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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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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30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09.24 15:00
조회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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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스프링 책의 주인

DUMMY

한 여인이 들어왔다.

사진에서 본 그 얼굴이지만, 사진보다 눈이 크고 깊었다.


양손에는 묵직한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여는 곳이면···, 새벽시장에 다녀왔구나.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나는 정중히 그녀를 맞았다.

어떻게 여기 들왔으며, 무슨 사연인지 말해야 하니까. 벽으로 비켜서서 예의 바르게 주인을 기다렸다.


나를 보고 놀랄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내 앞을 지나쳐갔다.

이렇게 작은 원룸에서,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 안 보이나?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내 눈에는 보이는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혼자 있을 때는 보이던 몸이 비치지 않았다.


‘이쪽 세계에서는 사념체인 거야?’

이런 낭패가 있나. 파견의 주술이 실패하는 원인이 이거였구나.


사념체로는 사람과 말할 수도 없고, 건드릴 수도 없다. 내 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하지?’


그녀는 장바구니를 탁자에 올리고 물건을 꺼냈다. 다진 고기와 해물, 여러 가지 야채였다.


‘요리하려고?’

그런 일이라면 나도 도울 수 있다. 달빛사원 식당에서 일한 경력이 몇 년인데.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요리를 도우면서 소설에 관해 얘기하면 환상적일 텐데. 몸이 보이지 않으니···.


‘이 사람이 이중인 맞아?’

작가를 어떻게 확인할지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메모를 보며 필요한 재료를 점검했다.

메모대로 되었는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료를 개수대로 옮기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화면에 뜬 번호를 바라보더니 헛기침하며 목을 다듬었다.

“예, 나주연입니다.”


‘뭐? 나주연? 이중인이 아니고?’

나의 놀라움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차분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일 오전과 오후요? 예, 가능해요. 오후에는 일찍 시작해도 되겠죠? 내일 저녁이 아버지 제사라서요.”

상대의 말을 듣느라 잠시 말을 멈추었다. 흔쾌한 답변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달력에 내용을 쓰고는 조리대 앞으로 다가갔다.

재료를 냉장고에 넣고 조리도구를 꺼내고, 야채를 손질하며 그녀는 빈틈없이 움직였지만, 나는 생각이 멈추었다.


‘그럼 이중인은 누구지? 그 책이 왜 여기 있어?’

스프링 책이 놓인 침대 밑을 돌아보았다.


단서를 찾느라 분명 뒤적였는데, 상자는 내가 열기 전 그대로였다. 여전히 침대 밑 제일 구석 자리였다. 뽀얗게 쌓인 먼지도 그대로였다.


‘그래도 여기 단서가 있다는 건, 끈이 이어진 거야. 그것을 찾으면 돼.’

그녀를 따라다니면 다른 단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나른하게 앉아 나주연을 바라보니 어딘지 낯익었다.

우리 세계에서 그녀와 비슷한 사람이 여럿 생각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구하라였다.


구하라는 봉황족답게 큰 키와 날렵한 몸매를 가졌다. 계란형의 뽀얀 얼굴에 이목구비도 또렷해서 눈에 확 띄었다.

밝은 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주술을 부리면 누구나 감탄과 찬사를 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미재 시장의 단주였다.

‘전설의 근원’ 영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고, 가장 많은 상인이 소속된 단체이니 힘이 막강했다. 그에게 이름이 있었다면, 기루다 대표와 비슷한 권력자일 것이다.


어쩐 일인지 작가는 구하라의 아버지라든가, 오미재 단주라고만 썼기에 우리는 그를 단주님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단주는 늘 즐거워 보였다. 딸을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구하라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징조를 갖고 태어난 데다, 수련원에서 가장 뛰어난 주술사니까.

‘전설의 근원’에서 차오름과 함께 남녀 주인공이었다.

소설은 두 사람이 여러 고난을 함께 겪으며 마침내 이어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주연을 보고 있으니 점점 더 구하라와 비슷하게 보였다. 자꾸 생각해서 그런가.

나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떨쳐버리고 어떻게 이중인을 찾을지 고민해야지.


나주연은 벽에 기대앉아 태블릿을 들여다보았다. 옆으로 다가가 보니 영화의 전투 장면이 펼쳐졌다.


스마트폰에서 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이름을 대지 않았다.


“어, 왜?”

그녀가 묻자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어쩌다 휴일. 예약이 있었는데 인테리어가 마무리 안 되었대. 와, 진짜?”

