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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그래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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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8.05 09:03
최근연재일 :
2022.10.22 09:02
연재수 :
4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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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47
글자수 :
216,165

작성
22.09.2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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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프롤로그 – 파견의 주술

DUMMY

상아색 벽에 햇살이 비치자 주변의 대기까지 눈부시게 빛났다. 달빛사원을 두르고 부챗살처럼 퍼져나간 빛과 그림자가 미늘 호수에 비쳐 아름답게 물결쳤다.


‘전설의 근원’ 영역에서 달빛사원은 바람의 사원과 함께 열린 연합의 양대 기둥이었다. 주술사를 키우는 수련원도 그곳에 있었다.


사원의 본관인 아삼관 이 층에 다섯 명의 원로가 모여 앉았다.


원장 이단주는 창문 옆에 서서 미늘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사원 뒤편 하람 언덕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사원을 돌아 호수까지 이르렀다.


바람에 따라 춤추는 물결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파이어 빛 물결은 호수에 머물다 서쪽 보예강으로 흘러갔다.


이단주의 거대한 몸집이 창문을 막자 한 여인이 헛기침하며 그를 불렀다.

“원장님, 제게 오는 햇빛을 언제까지 가리실 건가요? 저희가 모인 목적이나 얘기하시죠.”


콧소리를 내며 비스듬히 기대앉은 여인은 바람의 사원 원장 육미호였다.

호리호리한 몸에 하얗고 풍성한 꼬리가 세 개 달렸지만, 이름은 육미호였다.


푸르스름한 피부에 노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렸는데, 붉은 눈동자와 검은 눈썹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그러시죠. 시간이 별로 없으니.”

이단주가 원탁 옆 빈 의자에 앉았다.


그는 크고 우람한 체격에 풍성한 수염을 깨끗이 다듬어 푸근한 인상을 주었다.

진한 갈색 머리카락과 수염이 까무잡잡한 피부와 잘 맞았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겨 하나로 묶었다.


“살랑, 우리 이야기가 중단된 지 얼마나 지났죠?”

이단주가 옆에 앉은 남자에게 물었다.


하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살랑은 비쩍 마른 얼굴에 눈꼬리가 올라가 화난 것 같기도 하고,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에메랄드빛 피부 때문에 앓는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야 시간을 알 수 없지요. 오래전이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경계가 무너지는 정도로 봐서는 십 년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요?”

표정과는 달리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결이 가늘고 고운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도 한 가닥씩 휘날렸다.


“시간이 무슨 상관이에요? 빨리 이야기를 끝내야 해요. 작가는 대체 뭘 하느라 우리를 방치한답니까?”

가운데 앉은 뚱뚱한 여인이 어깨를 흔들었다.

곱슬머리가 타는 듯 붉게 빛났다. 작은 입술 때문에 검은 눈이 더욱 커 보였다.


열린 연합의 대표이면서 부족장인 기루다였다. 오늘 회의를 소집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기다려야 하나요? 이야기가 끝나야 제대로 살 것 아닙니까? 불쌍한 차오름과 구하라 좀 보세요. 주인공이라 꼼짝 못 하잖아요?”


기루다의 말에 육미호가 동그랗게 입술을 내밀었다.

“조연이랑 단역도 마찬가지예요. 언제 다시 이어질지 모르니까요. 이름 없는 등장인물만 여느 때와 다름없죠.”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단주가 둘러앉은 네 명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경계가 무너지면 우리 영역 전체가 사라질 거예요. 어느 영역은 지금 대혼란 상태랍니다. 이야기가 중단되자 폭동이 일어났죠. 사람들이 자멸하거나 실종되었고, 완전히 암흑에 갇혔습니다.”

이단주의 말에 살랑도 얼마 전 들은 소문을 생각해냈다.


“파이널 뭔가 하는 이야기 말입니까? 정말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이 세계 밖으로 쫓겨난 사람도 있다던데.”

“슬픈 일이죠. 우리도 위험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요.”

이단주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대책이 뭐냐고요!”

육미호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손의 움직임을 따라 꼬리 세 개가 나란히 솟아올랐다.


