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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자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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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1.05.12 10:17
최근연재일 :
2021.06.09 23:15
연재수 :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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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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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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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5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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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초대 성녀(3)

DUMMY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미엘의 말은 틀렸다. 오래된 과거의 나라면 모를까. 나의 존재 자체가 글러 먹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남녀관계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별을 떠나서 나에게는 똑같은 인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카일은 이런 변화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에드, 자네의 본질은 인간이야.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본질까지 벗어난 건 아니네. 어쩌면 지금까지 보여준 감정, 행동, 생각들이 자네라는 존재를 점점 이곳에서 멀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니 인간답게 살게.’


카일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용족은 지혜로운 종족, 그의 말을 듣는 것이 백번 옳았다.

나는 그의 조언에 따라 대륙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방랑하면서 인간들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과 관계를 맺었고 즐거운 날, 슬픈 날, 기쁜 날을 함께 즐기며 살아갔다.

그렇게 100년이 흐르고 200년이 흐르고 500년이 흐르자 나는 점점 무뎌져 갔다. 내 모습은 노예가 되었을 때와 변하지 않았다.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건 머리카락의 길이뿐. 그 외는 그대로였다. 나는 다시 카일을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방법이 틀렸다고 인정하며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아무래도 시간의 축으로 돌아오는 일은 힘들어 보이네. 신께 조언을 구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알 수 없다’였네. 다른 차원의 사람이 우리 차원에 넘어온 일은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고 또 우리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이도 없었다고 하셨네.’


이야기를 들은 나는 조금 지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겠지. 수백 년 동안 대륙을 돌아다녔지만, 다른 차원에서 온 자들을 발견하지 못했거든.’

‘내가 자네에게 내준 숙제가 너무 가혹했군. 미안하네.’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나는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무기질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돌아갈 방법도 없고. 나와 같은 차원에서 온 자도 만날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지.’

‘죽음인가.’

‘차라리 죽어서 나도 위대한 순환의 굴레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남지 않았지. 가능하다면 내 영혼이 원래 차원으로 돌아갔으면 하지만, 신들이 불가능하다고 했으니 그건 포기했어.’

‘자네의 선택을 이해하네.’


나는 녀석의 넓은 등짝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버티지 못하고 미쳐버렸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군.’

‘아까부터 마음에 걸렸는데 네 말투 달라지진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었어?’

‘원로들이 내 말투가 너무 경박하다고 해서 진중하게 바꿔봤네. 그리고 말투는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니 자네 걱정이나 하게.’

‘장로 걔들은 여전하네. 사사건건 널 들들 볶고 말이야. 걔들은 위대한 순환으로 갈 생각이 없대?’

‘아직 천 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하더군.’

‘징글징글하네.’


카일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봤음에도 여전히 실없는 녀석이었다. 우리는 딱딱한 이야기는 내려놓고 일상 이야기로 돌아왔다.


‘아, 너 내년에 결혼한다며? 상대는 누구야?’

‘원로원장의 딸, 페넬리아다.’

‘널 졸졸 따라다니던 꼬맹이?’


카일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할 말은 했다.


‘페넬리아는 100년 전에 성인식을 치렀다. 그러니 더는 꼬맹이가 아니지. 어엿한 성룡이다.’

‘그날만 기다렸겠네. 축하해.’

‘고맙네. 자네도 이런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는데.’

‘굳이 모험하고 싶진 않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신 로드를 오래 붙잡고 있으면 원로들이 나설 테니 그러기 전에 떠나야 했다. 카일은 내게 물었다.


‘자네 달리 할 일이 있나?’

‘죽으러 가는 인간에게 시킬 일 있어?’

‘대륙이 혼란스럽다고 들었네. 사소한 싸움이 대륙 전쟁으로 이어졌다지?’

‘그렇다고 하더라고. 설마 전쟁을 끝내라는 부탁은 아니겠지?’

‘설마 그러겠는가? 신들도 자네의 존재가 드러나질 않길 바라는데 그분들의 심기를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네.’

