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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샤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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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샤
작품등록일 :
2012.02.16 21:50
최근연재일 :
2012.02.16 21:50
연재수 :
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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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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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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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16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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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1. 레노 페이더 (2)

DUMMY

2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유산 매장 추, 그게 뭐 어쨌는데!”

“오빠……. 이제 우리…… 나가야 해.”

유라가 훌쩍이며 말했다. 레노는 펄쩍 뛰었다.

“나가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어머니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했다. 그러나 깊게 패인 주름이 한층 더 깊어지는 것만은 숨길 수 없었다.

“이 언덕을 광산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의 집들은 전부 철거되겠지.”

“누구 맘대로?”

레노가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는 레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형이 오면 상의하도록 하자. 이사를 가야지.”

“이사를 가? 돈은 있어?”

“그러니까, 상의를 해야지.”

레노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무슨 돈이 있단 말인가. 상의를 하면 없던 돈이 어디서 튀어나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웃기지 말라 그래.”

레노는 문 밖으로 나갔다. 유라가 따라 나오려고 했지만 레노는 손을 저었다.

“이사 갈 돈은 없어. 나 오늘 대전료를 받았어.”

“싸움질은 하지 말라고 했잖니.”

“엄마, 엄마한테는 싸움질이지만 나한테는 일이야. 이사를 가려면 내가 오늘 받은 대전료를 천 번 받아야 해. 돈은 없어.”

레노는 화를 풀지 못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여긴 우리 집이야!”

“여긴 그들의 땅이다.”

“우리 아버지가 지은 집이야!”

“누가 지어도 마찬가지다.”

“시끄러워! 이 집을 부수러 오는 놈들이 있으면 다 죽여 버리겠어!”

“허튼 짓 하지 마라. 레노야.”

레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집을 나서고 말았다. 밤공기가 찼다. 언덕의 위에서는 도심지가 훤히 보였다. 마법의 빛은 신비하고 영롱했다. 밤하늘의 별 보다도 예뻤다. 하지만 레노는 애써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별이 반짝인다.

차가운 밤공기가 레노의 눈물을 차갑게 식혔다. 레노의 볼을 타고 차가운 눈물이 흐른다. 집을 나간다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레이는 광산에서 잠을 자게 될 것이고, 레노는 거리를 배회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부잣집에서 눈칫밥을 먹게 될 것이고 유라 역시 공장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어린 여자애인 유라에게는 더 없이 위험한 일이다. 유라는 언제나 자신이 지켜줘야 한다. 울보에 응석밖에 모르는 아이니까. 하지만 레노는 이제 그럴 수가 없었다.

“왜 사는 거지?”

레노는 중얼거린다.

“이렇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지?”

살아있으니까 산다. 레노도 그런 것쯤은 안다. 하지만 레노의 앞길에 놓은 것은 끝없는 가난이다. 세상은 레노와 같은 가난한 이들에게 독신을 강요했다. 독신의 강요라니. 레노는 웃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집이 있어야 했다. 집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든다. 그 돈을 마련하지 못한 남자들은 아내를 얻지 못한다. 그런 식으로 골방이나 겨우 얻어서 살아간다. 독신으로 사는 남자들에게 행복한 가정 같은 것은 꿈에서나 나오는 일이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뭔가 해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조차 허위이고 사치임을 안다. 하지만 레노는 답답했다. 레노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해도 레노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가족과도 생이별을 한 채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밝은 미래는 이곳에는 없다. 레노는 마을을 둘러본다. 모두 레노와 같은 이들이다. 젊은이들도 많았다. 그들의 어깨는 하나같이 축 늘어져 있었다. 도심지에 사는 사람들을 이들을 ‘패배자’라고 불렀다. 레노는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태어날 때부터 패배자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집이 가난해서 늘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덕분에 제대로 키가 자라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 워낙 가난해서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이들이 무식한 것은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모두가 균등한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일해도 버는 돈이 적을 뿐이다. 이들이 나태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이들은 항상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만 한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언제나 풀이 죽은 패배자로서 살아가야만 한다.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이 상황을 헤쳐 갈 방법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에 배우지 못한 것은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배움의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이 없기 때문에 결혼도 하지 못하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삶조차 제대로 꾸려가지 못한다. 옆의 파셔넬드에서는 한 거대한 저택에서 육십 명이 공동생활을 하다가 전염병이 돌아 모조리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한 저택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것은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다. 세상은 이들을 끝없는 고통으로 밀어 넣었다.

레노도 마찬가지다. 술 취한 관객들 앞에서 목검을 휘둘러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두들기는 것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늘 레노에게 말한다. 네가 그렇게 사니까 쓰레기인 거라고.

멍청이들. 그렇게 사니까 쓰레기인 게 아니라, 쓰레기로 태어나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다.

