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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자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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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링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7
최근연재일 :
2021.06.09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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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9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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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외팔이 검사와 딸(1)

DUMMY

우리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라미엘은 기지개를 켰다. 딱히 동요하는 얼굴은 아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초대 성녀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점에 조금 놀란 얼굴이다.


“괜찮나?”

“괜찮을 게 있나요. 성녀라면 후인에게 모든 걸 넘겨주고 빛이 되어 떠나는 것을.”

“두렵지는 않나?”

“성녀가 된 지도 30년이 넘었어요. 죽음을 두려워할 시기는 지났다는 이야기죠.”

“다행이로군.”

“후훗, 기분도 꿀꿀한데 나가서 밥이나 먹죠!”


우리는 1층으로 내려가 점심을 주문했다. 점심은 간단히 빵과 수프로 때웠다. 맛은 그럭저럭. 평가할 수준은 됐다. 라미엘은 이게 맛있다며 혓바닥으로 접시를 닦아내는 신기술을 보여주었다. 나는 말 없이 수프를 덜어주었다.


“에드는 안 먹어요?”

“난 안 먹어도 된다.”

“그렇긴 하죠. 아무튼 고마워요!”


내 수프까지 몽땅 해치운 라미엘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드리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눈짓으로 불 좀 붙여달라는 그녀, 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여관을 나왔다.


“담배는 밖에서 피워라.”

“우리 세계에서는 괜찮은데요?”

“실내 흡연은 내가 싫다. 그리고 지금 너는 13살 꼬맹이다. 성인도 안 된 모습으로 담배를 피운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거야 생각하기 나름이죠.”


흡연에서는 한 치도 물러섬이 없는 라미엘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라미엘은 계단 난관에 앉아 우수에 찬 눈으로 담배를 맛나게 피웠다. 맞담배 해주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게끔 말이다. 그녀는 능숙하게 담뱃재를 손가락으로 털어냈다.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요?”

“내가 아는 거라면 얼마든지.”


그녀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는 왜 울었던 걸까요?”

“...”

“왜 죄책감을 느꼈던 걸까요?”

“나도 잘 모르겠군.”


라미엘은 말을 이어가지 않고 담배만 태웠다. 그리고 필터에 다다르자 신성력으로 담배를 태워버리고 새로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지만 불을 붙여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나는 기다렸다.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사실대로 말해줄 의향은 있었다. 하지만 진실에 다가가지 못했다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낼 생각이다. 모든 것은 그녀에게 달려 있다.


“여기까지만 할게요.”

“그러지.”

“어라? 말리지 않네요?”

“그래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내 대답에 라미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제 힘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라미엘이 과거에 집착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다.

나는 라미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햇볕을 머금은 따스함이 느껴진다. 라미엘은 역시...성녀가 맞다.


“갑자기 뭐예요?”


나는 손을 떼며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기분 나쁘게.”


종알거리면서도 내심 기쁜 듯 입가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는 그렇게 담배를 피우며 과거를 연기에 흘려보냈다. 나는 평화로운 일상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키리.’


내가 다른 성녀들을 멀리해도 라미엘을 떼어내지 못하는 이유다.


***


술에 취한 라미엘을 재우고 로비로 내려오니 늦은 시각인데도 여관은 떠들썩했다. 나는 구석진 창가에 앉아서 술과 안주를 시키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반짝이는 머리를 가진 남자가 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젠장! 영웅이면 다야! 우리 같은 말단 용병은 뭐 먹고 살라고!”


그의 말에 동료들이 옳다며 호응해주자 남자는 취기가 올랐는지 목소리가 더욱더 거칠어졌다.


“외팔이가 됐으면 조용히 은퇴나 할 것이지 왜 우리 몫까지 뺏고 난리야?”

“내 말이 그 말이야.”


나는 그들의 푸념을 들으며 잔을 기울였다.


“외팔이 영웅이라면 불굴의 검사 로톤인가.”


나와 함께 마왕 데라무스를 소멸시킨 영웅이었다. 그는 무척 특이한 이력을 가진 남자였다.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성인이 되기도 전에 용병의 길을 걸었다.

그는 20살이 되던 해에 실전에서 얻은 검술을 엮어 만든 브레이브 스타라는 검술을 만들어내며 명성을 크게 떨쳤고 마수를 비롯하여 각종 몬스터를 처치하며 역대 최연소로 슬레이어 호칭을 받았다. 대륙 북부에 머물렀던 그가 중앙으로 내려오면서 원정대에 합류하게 되었고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함께 해왔다. 그리고 그는 나의 친우 중 한 명이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영웅이 되었다.

