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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자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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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링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7
최근연재일 :
2021.06.09 23:15
연재수 :
28 회
조회수 :
3,030
추천수 :
282
글자수 :
161,002

작성
21.06.04 13:37
조회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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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11쪽

초대 성녀(2)

DUMMY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에 맞춰 누군가 이곳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성인 여성의 발소리. 아무래도 그녀가 분명했다. 정말 귀찮은 여인이다. 나를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 힘든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가 말을 걸어오기 전에 먼저 묻기로 했다.


“무슨 일이시죠?”

“저녁 식사는 하셨나요?”


카리에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내 반대편에 앉았다. 나는 고갯짓으로 빈 냄비를 가리켰다. 불쾌한 표정은 덤이다.


“보다시피 대충 때웠습니다.”


카리에는 냄비에 가까이 가 냄새를 맡았다. 잠시 후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정말 맛있는 냄새에요!”

“알았으면 이만 가주시죠.”


카리에는 결심한 표정을 지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에드워드 씨.”

“나눠달라는 말은 사양입니다. 제가 먹을 식량도 부족하거든요.”


하지만 내 예상을 빗나간 답변이 돌아왔다. 카리에는 순수한 미소를 띠며 내게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아이들을 위해 요리해주실 수 있나요?”

“요리...라고요?”

“네! 신도님들께서 식량을 나눠주셔서 양은 충분하지만, 제가 요리를 잘 못 해서 아이들에게 매일 폐만 끼치거든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카리에는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귀찮으시다면 제게 요리를 가르쳐주셔도 돼요! 아, 이게 더 귀찮으려나.”

“싫습니다.”

“네?”


나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성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뿐 그녀의 몸에 위험한 힘이 잠재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라미엘은 잠시 화면을 멈추며 말했다.


-지금보다 편안한 얼굴이고 말투도 생각보다 딱딱하진 않지만, 당신 정말 나쁜 사람이었네요. 어떻게 성녀의 도움을 거부할 수 있는 거죠?


나는 라미엘을 무시하고 과거의 나와 카리에를 바라보았다. 결과야 알고 있지만, 관찰자로 바라보니 확실히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이 세계에 온 시점은 언제예요?


“멈추지 말고 돌려라.”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다시 화면이 돌아가고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의 승부는 카리에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당시의 나는 차가운 겉모습과 달리 인정에 약했던 터라 카리에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으며 잘 떼어내지 못했다.


“어서 가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카리에를 따라 낡고 반쯤 무너져 내린 신전에 들어갔다. 카리에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다들 주목해주세요! 오늘부터 일주일간 우리 신전에서 요리를 담당하실 에드워드 선생님이십니다! 박수로 환영해주세요!”

“우와아아!”

“들었어? 요리사래!”

“드디어 사제님의 맛없는 요리를 먹지 않을 수 있게 됐어!”

“요 녀석들이!”


카리에는 자신의 요리 실력을 평가하는 아이들에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혼을 냈다. 끝나지 않는 전쟁 속에서도 사제와 아이들이 격의 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참 보기 좋았다.


“사람이 많네요.”

“신도님들이 고아가 된 아이들을 데려와 이곳에 맡기시거든요. 그렇게 하나둘씩 맡다 보니 어느새 이만큼 불어났죠.”


카리에가 돌보는 아이들은 총 37명이었다. 나이도 제각각이었는데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는 15살이었고 가장 나이가 어린 아이는 4살이었다. 아이들과 씨름하던 카리에는 땀을 훔치며 내게 말했다.


“그럼, 에드워드 씨, 부탁드려요!”

“재료는 어디에 있습니까?”

“키리가 안내해줄 거예요. 키리!”

“에드워드 선생님! 따라오세요!”


키리라 불린 파란 머리 소녀의 뒤를 따라 신전 밖을 나와 허름한 창고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과연 식자재들이 꽤 많았다.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

“가서 놀고 있으면 된다.”

“그래도 혼자서는 힘드실 텐데.”


나는 밝은 미소를 보이며 불안해하는 아이를 안심시켰다.


“난 괜찮으니 어서 가거라.”

“우웅. 알겠어요. 무슨 일 있으면 저 불러주세요!”


아이가 떠나자 나는 다시 식자재들을 확인했다. 곳곳에 신성한 기운이 식자제들을 감싸고 있었다.


“평범한 사제는 아니군.”


지금까지 만나본 사제들은 모두 가짜였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욕심으로 가득 찬 자들이었다. 종교라는 권력을 앞세워 제 잇속을 챙기는 자들. 일곱 신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앞으로 나서지 않고 자신의 힘을 어려운 자들을 위해 힘썼다. 천성일지라도 죽음이 가득한 시대에서 신념을 꺾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신의 관심을 받았겠지.


“빠르고 많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역시 수프밖에 없군.”


그런데 생각해보니 주방이 어딘지 물어보는 걸 잊었다. 카리에에게 묻기 위해 창고를 나가려는데 문 옆에서 키리가 배시시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륙의 강자들도 내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13살밖에 안 된 소녀가 내 감각에서 벗어난다? 믿을 수 없던 나는 소녀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놀랍게도 평범했다. 마치 무언가에 비워진 것처럼 말이다. 키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헤헤. 그럼, 절 따라오세요!”

“내가 금방 나올 줄 알았니?”

“당연하죠! 아무리 선생님이라 해도 창고에서 요리하실 수는 없잖아요.”