“그걸 찾고자 모인 겁니다. 이대로 소멸을 기다릴 수 없으니까요.”

이단주의 눈길이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남자에게 머물렀다.


해무근은 탁자에 바짝 붙어 앉아 그림 카드를 맞추며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만 끄덕였다.

작가의 소설에서는 과묵하고 사려 깊은 예언자로, 여자 주인공 구하라의 멘토로 나오지만, 실제 모습은 멘토와는 거리가 멀었다.


코밑과 턱밑으로 얍삽하게 자란 짧은 수염과 동그스름한 얼굴 때문에 장난꾸러기처럼 보였다. 대신 눈가의 자잘한 주름과 새치가 그의 나이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해무근은 이단주의 눈길을 피하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야죠. 암요, 하하. 이야기가 겨우 재미있어지려는데 뚝 끊다니. 이런 모진 고문이 어디 있나요?”

그는 카드를 뒤집어놓고 원탁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우리 이야기가 어디까지 갔었죠?”

“차오름이 구하라와 함께 새로운 동료를 찾아가던 길이었어요. 가면서 전설의 무기를 두 개 찾았고요. 동료가 누구인지는 아직 안 나왔죠. 멀리 오두막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이 마지막이에요.”

기루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 장면에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이단주는 보다 자세한 상황을 기억했다.

작가가 제시한 신탁을 받았지만. 다른 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소설의 대략적인 흐름일 것이다.


---


그날 밤 이단주의 눈앞에 신탁이 내렸다.


‘용사 차오름은 다섯 가지 전설의 무기를 찾아야 한다. 주술사 구하라와 다른 동료와 함께 차원침입군과 맞서 싸울 것이다.’


원장 이단주는 깊이 절하고 허리를 일으켰다. 제단에는 달빛이 교교히 내리비쳤다.


---


그렇게 제시해놓고 작가는 왜 소설을 중단했을까.


그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이 없자, 살랑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돌렸다.

“원장님, 혹시 파견의 주술을 말하고 싶은 건가요?”

이단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오래 침묵한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뿐입니다.”


“저런!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아시잖아요?”

육미호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손바닥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며 재빨리 손을 털었다.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에? 그거 보름에서 보름 사이에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가 다 같이 끝나는 거 아닙니까?”

해무근이 의자를 똑바로 돌려 탁자에 바짝 붙어 앉았다.


육미호가 새끼손가락으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작가를 찾아서 이야기를 잇는다고 해도 파견된 사람은 못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까요. 시간도 너무 촉박하고요.”

해무근이 주먹을 꼭 쥐고 눈을 깜빡였다.


기루다가 숨을 몰아쉬었다.

”뭘 어쩌자는 겁니까? 방법을 찾아야지, 안 되는 이유만 나열하면 무슨 일을 하겠어요?“


부글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니 숨이 거칠어졌다.

”이대로 있어도 우리 세계는 조만간 사라집니다. 위험부담이 크지만, 성공할 수도 있잖아요? 실패한다 해도 끝이 앞당겨질 뿐이죠.“


”마침 우리가 다섯 명이군요.“

살랑이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파견의 주술을 실행하려면 다섯 명의 원로가 필요했다.

이야기 속 주조연을 통틀어 나이가 오십 이상이면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이어야 했다.


”연합 대표 기루다, 차원침입군 대장 살랑, 달빛사원장 이단주, 바람의 사원장 육미호, 신비의 예언자 해무근.“

기루다는 깨끗한 종이에 다섯 명의 이름을 썼다.


”잠깐만요! 누구를 파견하려고요?“

해무근이 입술에 침을 바르며 종이를 흘끗거렸다.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누가 좋을까요?“

살랑이 이단주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 바깥으로 나가 작가를 찾는 일이다. 해낼 만한 사람이 있을까.


”제가 조건을 알려드리죠.”

육미호가 콧등을 긁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첫째는 이름이 있어야 해요. 이야기에 한 번이라도 이름이 나왔어야죠.”

”이름을 가진 사람이야 많죠.“

기루다가 턱을 치켜들고 미소 지었다.


”그중에서 존재감이 없어야 해요. 사라져도 모를 사람,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 작가조차 기억 못 하는 사람 말이죠.“

육미호의 말에 해무근이 실실 웃음 지었다.


