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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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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46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10.02 15:0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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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약도가 있는 방

DUMMY

고충만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림을 가리켰다.


그가 말한 대로 달빛사원의 약도였다. 아삼관, 도움관, 세움관과 사원 뒤편에 하람언덕이라고 쓴 글자가 보였다.


약도라기보다 네모와 동그라미를 듬성듬성 표시한 메모인데, 미늘 호수와 보예강까지 쓰여 있었다. 시장과 광장은 이름 없이 그냥 시장, 광장이었다.


아래쪽에 바람의 사원도 있지만, 이름은 따로 없고 네모 안에 ‘라이벌 사원’이라고만 써놓았다. 그래도 위치는 정확히 바람의 사원이었다.

나말뫼산을 넘어야 갈 수 있는 곳. 달빛사원과 함께 열린 연합의 두 개의 기둥이라 불리는 곳.


‘작가의 것이 분명해.’

이 정도로 정확하게 달빛사원을 묘사했다면 작가일 수밖에 없었다.


방을 둘러보았다.

어제 고충만이 말한 대로 책상 하나, 침대 하나만 놓인 작은 방이었다. 나주연의 원룸에 비하면 절반 정도나 될까.


옷은 침대 아래나 책상 위쪽 선반에 접어놓았다. 방이 작아서인지 화장실과 부엌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숙소였다.


다른 단서를 찾기 위해 책을 뒤적거렸다.


“주술사라서 다르구나, 물건을 만져도 표시가 안 나네. 내가 건드리면 엉망이 되던데.”

고충만이 침대 아래의 얇은 사진첩을 가리켰다.

“저 사이에서 나오느라 애먹었어. 비닐이 찢어지더라고.”


첫 장을 펼쳐보고 하마터면 사진첩을 떨어뜨릴 뻔했다.

거기에는 짱짱 만화방에 붙박이처럼 앉아있던 남자가 웃고 있었다.


‘뭐야? 이 사람!’

은서는 그가 현재안이라고 했는데! 그럼, 이중인이 아니잖아?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주연의 집에는 스프링 책이 있고, 현재안의 집에는 달빛사원 약도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중인이 아니다.

필명이라고 했지만, 어디에도 그 이름을 쓴 다른 기록이 없었다.


“이 사람, 작가 맞죠?”

금은비가 들떠서 약도를 바라보았다.


“어디 갔대요? 빨리 소설 쓰라고 부탁해야죠!”

“사람이 좀 이상하대. 아침 일찍 나가서는 저녁에나 돌아와. 뭘 하는 걸까?”

고충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험 준비하느라 독서실에 가는 거예요. 대외적으로는.”

나는 책상 위에 꽂힌 문제집을 훑어보았다. 책은 거의 새것이었다. 펼쳐본 흔적이 없었다.


“심지아님, 한 번 보고 그런 걸 알아요? 어쨌든, 작가는 맞죠?”

금은비가 약도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직 몰라요. 이 사람은 현재안이에요. 고충만님, 다른 단서는 없나요?”

“없어.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그림도, 글도 없어. 게다가 이거 봐.”

고충만이 약도를 뒤집었다.


“사실 이게 앞면이야. 무슨 편지 같지? 약도가 뒷면이라 나오다가 죽는 줄 알았어.”

고충만이 사진첩의 찢어진 비닐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앙증맞은 글씨로 정성스럽게 쓴 편지였다. 연애편지 같았는데,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였다.

‘작가는 가까이 있어. 나주연과 현재안은 그를 알고 있다.’


“아직 금은비님이 나온 단서를 못 보았으니, 그것까지 확인해야죠. 다른 단서가 나올지 모르니 잘 지켜봐 주세요.”

고충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난 여기가 마음에 들어. 저기 봐.”

방문에는 바닷가 사진이 걸려있었다.


‘남태평양’이라는 글자 아래 맑은 파란색 바다가 펼쳐졌다.

바닷가에는 풀잎으로 지붕을 엮은 오두막이 줄지어 있었다. 잎이 무성한 야자나무가 그늘을 드리웠다.

내가 집으로 삼은 그림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사진이 또렷해서 바람과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말 좋아. 마음의 고향 같아.”

고충만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바라보았다.


금은비가 샐쭉해져서 투덜거렸다.

“아우, 내가 나온 곳은 저런 사진도 없던데. 책장 위에서 새우잠을 잔단 말이에요.”

“그럼, 너도 여기로 와. 다른 오두막은 비었으니까.”

“허! 내가 왜 아저씨랑 바닷가에 가요? 참 내.”


금은비가 바다 사진을 막아섰다.

“나도 찾아봐야지. 집이 넓으니 멋진 사진이 있을 거예요. 여기보다 훨씬 멋있는 걸로.”


우선 방주인을 만나야겠다.

마법력이 돌아왔으니 그가 이중인을 안다면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현재안을 만나러 가요.”

“어디 있는지 안단 말이야?”


“봐요. 뛰어난 주술사라 그랬잖아요?”

금은비가 으쓱거렸다.

우연히 만난 것이니 주술이라 부를 수도 없지만, 그녀는 고충만을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


역시 붙박이 현재안은 짱짱 만화방에 앉아있었다. 뜯어진 과자 봉지와 열댓 권이 넘는 만화책이 탁자에 쌓여있었다.


고충만이 그를 보자 놀라며 혀를 내둘렀다.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역시 주술사님!’


그들은 곧장 책장 사이를 날아다녔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네. 그 집에 있는 책보다 훨씬 재밌어. 글자를 몰라도 읽혀. 오오.”

