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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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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1,647
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09.23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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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작가를 찾아서

DUMMY

눈을 떴지만, 감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주위는 어둡고 탁한 기운이 가득했다.

내가 기어 나온 곳을 돌아보았다.


모서리가 찌그러진 상자였다. 침대 밑 가장 안쪽에 놓인 낡은 상자.

작가에 대한 단서가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우선 허리부터 펴고.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보름달의 기운을 받아 이 세계로 넘어왔어도 여기는 벌써 아침이었다.

작고 아담한 방에는 빛이 잘 들어왔다. 창문의 커튼은 얇고 하늘거려 거리가 잘 내려다보였다. 조용한 동네의 이 층 방이라.


지금이 어느 시대, 어느 영역인지 살펴봐야지.

나는 창가에 서서 사람들의 옷부터 살폈다. 그들이 내뿜는 기운과 공기를 읽었다.


어렴풋한 흐름을 익히고,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고, 맞은편이 화장실이었다. 레이스가 달린 칸막이로 침대를 가려놓았다. 이런 걸 원룸이라 부르던가.


상아색 작은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식탁 겸 책상이었다. 침대 옆의 작은 옷장도 상아색이었다. 장식 없는 단순한 가구라···.


탁자 위에 태블릿이 보였다. 민트색 케이스로 싸인 태블릿을 열었다. 화면이 켜지고 여러 아이콘이 나타났다.


‘아,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그 시대!’

미소가 지어졌다.


얼마 전 연수했던 영역과 비슷했다.

그곳에서는 자신들의 세계를 현대라고 불렀는데, 어느 영역이나 그렇게 말하니 그 단어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내가 나온 세계도 지금이 현대니까.


이곳에 맞는 지식을 끌어오려고 주술을 불렀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이런. 주술과 마법력이 안 따라왔어? 설마···.’

우리 세계에서는 어느 영역으로 가든 문제없었는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마법력이 회복되는데 시간이 걸리는 걸 거야. 아무렴, 적응 기간이 필요하겠지.’

암, 그래야지. 느긋하게 기다려보자. 작가에 대해 더 알아보면서.


화장대 위에 아기자기한 인형이 보였다. 향초와 방향제도 있고, 사진도 여러 장 있었다.

사진 속 여인은 짧은 커트 머리에 계란형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키가 큰 편이었다.

‘이 사람이 작가인가?’


침대 옆에는 전신거울이 방안을 비춰주었다.

비스듬하게 서 있어 내 모습도 실제보다 키가 커 보였다.


탁한 갈색의 머리카락이 여기서는 밝게 보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그림자를 만들어 둥근 얼굴이 조금 갸름해 보였다.


‘여기가 작가의 방이겠지? 예상보다 빨리 끝나겠는걸?’

침대 아래 상자 속으로 돌아갔다. 작가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상자를 뒤적이면서 달빛사원 이단주 원장의 충고를 되새겼다.

‘파견의 주술을 통해 작가와 이어진 곳으로 갈 거다. 작가는 쉽게 찾을지 몰라도, 이야기를 이어 쓰게 하는 것은 어려울 거다.’


‘자신의 이야기이니 끝내고 싶지 않을까요?’

‘정말 끝을 내고 싶었다면 우리를 버려두지 않았겠지. 살랑의 말로는 꽤 오래되어 작가도 잊었을 거라더구나.’


먼지 쌓인 상자가 원장의 말을 증명해주었다. 얼마나 오래 여기 묻혀 있었을까.


손이 종이 뭉치에 가닿았다. 정확히 내가 나온 곳이다.

나는 그것이 모양이 번듯한 책일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손에 잡힌 것은 스프링으로 묶인 출력물이었다. 다른 영역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그것이 출력물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스프링에 달린 종이 뭉치를 들자 서운함에 손이 떨렸다.

‘작가도 우리 세계를 아껴줄 거라 여겼는데···.’


우리가 사는 ‘전설의 근원’ 영역은 아름답고 멋진 곳이다. 모두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고 있다.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서.


아무리 쓰다 만 이야기라도 침대 밑에 처박혀 있다니. 우리에게는 전부인 세상인데. 너무나 아쉬웠다.


표지에는 ‘전설의 근원’이라고 찍혀있었다. 부제로 ‘내가 거기 있다’라는 글자가 제목보다 조그맣게 보였다.


중간쯤에 적힌 이름은 ‘이중인(二重人)’이었다.

‘작가 이름이 이중인?’

왠지 낯설었다. 어쩐지 우리 세계와는 인연이 없어 보였다.


어쨌든, 작가를 찾아왔다. 이제 방주인을 만나 확인하면 된다.

‘이렇게 쉽게 찾다니. 다른 사람은 안 와도 될 뻔했어.’


그러고 보니 도와줄 사람을 두 명 더 보낸다고 했는데?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술을 모르는 일반인이라고 했는데, 제대로 넘어왔을까?


그들은 어디로 나왔을까. 다른 곳에도 단서가 있다는 뜻인가.


*


아삼관 원장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찾아갔을 때 그곳에는 다섯 명의 원로가 모여 있었다. 심각한 얼굴이어서 일이 생겼다는 것을 금방 알았다.