그는 항상 동료들과 떨어져 생활하는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고 함께 술도 자주 마셨다. 나는 로톤 덕분에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나중에는 사적인 이야기도 털어놓는 친우가 될 수 있었다.


“이제는 나를 잊었겠지.”


이리스가 펼친 망각의 저주는 불굴의 검사, 로톤도 피해 가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창문 밖에서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리스, 그러지 말고 들어와라.”

“에드가 사과할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전과 달리 이번에는 다 큰 성인의 모습으로 얼굴만 내민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모습도 나름 귀여웠지만, 어쨌거나 단단히 삐진 모양이다. 며칠 지나면 알아서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이리 오래 끌 줄은 몰랐다. 나는 점원을 불러 술과 안주를 더 시켰다. 내가 주문한 목록을 듣자마자 이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과할 테니 들어와라.”

“정말이지?”


그러자 바로 덥석 무는 이리스. 역시 먹이로 유인하는 방법만큼 효율적인 전략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스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블링크 마법으로 여관에 들어와 내 앞에 앉았다. 회색빛 로브를 몸과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빛나는 외모까지 숨기지 못했다. 나는 왜곡 마법으로 그녀의 모습을 적절하게 숨겼다. 괜히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이리스, 미안하다.”

“응응! 다시는 그러지 마.”

“그래.”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오자 이리스는 혀를 날름거리며 호기롭게 외쳤다.


“잘 먹겠습니다!”


방음 마법이 걸려있었기에 그녀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일은 없다. 나는 이리스의 투정과 장난을 적절히 받아주며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봐!”


청년은 맥주를 단숨에 마셔버린 후, 잔을 내려 높으며 입에 묻은 거품을 닦아 냈다.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내는 모습을 보니 이런 상황을 자주 겪어본 듯했다. 청년은 훈제된 오리고기를 포크로 찍으며 입을 열었다.


“로톤이 영지와 작위를 거절하고 다시 용병이 되었잖아. 그 이유가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대.”

“숨겨둔 애인이라도 찾으려고?”

“푸하하하하! 진짜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로톤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영웅들도 누군가를 찾으려고 애썼다는 걸 보면 확실히 뭔가 있나 봐.”


청년의 말에 다들 흥미로운 얼굴로 저마다 의견을 냈다. 이리스는 입에 묻은 거품을 소매로 닦으며 내게 물었다.


“쟤들이 말한 주인공 에드지? 망각의 저주가 에드를 지워버리는 마법이긴 하지만, 존재는 지우지 못하잖아.”

“맞다.”

“꼬맹이가 말을 안 해줬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라미엘이 기지개를 켜며 다가오자 이리스는 사나운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라미엘은 내 옆에 앉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는 조용히 입에 문 담배를 빼 탁자에 올려두었다.


“실내 흡연 금지다.”

“낭만이 없네요.”

“여관에서 무슨 낭만을 찾아?”

“저번에 꼬맹이라고 말해서 이번에는 성인 버전으로 오셨네요?”


이리스는 코웃음을 치며 반격했다.


“불량 성녀, 이 세상에 네 몸을 좋아하는 남자나 있을까? 아아! 있었네. 인간 남자 꼬맹이들.”


순간 라미엘의 트레이드마크인 미소가 진하게 일그러졌지만, 빠르게 원상 복귀했다. 이리스는 승리의 브이를 그리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43년 동안 남자도 사귀어 본 적 없는 불쌍한 성녀...좋아! 내가 마음 써준다! 남자 소개해줄게!”

“됐습니다. 평생 혼자 사실 분께 듣고 싶진 않네요.”

“뭐, 뭐라고!”

“평.생. 혼자 사실 거라고요.”

“너 진짜 죽여 버린다!”

“둘 다 그만해라.”


두 사람은 동시에 콧방귀를 뀌며 잔을 입에 가져갔다. 만났다 하면 싸우니 골치가 아팠다. 여기에 에우리스까지 있었다면 그야말로 헬 파티였을 거다. 로톤이 있었다면 킬킬 웃으면서 한마디 해줬겠지.


‘에드, 양손에 꽃을 든 느낌이 어때? 아, 성녀는 외관이 너무 어려 보여서 그런 느낌이 안 들려나?’


라미엘은 조용히 신성력으로 벼락을 만들어 내리꽂았겠지. 분노로 일렁이는 두 눈동자로 새카맣게 타버린 로톤을 바라보고 동료들은 재미있는 구경이라며 좋아했을 거다. 나도 피식 웃으며 녀석을 놀리는 데 동참했겠지. 라미엘은 내 생각을 읽었는지 잔을 내려 놓으며 녀석을 언급했다.


“로톤은 당신을 기억하려고 애썼어요.”

“그랬나.”