금은비가 소리를 높였다.


“어허, 책 읽는 사람 방해하면 안 되지.”

“예, 예. 그러세요? 사람한테는 들리지도 않거든요?”

금은비가 콧소리를 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책 사이를 누비다 어딘가로 들어갔다. 고충만도 반대편 서가의 예쁜 그림으로 들어갔다.


언제 나왔는지 은서가 그들을 보며 웃었다.

‘너와 같은 세계에서 왔구나? 셋이 되었으니 더 빨리 찾겠네?’


‘그렇지 않아도 현재안의 집에서···.’

말하려는데 은서가 스마트폰을 귀에 갖다 대었다.


“응. 알아봤어. 스프링 책 어디서 구했는지.”

그녀는 눈짓으로 계산대 뒤쪽 보조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재빨리 의자에 앉았다.


‘생각으로 말하려면 집중해야 해서 다른 일은 못 하거든.’

은서의 설명을 듣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세계에서는 텔레파시라고 부르는 생각신호는 확실히 기력이 많이 필요했다.


“청소 알바할 때, 전 주인이 놓고 갔대. 쓰레기봉투에 넣으려는데 무슨 쪽지가 떨어졌다지. 뭐일 것 같아?”

은서는 생글생글 웃었다. 설마 나더러 답을 맞히라는 건 아니겠지.


“소설 속 여자 주인공에 대한 메모, 그것이 자신과 너무 닮았대. 십 년 전의 자신과.”

‘십 년 전?’


“그때는 대학 새내기였겠지? 암튼, 주연이도 그때는 꽤 잘 나갔어. 아버지 사업도 잘되었고, 공부도 잘해서 장학금도 타고, 인기도 많았대.”

은서는 나주연의 과거를 생각하는지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어서 가느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들고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를 했는데, 처음 맡은 배역이 구하라였대. 너무 신기하지?”


갑자기 은서의 스마트폰이 부르르 떨렸다. 진짜 전화가 온 것이다.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사이 나는 나주연의 사연을 곰곰이 돌이켜보았다.

‘우리 영역이 살아있으니 여기서도 살아남으려는 거야. 그때가 아니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존재를 이어갔겠지.’


나는 두 손을 맞잡고 엄지 끝을 서로 부딪쳤다. 깊이 생각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아까부터 은서를 흘끗거리던 현재안이 일어나서 계산대로 다가왔다.

“은서님, 나도 신기한 일이 있었다구요.”


그의 몸은 나에 비하면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달빛사원의 도달이 아저씨보다 몸집이 좋았다.

실내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어깨를 굽혔다.

“종이가 혼자 움직였어요. 사진첩에 끼워놓은 종이가 저절로 빠져나오다니, 너무 이상하죠?”


‘허걱!’

숨이 턱 막혔다.

주술사가 아닌 일반인이 만지면 복구가 안 되는구나. 고충만과 금은비가 들키는 건 시간문제겠는데.


“그러네요. 정말 이상하네요.”

은서는 맞장구치며 나를 보았고, 나는 포스터에서 빠끔 얼굴을 내민 고충만을 돌아보았다. 그도 당황하여 낯빛이 붉어졌다.


“친구가 대신 써준 편지인데, 너무 닭살 돋아서 못 보내고 그냥 놔뒀거든요? 근데, 이게 막 빠져나와서 돌아다니더라고요. 봤더니 뒷면에 낙서가 있는 거예요. 난 그런 낙서한 적도 없는데.”

현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그 약도는 현재안이 그린 것이 아니야? 그럼 대체 누가 그렸지?


나는 은서의 팔을 흔들었다.

‘은서님, 청소한 집이요. 전 주인은 누구예요?’

‘모르지. 우리가 아는 건 신청한 사람이니까.’

은서는 고개를 까딱였다.


앞에 현재안이 버티고 있으니 은서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세상에 신기한 일이 참 많네요.”

“그쵸? 정말 이상해요.”

현재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물을 가득 따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왜 이렇게 단서가 뚝뚝 끊어질까요?’

내가 입술을 깨무니 은서가 수첩을 꺼냈다.


‘소설 속에 작가에 대한 힌트가 있을 거야. 아니면 작가를 대신하는 인물이거나.’

은서는 생각으로 말하며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상상계에 태어날 정도면 작가가 간절하게 소망하는 내용일 거야. 애환과 갈망이 녹아들고, 순간적으로 두 세계의 호흡이 맞아야 해. 찰나에 결을 같이 한다고 할까?’

그녀는 알 수 없는 기호를 수첩에 그렸다.


‘유명하다고, 많이 팔렸거나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은서가 수첩에 적은 것을 보여줬다.

‘소설을 꼼꼼히 읽을 것. 작가의 상태를 보여주는 대사나 문장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시계를 보더니 수첩을 덮었다.

‘그믐에 올 거지? 보면 놀랄 거야. 대단한 분들이거든.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녀의 초대라면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은서님보다 대단하다고요?’

‘실증계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존재가 많아. 상상이라고 믿으니까 보이지 않지.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 거야. 후, 모르는 게 나으려나?’

은서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알았어요. 그믐밤.’

달빛사원에서는 중요한 예식을 보름에 치르는데 여기서는 그믐에 행사를 하나.


다음 단서를 찾아갈 시간이었다.

책장 사이를 떠다니는 금은비와 고충만을 불렀다.

“금은비님의 단서를 보러 가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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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1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6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4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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