고 싶지 않으면. "
" 네네~ 알겠습니다. 그럼 의뢰인을 위한
배려로 제가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내일
있을 장례식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게일? 아니면 파엘영식?
선택은 자유시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하늘과
땅이 될 것입니다. 저는 화끈한 것에
끌리지만 크렌백작님의 선택이니 간섭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럼 부디 후회 없으시길. "
그렇게 말을 남긴 산파는 곧장 웅성거리는
인파 사이로 들어가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 아니 뭘 선택하든 그것은 하늘과 땅이 될 수
없지. 친절히도 말했지만 자네는 내게 지옥을
선물한 것이야. "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탁자를 손으로 강하게
내리친 크렌백작은 망연자실한 라올을 노려
본 뒤 뒤돌아 별실로 돌아갔다.
그랬다.
두 젊은이의 죽음은 그저 눈에 보여 지는
사실일 뿐.
내면은 확연히 다르다.
내일 파엘의 장례식이 치러진다면 라올과
백작부인의 죄는 덮일 테지만 그들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게일의 어미인 유모의 한을
어찌 감당할 것이며 그로 인한 죄책감은
어떻게 떠안을 것인지...
그렇다고 게일의 장례식이 치러진다면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라올과 백작부인은
제국 친위대에 붙들려 감옥으로 압송
될 테고 게일에게 행했던 일련의 일들과
시신은폐 문제로 참형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니. 결국 크렌 백작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그러다 새벽빛이 사라지는 것에 무언가를
결심한 듯 먼저 형수의 방으로 찾아가
문을 세차게 두드려 형수를 깨운 뒤
억지로 끌다시피 해 라올의 방으로 갔다.
어차피 선택해야 할 일이고 감춘다고
감춰지는 것이 아니니.
" 숙부님 이 시각에 무슨 일이십니까?
어머니까지 모시고 "
라올 역시 뜬 눈으로 밤을 보냈는지 잠이
덜 깬 듯한 표정이 아니기에 크렌백작은
말문을 열었다.
" 마침 깨어있었구나. 잘됐다. "
" 새벽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
백작의 눈에 두 사람 다 지친 기색이 역력
했다. 그런 모습에 크렌백작은 자신의
선택이 이들을 어디까지 몰아갈지 잠깐
아릿해져 왔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언제까지고 가슴에 돌덩이를 얹고 살 수는
없는 법. 라올은 몰라도 형수의 얼굴에선
이미 양심이라는 그늘이 덧씌워져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형수에게 먼저 말했다.
" 이젠 파엘에게는 자식이 없다는 것이 확인
되어 파엘의 몫으로 남겨져 있던 유산은
핏셔가로 환수될 것입니다. "
마치 사실을 재확인이라도 하는 듯한 숙부의
무심한 말투에 괜시리 화가 난 라올은 날을
세우며 대들었다.
" 어제 모든 것을 확인하셨지 않습니까.
어머니를 대동하여 제게 훈계라도 하실
요량이라면 되었습니다. 어차피 끝난
일에 저도 더 이상 힘 쓸 생각 없으니. "
"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파엘의 안식을
위해서라도 옳은 것이니 넌 가슴에 좀 더
양심이라는 것을 키워야 할 필요가 있어. "
" 솔직히 전 양심보다 돈이 급한 사람입니다.
지금 제 입장이 어떤지 아신다면. "
"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징징거릴
것이냐~!!! 너를 외국으로 보낸 것도 보는
눈을 키워 성장하라 한 것을 가지고 있던
밑천까지 바닥 채 긁어 거지꼴로 애걸
했을 때 그냥 두어야 했었는데. 휴우... "
" 숙부님~~!! "
" 도련님 그만하십시오. 이미 지난 일이에요.
내일 파엘의 장례식을 끝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 할 테니."
" 형수님도 정신 차리세요. 이미 끝난
일이라면 내일 장례식이 누구의
장례식인지는 분명히 하셔야지요. "
" 제 동생이 죽었습니다. 파엘이요~
숙부님 조카 파엘이라구요~! "
" 그래. 죽었지. 죽었어. 4년도 더 전에!! "
남의 이야기는 끄집어 내어 해결하면서 정작 주인공의 이야기는 유일한 정신적 지주인 모엘신부외엔 알아주지 못해 아쉬웠네요. 그래도 글을 쓰면서 현실에선 소심하고 콩알만한 심장이 이야기 속에서는 대담하고 솔직하며 단단한 심장으로 버틸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말해봅니다.
- 작가의말
결국은 드러나는 것이 거짓이다. 밑바닥으로
숨어들어보았자 그것은 나무 뒤로 머리만
숨긴 채 호랑이가 지나가길 바라는 어리석은
토끼인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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