“저는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당신의 선택이라는 걸 알기에 그만두었죠.”

“잘했다.”


라미엘은 은근슬쩍 담배를 잡으며 말했다.


“로톤이 용병의 세계로 돌아가면서 제게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야. 라미엘, 이 허전함을 메우려면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른 녀석들처럼 약속된 명예와 영광을 누리면서 살아가면...채워질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봐. 그래서 떠나려는 거야.’라고 말이죠.”

“로톤다운 말이군.”

“그만큼 당신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거죠. 에드...제발.”


라미엘은 애원하는 얼굴로 내게서 담배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된다.”

“담배는 제 유일한 낙이라구요.”

“저 독한 게 뭐가 좋다고.”

“담배 맛도 모르는 분은 조용히 빠져주시겠어요?”


이리스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명백한 도발이었음에도 라미엘의 시선은 담배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가서 피워라.”


내가 손을 놓자 라미엘은 하악거리며 담배를 재빨리 입에 물었다. 정말이지 성녀의 품위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녀였다. 내가 다시 한 번 주의를 주려고 할 때, 모험가 일행 테이블이 묘하게 조용했다. 그들은 얼굴을 맞대며 누가 들을까 조심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감각을 열어 대화를 엿들었다.


“로톤에게 딸이 하나 있다는데 사실이야?”

“그거 아는 놈한테 물어보니까 사실이래.”

“아는 놈이 누군데?”

“은밀한 모험가, 체스터.”

“하아. 넌 그 자식 말을 믿냐?”

“그래도 로톤 정도면 결혼도 하고 애도 있지 않겠냐?”


로톤이 결혼을 했다. 충격적인 소식은 아니었다. 거친 용병 생활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었다.


‘에드, 바보처럼 들릴지는 몰라도 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게 꿈이야. 아, 내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고? 으음, 얼굴은 에우리스, 몸은 에밀리, 성격은 라미엘 정도? 아, 라미엘이 외모는 되는데 외관이 너무 어려서 말이지. 차마 얼굴이 이상형이라고는 말을 못 하겠다. 으아아악!’


또다시 벼락을 맞고 기절한 로톤. 나는 그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녀라면 진실을 알 수 있을 테니까.


“...”


라미엘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내게 걸리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신성력을 거뒀다.


“에드, 이건 말이죠.”

“됐다. 로톤이 결혼을 했나?”

“네.”

“자식도 있겠군.”


라미엘은 살짝 어두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하나 있죠.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예요?”

“저들이 그렇게 말하더군.”


내가 용병들을 가리키자 라미엘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년 전에 로톤이 딸과 함께 절 찾아온 적이 있어요.”

“그랬었군.”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지만, 가져온 소식은 그러지 않았어요.”

“무슨 일이 있었군.”

“네, 딸의 몸에서 마왕의 저주가 발동되었거든요.”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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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팔이 검사와 딸(1) +3 21.06.09 32 3 12쪽
27 초대 성녀(4) +2 21.06.07 32 4 13쪽
26 초대 성녀(3) +4 21.06.05 45 5 12쪽
25 초대 성녀(2) +2 21.06.04 47 7 11쪽
24 초대 성녀(1) 21.06.03 42 7 12쪽
23 방랑의 이유 +4 21.06.01 51 4 12쪽
22 엔딩(2) +2 21.05.31 64 7 16쪽
21 엔딩(1) +2 21.05.30 63 7 15쪽
20 진리의 탑으로(2) +3 21.05.29 57 7 12쪽
19 진리의 탑으로(1) +2 21.05.28 68 6 10쪽
18 뜻밖의 인물 +2 21.05.27 78 6 13쪽
17 알면 다쳐 +4 21.05.26 71 8 13쪽
16 유물(2) 21.05.25 70 7 13쪽
15 유물(1) +6 21.05.24 78 10 12쪽
14 지상 최후의 용(2) +4 21.05.23 92 10 14쪽
13 지상 최후의 용(1) +4 21.05.22 101 10 15쪽
12 비극적인 이야기(2) 21.05.21 90 9 13쪽
11 비극적인 이야기(1) +4 21.05.20 113 13 13쪽
10 끝맺음 +4 21.05.19 125 11 13쪽
9 축제(2) +2 21.05.18 109 12 14쪽
8 축제(1) +2 21.05.17 128 11 11쪽
7 운명론 +1 21.05.16 143 12 11쪽
6 야외수업 +6 21.05.15 152 14 11쪽
5 대접 +4 21.05.14 163 13 13쪽
4 과거 인연 +2 21.05.13 187 16 14쪽
3 수업(2) +1 21.05.12 195 14 11쪽
2 수업(1) +2 21.05.12 252 1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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