레노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다. 아무리 별을 바라보며 흐느껴도, 분을 참지 못해 소리쳐도 바뀌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이 뜨거운 분노만큼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밤이 깊어 곤충들이 우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울릴 때쯤 레노는 집으로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집에 생기라고는 없었다. 가족 모두가 과도한 노동에 시달린 탓이다. 내일도 유라는 의류공장에 가서 간단한 튜닉을 제작할 것이다. 어머니는 다시 저택으로 가서 청소와 쓰레기 처리, 가구 재배치 같은 허드렛일을 도울 것이다. 나이 오십의 여성에게는 강도 높은 노동이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지만 잠은 잘 오지 않았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안고 레노는 오랫동안 천장을 노려보았다.

아침.

결코 활기차지 않은 아침이 다가왔다. 유라는 밤새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잠에 잔뜩 취한 얼굴을 하고 유라는 공장으로 향한다. 유라는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레노의 시선의 유라의 팔꿈치로 향한다. 팔꿈치가 닳아 헤져서 유라의 하얀 팔이 보였다. 레노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그 뒤를 이어 어머니가 나갈 차비를 한다. 어머니는 남색의 폭이 넓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레노는 그 치마를 다섯 살 때부터 봐왔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입던 치마일지도 모른다. 짙은 남색이었던 그 치마는 이제 색이 거의 바랬다. 어머니는 어제의 여파 때문인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출근길에 올랐다.

아침 식사 같은 것을 레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레노는 항상 배가 고팠다. 모든 순간을 늘 허기진 상태로 사는 것이다. 빵도 거의 떨어졌다. 오늘 레노는 어제 벌어온 대전료로 빵을 살 것이다. 말린 고기 같은 것도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레노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레노는 난장판을 만들어놓은 유라의 방을 대충 정리하고 화장실로 가 씻기 시작했다. 어제 과격한 운동을 한 탓인지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몸의 몇 군데에는 벌겋게 멍이 든 곳도 있었다. 헤이커의 목검이 들쑤시고 지나간 곳이다. 레노는 자신의 육체를 소상히 살핀다. 타박상은 있지만 위험한 부상은 전혀 없었다. 그만큼 레노는 몸을 아끼면서 싸운다. 조금 더 무리를 하면 상대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고도 이길 수 있었지만 그럴 경우 몸에 부담이 강해진다. 부담이 큰 동작을 취할수록 부상의 위험도 커진다. 살짝만 삐끗해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검투사란 그런 족속들이다.

레노는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집요하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단련된 근육이 마치 조각처럼 선명하게 굴곡을 드러낸다. 탄력이 넘치는 피부와 강인한 근육과 굵은 뼈. 게다가 레노는 선천적으로 유연하기까지 했다. 매끈한 레노의 몸에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구석구석 닦아낸 레노는 마침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레노는 이상하리만치 털이 적었다. 다른 남자들의 풍성한 가슴 털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모는 잘 자라지 않았고, 그 흔한 다리털마저 없었다.

레노는 거울을 바라봤다. 단련된 근육과 탄탄한 목 위로 곱상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난다. 짙은 눈썹은 레노의 인상을 더욱 강하게 어필하고 있었지만 레노의 얼굴은 전반적으로 선이 고왔다. 피부도 흰 편인 데다가 잡티 없이 깨끗했다. 레노는 자신의 얼굴에 불만을 가졌다. 얼굴이야 잘 생긴 얼굴이었지만 그다지 남자답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날렵한 턱도 문제다. 조금 더 사각이었다면 타인에게 더욱 강력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턱이 갈라지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차라리 헤이커처럼 겉으로 보기에도 위압적인 인상이기를 레노는 늘 바라마지 않았다. 이래서야 기생오라비나 다름없는 외모가 아닌가.

다행히 키는 큰 편에 속했다. 레노가 자신의 신체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신장이다. 훤칠한 키를 가진 만큼 만만하게 보일 일은 없으니 그것만은 만족할 수 있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늘 업신여김을 받아온 레노에게 있어서 ‘강함’은 레노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조금 더 강한 남자가 되고 싶었다. 강인하고 우직한 남자가 되어 가족 모두를 지키고 싶다. 그게 레노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우릴 무시하는 놈들은 다 죽여 버릴 거야.”

열여덟 살의 레노에게 자존심과 자긍심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거칠고 험한 성격도 따지고 보면 자존심 때문에 생긴 것이다. 레노는 약한 마음과 감상을 싫어했다. 혹시라도 눈물이 날 것 같을 때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만 흘렸다.

오랫동안 몸을 씻고 나니 몸의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늘 신체를 단련해온 레노는 몸의 자그마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근육이 서서히 회복되는 듯 했다. 하루나 이틀 쯤 지나면 가뿐해질 것이다. 여전히 여기저기 당기고 아프지만 이건 오히려 좋은 징조다. 그만큼 강해진다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물을 한 잔 마시고 외출을 하려 할 때였다. 누군가가 똑똑, 하고 레노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뭐야?”