그녀는 허리를 세우고 똑바로 앉았다.


나는 전화기 건너편의 이야기가 궁금해 가까이 다가갔다.

어차피 사념체이니 방해되지 않을 것이다. 의식을 집중하니 건너편 여자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부산에서 올라왔다니까! 오늘 점심 같이 먹기로 했어. 너 보고 싶어 하니까 꼭 나와.”

“그럼, 당연히 가야지. 으흠, 그러면···.”


나주연은 벽에 걸린 동그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알았어. 구두 수선 맡기고 가면 되겠다. 응, 이따 봐.”


*


그녀를 따라 부리나케 바깥으로 나왔다.


사념체여서 사람보다 훨씬 빨리 움직이고, 순간이동도 될 줄 알았는데 그것도 불가능했다. 공중에 떠다니기는 하지만, 속도는 이쪽 세계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다.


‘바람처럼 나는 것도 안 되고, 공간이동도 안 돼? 사람과 똑같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사념체라니, 말이 돼?’

혼자 씩씩거렸지만, 푸념을 들어줄 상대도 없었다.

그래도 사람의 걸음보다는 두세 배 빨리 움직여졌다.


내가 나온 방을 돌아보았다.

맛집 식당 이 층 201호. 삼 층짜리 빌라의 이름은 차돌재였다.


파견의 주술로 처음 나온 곳이니 각인처럼 머리에 찍혔다. 어디에 있어도 다시 찾아갈 수 있었다.


그녀와 나란히 떠가면서 동네를 살펴보았다. 우리의 세계와는 전혀 달라서 신기했다.

다른 영역 여러 군데에서 실습했지만, 그곳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이중인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골목을 기웃거렸다. 변두리 조용한 골목이라도, 간판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수정 미용실, 한가위 떡집, 대왕 삼겹살, 엄마손 반찬, 맛나 떡볶이···. 간판을 읽다가 카페 미루안이 눈에 들어왔다.

‘미루안?’


카페 미루안은 어딘지 독특했다. 싱그러운 숲의 기운이 새어 나왔다.

이쪽 세계는 의식이 딱딱하고 사고가 굳었다고 배웠는데,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그 옆의 소품샵도 기운이 독특했다. 가게 이름은 ‘달숲의 작은 천사’인데, 빌라 이름과 이어진 것 같았다.


‘파라다이스 빌라?’

이쪽 세계에도 신기한 기운이 있구나.


나주연을 따라 놀이터를 막 지날 때였다.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거리를 둘러보던 나는 하마터면 그녀를 통과해 나갈 뻔했다. 물론, 그녀는 전혀 모르겠지만.


나주연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지새늬잖아? 여기 왜 왔지?”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놀이터로 돌아섰다. 아름드리나무를 돌아 놀이터 담장 뒤로 돌아갔다.


나는 그녀가 피하는 지새늬가 누구인지 살펴보았다.


작고 말라서 언뜻 보면 열여덟 정도로 보였다.

머리카락 색이 눈에 확 들어왔는데, 윗부분은 녹청색으로 염색한 데다 아래쪽은 은빛이어서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어깨 근처까지 기른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출렁거렸다.


전체적으로 앙증맞고 예쁜 얼굴이었다. 입이 작아서 더 어려 보이나?

옷은 깔끔한 투피스인데, 구두와 핸드백, 목걸이와 귀걸이도 분위기를 잘 맞추었다.


딱히 나주연이 피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사람은 아니었다.

‘무슨 악연이 있나? 사람을 피하다니?’


지새늬라는 사람이 궁금해서 계속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즐거운 생각을 하는지 발걸음도 가볍게 다가왔다.


갑자기 그녀의 걸음이 느려졌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무언가를 잡으려고 허공을 휘저었지만, 그 손은 맥없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저, 저! 쓰러진다!’

내가 소리쳤지만, 듣는 이가 없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다행히 놀이터 담 쪽으로 쓰러지며 스르르 몸이 내려앉았다.


몸이 있으면 그녀를 잡아줄 텐데. 아픈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니.

나는 발을 구르며 바닥에 쓰러진 지새늬를 지켜보았다.


지나가던 중년 여인이 빽빽 소리를 질렀다.

“아악! 여기 누가 쓰러졌어요!”


날카로운 비명을 듣고 나무 뒤에 서 있던 나주연이 뛰어나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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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멸 위기 22.10.21 53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1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4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4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8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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