‘그럼, 뭔데?’

‘마계의 왕을 소환하려는 움직임이 있네. 자네가 그들을 찾아서 처단해주게. 물론, 자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내가 할게. 목적 없이 방랑하는 것보다는 목적을 가지고 방랑하는 편이 심신안정에 더 좋거든.’


-에드, 딴생각해봤자 소용없어요. 두 사람의 데이트는.


“쓸데없는 소리. 이 부분은 넘기도록 하지.”


-흥! 누구 마음대로요! 전 끝까지 다 볼 거예요!


“원한다면 봐라. 대신 감당은 네가 해야 할 거다.”


내 섬뜩한 경고에 라미엘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장면을 넘기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카리에와 과거의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카리에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걸었다. 나는 그녀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마치 뿌연 안개가 낀 듯 무언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카리에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어댔다.


“에드워드 씨가 대단한 분이시라 해도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으로 당신과 산책하는지 지금은 알지 못할 거예요.”

“...”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전 단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당신이란 존재를 알게 되었거든요.”

“의도적으로 접근한 겁니까?”


세리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 내게서 두어 발자국 떨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뒤를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나요?”

“또 부탁입니까?”

“그러네요. 자꾸 부탁만 하게 돼서 정말 미안해요.”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다가도 모를 여인이었다.


“헤라이온님께서 부탁하신 거라면 받아들이죠. 하지만 개인적인 부탁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으음, 그런가요.”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슬픔으로 가득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건 필히 신이 나의 약점에 대해 말해줬을 거다. 에드워드라는 인간은 감정을 건드리면 연약해지는 존재라는 걸. 악어의 눈물이지만, 속아주자.


“들어줄 테니 울지 마십시오.”

“정말인가요?”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거짓 눈물이 아니었던 걸까. 모르겠다. 카리에처럼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존재라 그런지 꺼림칙하게 느껴진다.


“말씀해보시죠.”


카리에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결의 찬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저는 헤라이온님의 권능을 받은 대륙 최초의 사제예요.”

“짐작은 했습니다.”


담담히 말하자 카리에는 굉장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인간이 지니고 있어야 할 힘이 아니니 제가 알 수 있던 겁니다. 그리고 아까 헤라이온님을 언급하며 당신을 떠보았습니다. 당신은 보기 좋게 당해주었고요.”

“앗! 그럴 수가...”

“잡다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제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카리에는 재빨리 당황한 얼굴을 지우고 해맑은 미소로 답했다.


“키리를 돌봐주세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긴 했으나 애 하나 돌보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카일이 말한 존재일 수도 있었으니까.


“기한은 없는 겁니까?”

“100일이면 충분해요.”

“지금부터 시작하면 됩니까?”


카리에는 희미한 미소로 답했다.


“일주일 후에 시작하시면 돼요.”

“이러려고 요리로 잡아뒀군요.”

“딱히 방법이 없었어요.”


우리는 짧은 산책을 마치고 신전으로 돌아왔다. 키리는 신전 밖 계단에 앉아서 해맑은 미소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카리에는 손을 흔들어주며 내게 말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알게 거예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 아니, 어쩌면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이 가야 할 길을 말이죠.”


이때는 카리에가 말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왜 나에게 키리를 맡기려 했는지도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가 말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우리가 함께 이 공간으로 들어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무려 1000년이 지나서 말이다.

나는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라미엘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초대 성녀의 말을 곱씹으며 의미를 해석하려 애썼다. 역대 성녀들의 기억을 찾아보면 금세 나올 일이었지만, 현재 라미엘은 영혼 상태라 사용하지 못했다.

결국, 라미엘은 나에게 물어봤자 알려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 그냥 포기 해버렸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분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보다 별 거 없네요! 그냥 넘길 걸 그랬어요!


지금부터는 라미엘에게 독이 될 장면들이 한가득했기에 루티아 여신이 간섭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 반응은 없었다.

