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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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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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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09.2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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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정류장의 이귀들

DUMMY

아침 햇살에 눈을 뜨니 몸이 가뿐했다.

꿈에서 미늘 호숫가와 하람 언덕을 뛰어다녀서일까.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역시 잠자리를 잘 골랐어. 이 세계에 이런 곳이 있다니, 기적 같아.’

그림 속 나의 오두막을 쓰다듬었다. 나무에 가려져 고즈넉하게 보였다.


집주인은 책상에 엎드려 곤히 잠들었다.

나는 모습이 없는 사념체라서 움직여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창문을 통해 거리로 나왔다.


나주연의 집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다. 버스정류장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차돌재 맛집 식당을 찾아가면 된다.


상쾌한 아침 바람을 따라 둥둥 떠갔다. 가슴까지 들어오는 신선한 기운도 좋았다.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넌 새로운 이귀인가?”


‘설마 날 부르는 거야?’

무심히 정류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크고 작은 이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혼령이나 망령이라고도 하고, 귀신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허공에 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혼령조종술이라면 자신 있었다. 스승님도 칭찬해주었으니까.

달빛사원에서 초급반 애기와 중급반 아리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마법력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지금은 딱히 이귀를 부릴 일도 없고.


정류장의 이귀들은 순둥순둥한 얼굴이어서 귀여웠다. 갑자기 나타난 내가 궁금한지 눈을 빛내며 소곤거렸다.

“이귀는 아니야. 처음 보는데? 전령인가?”

“천옥 전령이 저렇게 예쁠 리 없어. 무시무시하다고.”

“그럼 뭐야?”


나는 그들 앞으로 내려섰다.

“작가를 찾아 이쪽 세계로 넘어왔어. 단서를 찾아가는 길이야.”


“그럼 상상계에서 왔구나?”

처음 나를 불렀던 이귀가 물었다.

다른 이귀보다 오래 머물렀는지 크고 질겨 보였다. 어렴풋이 사람의 모습도 갖추었다.


“상상계? 난 소설에서 나왔어.”

“그래, 그러니까 상상계 맞아.”


“수니홀님, 상상계가 뭐예요?”

가장 작은 이귀가 물었다.


“사람들의 상상이 만들어 낸 세계. 거기에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고,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가 나름대로 영역을 이루고 있지.”

수니홀은 어린 학생을 가르치듯 차분히 설명했다.


“그럼 여기는 뭐예요?”

“여긴 실증계란다.”


“싫증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말로 튀어나왔다.

이귀가 상상계를 아는 것도 신기한데, 이쪽 세계도 이름이 있다니.


수니홀이 손을 들어 허공을 저었다.

“싫증 아니고 실증!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야. 사람들은 감각과 생각이 몸에 갇혀서 딱 정해진 것만 알 수 있어.”


“여기가 현실이 아니었어?”

“그건 못 들었는데.”

“응? 그럼 상상계는 어떻게 알아?”

“은서님이 알려줬어.”


은서라고? 머릿속 어디선가 빛이 반짝거렸다.

상상계와 싫증, 아니 실증계도 알고 이귀와 말한다니. 그런 사람이면 나를 도와줄 것이다.


“사람이야?”

“일단은. 우리와도 얘기하고, 정령도 보는 분이야.”

수니홀이 일어서서 손을 뻗었다.


“저기 골목 보이지? 저기서 두 블록 들어가면 분식집 이 층에 짱짱 만화방이 있어. 거기서 일해. 알바라던가?”


수니홀이 가리키는 골목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부터 만나야 해. 나주연의 집에 가기 전에.’

어제는 놓치고 있던 주술의 힘이 내 안에서 속삭였다.


“그런데 너희는 왜 버스정류장에 살아? 어둡고 축축한 그늘에 살지 않아?”

“무슨 소리야? 우리도 비 맞는 거 싫어.”

중간에 앉은 이귀가 폴짝 뛰어올랐다.


“여긴 햇빛도 가려주고, 아늑하잖아. 나무도 있고, 꽃도 피고. 담장 옆에 그늘도 있고.”

“사람들은 몰라. 우리가 어디 있든.”

이귀들이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렸다.


“아, 미리 말하는데 우리한테는 이름 붙이지 마. 엮이는 거 싫어.”

“우리는 곧 떠날 거니까.”

작은 이귀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쳤다.


그들을 보며 수니홀이 밝게 웃었다.

“난 수니홀이란 이름이 마음에 든다.”

