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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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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43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09.25 15:00
조회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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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이상한 남매

DUMMY

삼인용 병실이지만 환자는 지새늬 뿐이었다.

그녀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숨소리만 새근새근 병실을 울렸다.


구급차에서 내가 알아들은 말은 종합병원에는 입원실이 안 나온다는 것과 가까운 개인병원으로 간다는 말이었다.


나주연은 알았다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에게 지새늬의 상태를 설명하고, 어느 병원으로 가는지도 알렸다.


그 후의 일은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른 영역에서 연수할 때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병실에서 나주연은 팔짱을 끼고 잠든 지새늬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하구나. 정신 좀 차리지.”


그녀의 전화가 누구에게 닿았는지. 육십 대 중반의 여인이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

“나주연씨? 이게 무슨 일이래요?”

“지새늬 어머니세요? 비서실에 전화했더니 어머니한테 알렸군요.”


“당연히 와야죠. 그래도 내가···, 엄마인데.”

여인은 지새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팔뚝에 꽂힌 주사기로, 연결된 수액병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주연이 어떻게 지새늬의 어머니를 불렀는지 신기했다.

‘지새늬의 가족까지 안단 말이야? 아까 놀이터에서는 왜 피했지?’


“무리한 다이어트 때문에 영양실조와 탈진이 왔대요.”

“아휴, 그러게 다이어트 그만 하라니까.”

여인은 의자에 앉아 딸의 손을 잡았다. 손등을 토닥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에는 주름이 많았다. 좋은 옷을 입어 부잣집 마나님처럼 보이지만, 고생을 많이 한 손이었다.


나도 잠든 지새늬를 바라보았다.

이쪽 세계는 우리 세계보다 화려하고 넉넉해 보였는데. 이 병원도 시설이 아주 좋았다. 굶는 사람이 전혀 없을 줄 알았는데, 속사정은 다른 걸까.


“고마워요. 나주연씨 아니면 큰일 날 뻔했어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그럼, 전 약속이 있어서.”

나주연이 인사하고 나가려 하자 여인이 그녀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 들뫼 무역에서 일했죠? 지금도 거기서 일하나요?”

“아니에요. 작년부터 도배사로 일해요.”

“그렇군요. 비서실에서 그러더라고요. 우리 딸 많이 도와준 분이라고.”


“그 정도는 아니에요.”

나주연은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지만, 나는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내 앞에서 쓰러진 지새늬가 깨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쌍하기도 하고, 걱정되어 쉽게 떠날 수 없었다.

‘나주연의 집은 언제든 찾아갈 수 있어. 깨어나는 거 보고 가야지.’


지새늬의 머리맡에 앉아 지켜보니, 그녀의 어머니는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켰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누구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딸이 쓰러졌다니 다른 가족이 줄지어 찾아오겠구나.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번에는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낡은 셔츠에 무릎이 늘어난 바지를 입어서 나이 들어 보이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니 나주연과 비슷한 또래였다.


그는 쭈뼛거리며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밧줄에 끌려 들어왔다.


그를 보자마자 여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너는 오빠가 돼서 어쩜 이럴 수가 있어!”


어머니의 태도를 예상했는지, 아니면 익숙한지 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침대로 다가와 섰다.

“새늬가 쓰러진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또 제 탓이에요?”


“너 만나러 간다고 했어. 오빠라고 찾아다니는데, 좀 살갑게 대해줘. 이젠 동생이잖아?”

“아휴, 알았어요, 알았어. 어떻대요?”


“이틀 정도 지켜보고 퇴원하라는구나. 이번에는 아는 사람이 도와줬어.”

“그래요? 다행이네요.”


“새늬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내가 무슨 낯으로 그 집에 들어가니?”

“이제는 어머니 집이잖아요.”

남자의 목소리에 탄식이 섞여 나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지새늬와 조금도 닮지 않은 남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 얼굴이 낯설지 않아 더 눈길이 갔다.


그의 왼쪽 귀를 보는 순간 몸이 굳었다.

‘저 점, 저거 오빠와 똑같잖아?’


오빠는 하나뿐인 내 가족이었다.

내가 열한 살 때, 더 넓은 세상을 보겠다며 보예강을 따라 먼 바다로 떠났다. 그리고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지금도 어딘가를 항해할 거라고, 바다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동생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거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우리만의 세계, 나만의 사연이지만, 소중한 추억이었다.


오빠의 왼쪽 귓불에도 멍든 것처럼 푸른 점이 있었다. 귓불 위쪽이라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다.


차오름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귓불의 점 때문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는 오른쪽 귓불에 점이 있었고, 푸른빛이 더 짙었다.


어릴 때는 귀걸이 같다고 놀림 받았다지만, 달빛사원에서는 그것이 용사를 고르는 신탁의 증거가 되었다.

왼쪽 어깨에 수호의 별자리 모양으로 반점이 찍혀있는데, 그것도 신탁의 증거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오빠와 차오름이 많이 비슷했구나.

오빠가 떠났던 딱 그 나이, 열네 살에 달빛사원에 맡겨진 것도 인연일까.


오빠를 생각하며 남자를 바라보니 점점 더 오빠와 비슷하게 보였다.

이마와 눈썹 모양도 똑같았다. 날개 모양으로 치켜 올라간 눈썹과 길고 풍성한 속눈썹.