모여서 카드 게임이나 글자 맞추기를 하던 원로들이 진지하게 앉아있으니 더 긴장되었다.


소설에서는 악역이어도 우리 세계에서의 모습은 달랐다. 차원침입군 대장으로 잔인하게 나오는 살랑도 생김새와는 달리 자상했다.


“어머, 넌 사원 식당에서 일하는 그 아이 아니니?”

육미호 원장이 나를 알아보고 놀라 소리쳤다. 그녀의 푸르스름한 피부에 흰빛이 더해졌다.


“그래. 나도 알겠다. 그 식당. 차오름이 일하는 기념품 가게 옆이지? 이름이 있었구나!”

열린 연합의 기루다 대표가 손뼉을 치며 나를 반겼다.


나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대표에게 붙들리면 반나절 이상 아무것도 못 한다. 연합의 사정부터, 자기 일이 얼마나 힘든지 하소연을 거쳐 다른 이들의 대소사에 대해 캐물으니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했다.


“어쨌든, 네가 그렇게 주술과 마법을 잘한다며? 구하라만큼?”

기루다는 기분이 좋은지 발그레한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붉은 머리카락이 춤을 추었다.


내가 어리둥절해서 서 있자 이단주 원장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우리 세계가 무너지기 전에 손을 쓰기로 했다. 파견의 주술로 너를 보내려고.”


원장은 파견의 주술과 내가 할 일에 대해 설명했다.

작가를 찾아 이야기를 쓰게 하는 것,

“지금 당장 끝내지 않아도 된다. 다음으로 이어지면 돼.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어머, 진짜. 그냥 식당 일꾼이 아니었군요?”

육미호 원장은 귀밑머리를 쓸어 올렸다. 바람의 사원 원장이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 자리에서 내 사연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부모의 얼굴은 기억도 없고 하나뿐인 오빠마저 보예강을 따라 떠난 것이나, 수업료를 대신해 식당에서 일한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는 식당의 일꾼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얘기했다. 작가의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우리만의 사연이었다.


이단주 원장은 그런 사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심지아의 능력은 믿을 수 있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스승도 인정하는 실력이니.”


갑작스러운 명령에 가슴이 떨리고 두려웠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여기를 떠나야 한다니. 설마··· 쫓겨나는 걸까.


“원장님, 왜 저를 고르셨나요?”

“아, 그거···. 그건 말이다.”

이단주 원장이 말을 더듬자 해무근 예언자가 싱글거렸다.


“주술사니까 다른 영역으로 연수도 갔다 왔겠지? 실습도 했을 거고. 작가가 어느 세계에 사는지 몰라도 가장 많은 영역을 아는 주술사라서 그렇지.”

해무근 예언자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억지로 웃는지 눈가의 주름이 비틀어졌다.


“주술과 마법이 뛰어나니 어디서나 금방 배우고, 곤란한 상황에도 잘 대처할 거다.”

살랑 대장도 다른 원로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도와줄 사람도 찾았다. 일반인이라 주술은 모르지만, 혼자보다는 도움이 될 거다.”

이단주 원장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 창밖의 미늘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는 사파이어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내 마음의 폭풍과는 달리 고요하게 머물렀다.


나도 알고 있었다.

작가가 글을 중단하면서 우리 세계에 위기가 찾아왔다. 스멀스멀 경계부터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을 갉아먹듯 천천히.


파견의 주술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성공하면 그 세계는 영원히 살아남지만, 실패하면 전부 사라진다.


주술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느 쪽이나 파견된 사람이 돌아왔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다시는 차오름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내키지 않는가 보다?”

육미호 원장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다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그래도 보낼 사람이 너뿐이야. 이름도 한 번밖에 안 나왔고, 주술사라지만, 딱히 맡은 역할이 없잖니?”


“육원장!”

이단주 원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육미호 원장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기루다 대표는 두 사람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우리 세계의 운명이 너에게 달렸어. 부탁한다.”

살랑 대장이 어렵게 말을 건넸다.


원로들이 결정한 일이니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내가 결심한 이유는 하나였다.

‘차오름이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희극이든 비극이든 소설이 끝나야 차오름이 자유로워진다. 그때야 비로소 그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나에 대해 말한다면···, 여기서는 있으나 없으나 보이지 않는 존재니까.


“예. 하겠습니다.”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원로들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보름달이 뜨는 오늘부터 다음 보름이 되기 전까지 끝내야 한다. 구름이 없는 달밤에는 우리와 연락할 수 있고. 알겠니?”

이단주 원장이 밝은 목소리로 다짐을 받았다.


*


그런데, 작가는 어디 갔지? 혹시 저녁이 되어야 돌아오나?

‘안 돼! 그러면 하루가 그냥 지나가잖아?’


우리 세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모든 것이 느긋하지만, 여기서 그랬다가는 눈 깜짝할 사이 세계가 무너질 것이다.


기다려도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방안을 몇 바퀴나 휘휘 돌았다.


간절한 마음이 통한 걸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띠딕 띠디딕.

자물쇠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덜컥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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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1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6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4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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