“은서님이 지어준 이름이라서요?”


“여기서 수행하는 것이나 천옥에서 수행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어. 이름을 받으면 다른 기회를 만나는 거니까.”

수니홀은 기분 좋게 웃으며 뿌듯해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작가를 찾으러 왔지 이귀를 부리러 온 것이 아니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버스정류장에 하나둘 사람이 다가와도 그들은 수다를 그치지 않았다.

벤치 위에 이귀와 사람이 겹쳐 앉은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고마워. 궁금한 게 있으면 또 찾아올게.”

“나도 네가 마음에 든다. 머리카락이 초콜릿 같아서 아주 좋구나. 또 놀러 와라.”


수니홀은 정류장 근처 나뭇가지 위로 훌쩍 날아올랐다. 자리를 잡고 앉아 태평하게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


짱짱 만화방은 찾기 쉬웠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쉼터 겸 도서관이었다. 깨끗하고 아늑하고 좋은 향기도 났다. 인공적인 향기지만, 오래 묵은 냄새보다는 훨씬 좋았다.


한쪽에는 아래위층을 나누어 화사한 소파 세트가 놓였고, 한쪽으로 서가가 즐비했다. 만화책이 빼곡히 꽂혀서 그것을 다 읽으려면 평생이 걸릴 것 같았다.


넓고 쾌적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이 아침에 만화방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이 은서인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머리카락을 짧게 민 남자였다. 삐죽삐죽 새로 나온 머리카락 사이로 두피가 드러나 보였다.


아침에 일어나 면도도 안 했는지 듬성듬성 수염이 돋았는데, 몇 가닥 없어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삼십 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데···. 키가 크고 퉁퉁한 몸집이라 소파가 작아 보였다. 탁자에는 빈 컵라면 통이 놓여 있었다.


어제 편의점에서 본 컵라면이었다.

‘이걸 아침이라고 먹은 거야? 설마?’


만화에 빠져 나무 조각처럼 앉아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역시 낯설지 않았다.


동그란 눈에 낮은 코,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에 엄청나게 큰 몸집.

달빛사원 식당에서 일하는 요리사 아저씨와 똑같았다.


도달이 아저씨는 시식하라며 새로운 요리를 많이 만들어주었다. 다들 도망가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맛을 보았다.


대체로 너무나 독특하고 희귀한 맛이라 메뉴로 선택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은 평생 만나지 못할 맛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요리하는 걸 좋아하고, 차오름에게 음식을 챙겨주는 착한 아저씨였다.


차오름이 어머니에게 버려지고, 달빛사원에 맡겨졌다는 사연을 듣고는, 배가 볼록해질 때까지 먹여야 안심하곤 했다.


‘그러니께 혼자 있을 때 더 잘 챙겨야 혀. 그래야 힘이 나지.’

‘심지아, 너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비쩍 말라서 제대로 주술사 하겄나?’

도저히 못 먹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소설에 이름도 나왔고, 차오름을 도와주는 역할이니 용사의 모험이 끝나면 한 장면은 더 나올 것이다.


‘잔치를 벌여주지 않을까? 차오름과 구하라를 위한 파티를 여는 거야.’

아주머니들과 식당에 모여 이런 상상도 했는데···.

작가는 그 이상 이야기를 써주지 않았다.


‘이 사람이 은서인가? 왜 나를 몰라보지?’

맞은편에 앉아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는 꼼짝하지 않고 키득거리며 책장만 넘겼다.


상대의 의식에 맞춰 암시를 걸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주술의 힘이 조금은 느껴졌는데···,


몸은 보름달에 맞춰 나와도, 주술과 마법의 능력은 더디게 회복되나 보다. 사념체가 되었다고 마법력도 흐느적거리려나?


‘이귀를 본다면서 나는 못 보는 걸까.’

어떻게 해야 나를 알아볼까.


그때, 계산대 뒤쪽 커튼이 열리고 한 아가씨가 나왔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볼살이 도톰하고 입술도 도톰해 귀여운 다람쥐 같았다. 아니면 강아지?

새까만 머리카락을 뒤로 묶긴 했는데 짧은 머리를 억지로 묶어 여기저기 삐져나왔다.


여자의 기운은 아주 특이하고, 또 애매했다.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듯한.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내가 여자를 바라보자 그녀도 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눈이 마주쳤다.

‘저 사람이 은서구나!’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게 손짓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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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멸 위기 22.10.21 53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1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4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4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8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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