상념에 빠져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


여자는 처음과는 달리 느긋한 자세로 벽에 기대앉았다. 아들을 대하는 말투도 부드러워졌다.

“대함아, 그만 가봐라. 바쁘다면서?”

“아효, 최소희 여사님, 이제야 아들이 보이시나요?”

대함이라는 젊은 남자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얘는, 새늬가 저렇게 되었는데 너까지 챙길 정신이 어디 있어?”

“사장님 오신대요?”

“오시겠지. 그래도 막내딸인데.”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대함이 일어나 문을 열었다.


“대함아.”

여인이 부르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누가 뭐래도 넌 내 아들이야. 원대한 원대함. 알지?”

“그럼요. 걱정 마세요.”

대답과는 다르게 원대함은 힘없이 돌아섰다.


나는 어느새 그를 따라 거리를 떠가고 있었다. 오빠와 너무나 닮아서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오빠가 보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오빠를 닮은 차오름이 그리워서일까.


*


원대함을 따라 걷다 보니 골목이 낯설지 않았다. 분명 낮에 지나간 길이었다. 사방이 어두워졌어도 알 수 있었다.


멀리 지새늬가 쓰러졌던 놀이터가 보였다.

‘뭐야? 아까 왔던 길이잖아? 놀이터도 그대로 있고.’


하지만 그는 버스정류장에서 왼쪽으로 돌아섰다. 나주연의 집은 오른쪽으로 돌아서는데.

‘여기서 걸어갈 정도면 나주연의 집과도 멀지 않아. 금방 갈 수 있겠어.’


네 블록 정도 걸어가니 편의점이 보였다.

그는 불을 환하게 밝힌 초고리 편의점 문을 열었다. 손님은 없고 이십 대 후반의 여자가 혼자 계산대를 지켰다.


“여어, 여남은, 잘 지키고 있어?”

“원형! 오늘은 일찍 들어가네요? 극단 일 벌써 끝났어요?”

“다른 일이 생겨서. 그럼 난 올라갈게.”

원대함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유리문을 닫았다.


그는 편의점이 있는 빌라 건물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계단으로 사라졌지만, 나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나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간 뒤였다.


바로 편의점 내부.

눈부신 조명과 휘황찬란한 물건들, 알록달록 각양각색의 물건이 즐비하니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몰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편의점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이쪽 세계에서는 사념체로 떠다니니 무엇을 하든 내게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밤에도 문을 연다니. 밤새워 구경할 수 있잖아?’


그러나 흥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밤을 새우겠다는 포부도 꺾였다.

‘빨리 쉬어야 해. 이러다 의식마저 잃겠어.’


아무리 사념체라도 이쪽 세계의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속도의 한계처럼 하루 동안 쓸 수 있는 기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러다 주술과 마법에도 한계가 있는 거 아냐?’


주술과 마법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사념체라서 그런지, 세계가 달라져서인지, 아니면 파견의 주술을 거치며 잃어버렸는지.

주술과 마법이 없으면 나는 허접스러운 껍데기인데.


그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지만, 기력이 바닥나니 다 귀찮았다. 생각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힘을 보충하려면 편안한 잠자리가 필요했다.

나주연의 침대 밑으로 돌아가야 하나.


간신히 문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맑은 기운이 올라왔다. 상쾌하고 온화한 기운이었다.

그 기운을 따라 편의점 옆으로 돌아갔다. 원대함이 올라갔던 그 계단이었다.


계단을 마주 보니 맑은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그 힘의 원천은 반지하였다.


문을 뚫고 들어가니 어수선한 방이 나왔다.

한 번도 정리한 적 없는 듯 책이며 옷이 흩어져 있고, 책상에는 그림이 잔뜩 쌓여있었다. 컴퓨터와 모니터 주변만 깨끗했다.


더벅머리의 젊은 남자가 모니터를 노려보며 쉼 없이 손을 움직였다. 모니터의 그림을 완성하느라 고개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이끄는 기운은 벽에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여러 장의 그림에서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을 찾아냈다.


‘미늘 호수?’

사파이어 빛으로 반짝이는 미늘 호수와 너무나 비슷했다. 빛깔도 언덕의 모양도 비슷했다.


호수 근처 숲과 아름드리나무에 가려진 오두막은 달랐지만, 편안하고 아늑한 기운이 나를 끌어당겼다.

이걸 그린 사람은 영혼도 맑고 순수할 거야. 이런 그림이 그냥 나올 리 없어.


방주인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며 그림에 색을 입히고 있었다.


퀭한 얼굴에 후줄근한 티셔츠를 걸치고, 머리카락으로 새집을 지었지만, 눈빛이 맑았다. 아주 선량한 얼굴이니 집 없는 나그네를 내쫓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나 피곤했다. 이쪽 세계로 나온 첫 날이라 몹시 긴장한 탓인지 정신이 몽롱했다.

‘나주연의 집은 내일 아침에 가자. 가서 진짜 이중인을 찾아야지.’


스르르 그림으로 들어갔다.

‘이 오두막을 집으로 삼아야겠다. 앞으로 잠은 여기서 자는 걸로.’


그림 속 오두막에 들어서니 눈앞에 호수가 푸르게 반짝였다.

찰랑이는 물소리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달빛사원에서 바라보는 미늘 호수만큼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물결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잘 될 거야.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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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멸 위기 22.10.21 53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1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6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4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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