레노는 퉁명스럽게, 그리고 최대한 위압적으로 말하며 문을 벌컥 열었다. 나타난 것은 젊은 여성과 남성의 이인조였다. 그들은 하얀 색의 말끔한 제복 차림이었다. 관청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임에 틀림없었다.

“페이더 씨 댁이죠?”

“흠. 내가 레노 페이더요. 무슨 일이시오?”

레노의 대답에 여성 관리가 얼른 가져온 종이를 확인한다. 레노의 눈에는 답답하고 멍청하게 보였다. 상대와 대화를 할 때는 눈을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닌가.

“레노, 레노씨? 아하. 둘째 아드님이셨군요. 부모님은 안 계신가요?”

“출근하셨수다. 무슨 일인데 그러쇼?”

퉁명스럽고 불친절하게 말하는 레노였지만 가슴은 쿵쾅거렸다. 어제 어머니가 한 말이 떠올라서다.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레노는 자신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레노는 흔들리는 눈으로 여자와 남자를 살폈다. 관리임에 틀림없는 두 남녀. 여자는 레노와 그리 나이 차가 나지 않아 보였다. 단발머리를 한쪽은 귀 뒤로 넘기고 있는 귀여운 얼굴의 여자. 남자 쪽은 서른을 되어 보이는 평범한 인상의 사내였다. 여자가 얼른 종이 뭉치를 살피더니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테반 마을 전체가 광산 개발 재검토 지역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따라서 과거 지어진 건축물들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실시했는데요, 그 중에서 11개 건축물이 무허가로 지어졌음을 알게 되었어요. 혹시 이 집이 허가를 받은 일이 있으셨나요? 만약 누락이 된 거라면 증거물을 제시하셔야 재심사가 가능하시거든요.”

이들은 언제나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해댄다. 레노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를 바라봤다. 이 여자는 매지션 계급은 아니다. 그렇다고 레노처럼 빈민인 것도 아니었다. 도심지와 빈민촌의 사이에 위치한 중간 벨트 지역에 살아가는 일반적인 서민일 것이다. 피루넬드, 아니 네이란스 공화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빈민이었고, 그 다음이 지금 눈앞에 있는 하급 관리 같은 서민들. 가장 적은 숫자가 바로 매지션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허가는 무슨 허가란 말요? 이 집은 우리 아버지께서 생전에 지은 집입니다. 우리 집이라고!”

레노의 위압적인 말투에 여자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헤헤 웃었다. 멍청한 웃음이다. 레노는 그런 웃음을 싫어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는 투의,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자기 방어.

“직접 지으셨어도 먼저 허가를 받으셔야 합니다. 실제로 지금 레노님 댁 주변 땅은 국가 소유의 공지로 표기되어 있거든요. 허가받지 않은 건물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철거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철거?”

레노가 눈을 부라렸다. 여자는 당황했는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누구 맘대로 철거를 해? 그런 법이 어딨어! 누구 맘대로 우리 집을 부수니 마니, 이것들이 미쳤나!”

여자는 당황한 듯 미간을 모으며 얼른 대답한다.

“저, 주택 소유와 토지 매매 및 공적 자산에 관련한 법률 13조 4항에 의하면 무허가 주택의 경우 국가가 언제든 철거 및 토지몰수를 실행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쉽게 설명하자면 이제 일주일 안으로 철거 명령이 떨어질 것이고, 철거 처리반이 일에 착수하게 될 거란 말이죠.”

레노는 부글거리는 속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레노는 참지 못하고 등에 매고 있던 목검을 꺼내 여자에게 겨눈다.

“꺅!”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 흔들리는 눈동자. 레노는 여자의 눈을 노려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여긴 우리 집이다. 당장 꺼져. 철거라고? 마음대로 해. 오기만 해봐. 부수러 오기만 해보라고! 전부 죽여 버릴 거니까!”

여자는 겁에 질린 듯 숨을 몰아쉬었다. 여자가 머뭇거리자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끼어든다.

“어이, 자네! 나이도 어린 친구가 겁이 없구만! 지금 이게 무슨 행패란 말인가!”

남자는 제법 호기 있게 외치고 있었지만 레노는 알 수 있었다. 그의 다리가 지금 떨리고 있다는 것을. 레노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행패라고? 지금 남의 집 앞에서 행패 부리고 있는 게 누군지 몰라?”

“왜…….”

남자와 레노가 눈을 부라리는 와중에 여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레노의 눈이 여자의 얼굴을 향한다. 여자는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왜 허가를 받지 않았어요? 글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이 집에는 배운 사람이 없어요? 허가부터 신청하고 집을 지었으면, 적어도 여기 사는 다른 사람들이 받는 대우는 받을 수 있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철거될 때 보조금을 받게 된다고요.”