라미엘이 진실과 마주하고 정신적인 성숙을 이뤄내는 편이 더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라미엘이 역대 성녀 중 가장 강력한 권능을 부여받았으나 성녀라고 보기 힘든 언행을 자주 보여주었으니까.

이해는 되지만, 나는 라미엘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하지.”


-왜요? 혹시 제가 보면 안 될 장면이라도 나와요?


“아니, 지루한 장면이 반복될 뿐이다.”


-도대체 뭐죠? 혹시 당신과 카리에님이 하룻밤을 보냈다거나.


그게 어떻게 지루한 장면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그녀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절대 그런 일은 없다. 우리는 평범하게 지냈다.”


-그럼, 뭔데요? 숨기지 말고 이야기해 봐요.


나는 단편적인 정보만 제공하기로 했다.


“미래와 관련된 이야기다. 성녀들은 신의 허락 없이는 미래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루티아 여신의 허락을 받았나?”


라미엘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위해서 기를 쓰고 빠져나가려 했던 거군요. 그랬으면 애초에 기억을 들여다보지 않았어도 됐는데 왜 허용한 거예요?


“잠깐 잊고 있었다.”


-망각하지 못 하는 당신이 말이죠? 재미있는 농담이었어요.


“나도 인간이다. 실수할 때가 있는 법이지.”


-잘도 그러겠네요.


하지만 라미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니까. 뭐, 이미 예상했던 바라 놀랍지 않았다. 나는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네가 알고 싶은 내용은 일주일 후에 있다.”


-좋아요. 저도 이걸로 타협하죠. 루티아님도 당신의 제안이 좋다고 생각하신대요.


라미엘을 파멸로 끌고 가려 했으면서 선심 쓰는 척하다니 정말 웃음만 나온다.

아무튼, 나는 이 공간에서 빠져나가자마자 라미엘의 기억을 봉인시키기로 했다. 애초에 역대 성녀들의 기억을 후인이 온전히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아무리 신의 권능이라 해도 창조주가 정한 위대한 순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힘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성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이 대륙에서 이질적인 존재다.


-일주일 뒤로 갑니다.


라미엘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 순간 카리에는 미래의 나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입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신들의 눈이 닿지 않는 장소, 영원의 회랑. 사랑하는 제자가.’


이윽고 빛의 파편들이 우리를 집어삼켰다.


작가의말

어제는 예약 연재를 잘못 걸어서 일찍 올라갔습니다 ㅎㅎ

연재 시간은 23시 15분 맞습니다.
아 그리고 비축분이 떨어져 가는 관계로...평일에만 연재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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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방랑의 이유 +4 21.06.01 50 4 12쪽
22 엔딩(2) +2 21.05.31 64 7 16쪽
21 엔딩(1) +2 21.05.30 63 7 15쪽
20 진리의 탑으로(2) +3 21.05.29 57 7 12쪽
19 진리의 탑으로(1) +2 21.05.28 68 6 10쪽
18 뜻밖의 인물 +2 21.05.27 78 6 13쪽
17 알면 다쳐 +4 21.05.26 71 8 13쪽
16 유물(2) 21.05.25 69 7 13쪽
15 유물(1) +6 21.05.24 78 10 12쪽
14 지상 최후의 용(2) +4 21.05.23 92 10 14쪽
13 지상 최후의 용(1) +4 21.05.22 101 10 15쪽
12 비극적인 이야기(2) 21.05.21 89 9 13쪽
11 비극적인 이야기(1) +4 21.05.20 113 13 13쪽
10 끝맺음 +4 21.05.19 125 11 13쪽
9 축제(2) +2 21.05.18 109 12 14쪽
8 축제(1) +2 21.05.17 127 11 11쪽
7 운명론 +1 21.05.16 142 12 11쪽
6 야외수업 +6 21.05.15 152 14 11쪽
5 대접 +4 21.05.14 163 13 13쪽
4 과거 인연 +2 21.05.13 187 16 14쪽
3 수업(2) +1 21.05.12 195 14 11쪽
2 수업(1) +2 21.05.12 251 1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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