”그런 사람이 몇 명 있네요. 기루다님이 해고한 비서도 있고, 살랑님이 죽인 차원관리자는···, 아, 거기에는 이름이 안 나왔군요.“

해무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다른 사람을 생각해냈다.


”아! 차원과의 충돌로 무슨 사고가 있었죠? 그때 죽은 관리가 있잖아요?“

해무근은 사소한 일까지 기억해낸 자신이 뿌듯하여 어깨를 으쓱거렸다.


육미호가 코웃음을 지었다.

”이보세요. 신비의 예언자님. 작가를 찾아서 우리 세계를 살리는 일이에요. 그 사람들이 뭘 하겠어요? 당연히 상당한 능력자여야죠. 적어도 주술사, 그중에서도 나래 등급 정도는 되어야···.“

말하다 말고 그녀는 이단주를 바라보았다.


‘전설의 근원’ 영역에서 주술사를 키우는 수련원은 달빛사원뿐이었다. 주인공 구하라도 그 수련원 소속이었다.


그녀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이단주는 생각에 잠겨 탁자만 바라보았다.


”구하라가 제일 낫지 않나요? 이야기 속 제 멘티라서가 아니고, 설정 자체가 그렇잖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선택받았고, 모든 주술과 마법에 능통하며, 강단 있는 성격까지.”

해무근이 턱수염을 쓰다듬자 육미호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를 보았다.


“그거야 어디까지나 설정이지요. 해무근님처럼요. 이야기에서야 엄청 진지하고 통찰력 있는 예언자로 나오지만, 전혀 아니잖아요? 구하라가 최고 능력자라는 설정이지만, 실제로도 그런가요?”

육미호가 이단주의 동의를 구하려 했으나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살랑이 대신 답했다.

“주인공이 나가면 안 됩니다. 이 세계는 그야말로 가루가 될 테니까요.”


“아니, 그럼 대체 누구를 보냅니까?”

기루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씩씩 숨을 내쉬었다.


“나래 등급의 주술사로 능력이 있으면서 성실하고, 우리 세계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겠지요. 이름은 있어도 존재감이 없는.”


살랑이 설명하자 기루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에? 그런 아이가 있어요?“


긴 침묵 끝에 이단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밖에 없군요. 초반에 주술 수업 장면에서 한 번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 후로는 수련자들이라고만 나왔죠.“


”누굽니까?“

살랑이 그를 향해 돌아앉았다.


”심지아. 달빛사원의 주술사지요. 하지만, 그 아이는···.“

이단주는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손바닥으로 주름이 깊은 이마를 쓰다듬었다.

‘놓치기 아까운 아이인데···. 할 수 없지. 우리 세계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니.’

마치지 못한 말은 한숨이 되어 나왔다.


다른 네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아?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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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멸 위기 22.10.21 53 1 7쪽
40 작별 인사 22.10.20 27 1 12쪽
39 집필 22.10.20 31 1 10쪽
38 결심 22.10.20 29 1 10쪽
37 마지막 연락 22.10.19 36 1 11쪽
36 그믐밤의 손님 22.10.19 21 1 10쪽
35 내가 거기 있다 22.10.19 36 1 10쪽
34 플랜 B 22.10.18 33 1 10쪽
33 리허설 22.10.18 29 1 10쪽
32 악몽 22.10.17 35 1 10쪽
31 주술의 부작용 22.10.17 31 1 10쪽
30 훼방꾼들 22.10.17 34 1 10쪽
29 서글픈 빈 손 22.10.16 47 1 8쪽
28 길 잃은 영혼 22.10.16 54 1 11쪽
27 소리 없는 울음 22.10.15 29 1 11쪽
26 애원 22.10.15 23 1 11쪽
25 의외의 변수 22.10.14 29 1 11쪽
24 유령 22.10.14 32 1 11쪽
23 그의 것은 그에게로 22.10.13 32 1 12쪽
22 황혼의 이중창 22.10.13 39 1 10쪽
21 빙의 22.10.12 28 1 9쪽
20 지새늬와 구하라 22.10.11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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