“배운 사람…….”

레노는 여자의 말을 자기도 모르게 반복해본다. 배우고 싶지 않아서 배우지 못한 게 아니다. 그렇게 설명해도 이 여자는 모를 것이다.

“없어.”

“바보 같아.”

여자가 레노의 눈을 노려본다. 순진해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 이 여자에게 악의는 없다. 레노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공화국 정부에서 무지자에 대해서 지원하고 있잖아요? 배우고자 마음만 먹으면 관리들이 파견될 텐데…….”

“……너 같으면 그걸 신청하겠어?”

레노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여자는 깜짝 놀라 레노의 얼굴을 살폈다. 레노는 잠시나마 쓸쓸한 낯빛을 비춘다.

“그건……. 적선이잖아.”

“적선, 이라고요.”

“그래. 우리 같은 사람들이 불쌍하니까. 적선하겠다는 것 아니야? 우리가 그런 사람 불러다놓고 굽실거려가면서까지 배워야 하나?”

“배웠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전부 당신이 모르니까! 허가를 어떻게 받는지도 모르고, 왜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공문이 오면 읽지도 않고 찢어버리고, 그러니까 이렇게 당하는 것 아녜요! 그것만 알았더라도!”

여자의 외침에 레노는 냉소했다.

“알았더라도 쫓겨나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 그렇지?”

레노의 그 말에 여자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난다. 여자는 뭐가 억울한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깨문다.

“……저도 좋아서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니에요.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죠.”

“……나도 좋아서 여자에게 이런 걸 겨누는 건 아니야.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여자는 뒤로 물러서서 레노와 한참 거리를 벌린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치 주문을 외우듯 말을 빠르게 이어갔다.

“그러므로 이 무허가 주택 거주자께서는 상황을 이해하시고 일주일 내로 집을 비워주시길 바랍니다. 집을 비우지 않더라도 철거 시행령은 그대로 진행될 것이며 기술적으로도 문제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이상 피루넬드 피레스 남구 토지조사과 헬렌 텔시였습니다.”

일방적인 통보. 레노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전부 시덥지 않은 일이 아닌가. 하지만 여자는 아직 할 말이 남았던 모양이다.

“충고 하나만 하죠. 앞으로 찾아오는 관리들에게 그런 태도, 바꾸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좀 배우세요. 무식해서는. 그러니까 매일 당하는 겁니다. 알아야, 배워야 주장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여자는 의지에 찬 얼굴로 말하고는 휙 돌아서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레노는 다시 목검을 등에 매며 여자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러는 너는, 그렇게 잘 배워서 고작 이런 일이나 하고 다니나?”

레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의 살기 어린 눈동자가 레노의 얼굴을 향했다. 레노는 여자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여자는 한참을 노려보더니 돌아서서는 눈물을 훔쳤다. 레노는 그 광경을 킬킬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 아닌가. 이 척 보기에도 허름한 집에 와서 무허가라느니 뭐니 떠들어대는 관리들과, 그런 말을 들었다고 여자에게 악의 섞인 조롱이나 늘어놓는 자신. 이게 전부 웃긴 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리고 지금, 저 헬렌이라는 여자가 울자 슬쩍 여자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위로하는 척 하는 저 사내놈의 더러운 속내까지 전부 웃기지 않은가.

잔인했다는 것을 안다. 여자에게 비열한 말을 했다는 것도 안다. 레노는 자리에 주저앉아서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세게 때렸다. 그리고는 얼얼한 볼을 어루만지며 그대로 잠시 앉아 있었다.

“시장에 가자. 먹을 것 좀 사자. 살아야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레노는 자신에게 다그치듯 혼잣말을 반복해본다.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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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Lv.1 서빙요
    작성일
    12.02.16 22:03
    No. 1

    잘보고 갑니다! 뭔가 꿈도 희망도 없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6 ACHT.W
    작성일
    12.02.16 22:07
    No. 2

    ......건필입니다. 그나저나 정말 꿈도 희망도 없네.... 킁.....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7 달필공자
    작성일
    12.02.16 23:22
    No. 3

    난쏘공과 같이 너무나 암울한 상황 . 주인공은 어떻게 버틸지ㅜ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9 세마포
    작성일
    12.02.17 00:27
    No. 4

    진짜 암울한데 재밌네요 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9 로지텍맨
    작성일
    12.02.17 16:04
    No. 5

    추후 글의 전개를 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배움의 기회가 있다?는 대화가 조금 있는데 구체적인 것을 들어보아야알겠지만.. 또한 먹고살기바뻐서 그런걸 배울 기회가 없을수도 있겠지만
    조금은 뭔가 잠깐 걸려서 적어봅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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