나는 소녀의 눈빛에서 요리에 대한 열망을 읽어냈다. 내가 떠나더라도 내가 가르쳐 준 요리로 카리에 사제와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겠다는 생각과 따뜻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키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를 도와주겠니?”

“네! 열심히 할게요!”


나는 그녀를 내 아래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어쩌면 카일이 경고했던 존재일 수도 있었으니까.

주방은 의외로 아담하면서도 갖출 건 다 갖춰져 있었다. 키리는 신이 난 얼굴로 이것저것 가르쳐주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됐지만, 잠자코 들었다.


“선생님! 전 무엇을 할까요?”

“재료들부터 손질하자.”

“넵!”


키리는 자루에서 감자들을 꺼내 빠르게 손질했다.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꽤 오랫동안 카리에를 보조해줬던 모양이다.


“소환.”


나는 물의 정령들을 소환했다. 소녀들은 주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신이 난 듯 물방울을 터트려댔다. 그 모습을 본 키리는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우와! 정령들이에요?”

“그래, 우리를 도와줄 거다.”

“넵!”


나는 정령들에게 재료들을 다듬으라고 지시했다. 정령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키리의 옆에서 재료들을 손질했다. 키리와 정령들은 금세 친해졌는지 가볍게 장난을 치며 고된 일을 날려 보냈다.


“다음에 다시 부르지.”


물의 정령들이 돌아가고 시간은 흘러 야채수프가 완성되어가자 주방 밖에는 아이들이 입을 벌린 채로 솥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리는 국자를 들고 돌아가라며 야단을 쳤지만, 아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무리가 점점 커지자 카리에가 아이들을 돌려보내며 다가왔다.


“에드워드 씨,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키리가 도와주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카리에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는 성실하고 마음씨도 참 곱죠. 저를 많이 도와준답니다.”

“그렇군요.”

“선생님! 빵 다 구워졌어요!”


평평하게 펴진 난을 본 카리에는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수프와 함께 먹는 빵이라 둘러대며 솥을 들고 신전으로 들어갔다. 이미 자리는 전부 세팅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자리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리에는 요란법석을 떠는 아이들에게 외쳤다.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나와 키리는 식탁 위에 야채수프와 난을 적당히 배분했다. 카리에는 아이들을 통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명한 사제라 해도 아이들을 감당하긴 역부족이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기 전에 신전을 나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화르르 타들어 가는 담뱃재, 폐 깊숙이 들어오는 담배 연기와 다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 나는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선생님.”


나는 이번에도 이 아이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암살자였으면 이미 내 목이 날아가고도 남았을 상황. 죽진 않겠지만,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다. 나는 담배를 비벼 끄며 물었다.


“왜 나왔지?”

“선생님을 보려고 나왔죠.”


내 옆에 앉아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아이. 나는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리도 일어선다.


“내게 할 말이 있나?”


키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됐으니 사제에게 가 보거라.”

“넵! 내일 아침에 봬요!”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사라졌다. 그런데 바통터치라도 하듯 카리에가 다가왔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사람. 나는 생각을 포기했다.


“산책하실래요?”

“무슨 의도입니까?”

“예전부터 남녀가 함께 걸으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했어요. 행복과 불행의 신을 받드는 필레이스교가 엄격한 편은 아니지만, 혼전순결은 존재해서 자유로운 교제는 힘든 편이거든요.”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진실이었다. 그게 더 황당해서 침묵하게 됐다.


“저와 산책하기 싫으신가요?”


재차 묻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아침에 처음 본 사람에게 갑작스러운 요리 제안이나 산책 제안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런가요? 사람 보는 눈은 꽤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인류는 현재 100년이 넘게 전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좋은 사람들은 대부분 모두 죽었고 남은 사람들은 악만 남았습니다. 이곳이 전쟁에서 한 발자국 나와 있다 해도 곧 불행이 들이닥칠 터. 그렇게 되면 이 아이들은 모두 죽게 되겠죠.”

“슬픈 이야기를 하시네요.”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하자 카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 씨의 말이 맞아요. 그동안 중립을 외쳐왔던 영주님도 전쟁 참여로 돌아섰어요. 이제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겠죠.”

“그동안 이곳이 잠잠했던 것도 오랫동안 참아온 겁니다. 서부와 중앙을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도시라 많은 압박을 받아왔을 테니까요.”


중앙에서 시작된 전쟁은 동부, 북부, 남부로 퍼졌다. 서부는 다른 지역보다 소강상태라 하지만, 이곳이 참여하는 순간 지옥으로 변하게 될 터. 사람들의 선의로 버텨오던 보육원은 가장 먼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카리에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저와 산책해요.”

“이해할 수가 없군요.”


카리에는 내게 다가와 슬쩍 팔짱을 꼈다. 나는 재빨리 팔짱을 풀며 물었다.


“무슨 짓입니까.”

“나중에 아시게 될 거예요. 지금은...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해요. 평생의 소원이랍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런 눈빛으로 부탁하면 안 들어줄 수 없지 않은가. 결국, 나는 그녀의 소원대로 저녁 산책에 나섰다. 그 모습을 본 라미엘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에드, 바람둥이예요?


“...”


너무나 적절한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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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성녀(2) +2 21.06.04 47 7 11쪽
24 초대 성녀(1) 21.06.03 42 7 12쪽
23 방랑의 이유 +4 21.06.01 51 4 12쪽
22 엔딩(2) +2 21.05.31 64 7 16쪽
21 엔딩(1) +2 21.05.30 63 7 15쪽
20 진리의 탑으로(2) +3 21.05.29 57 7 12쪽
19 진리의 탑으로(1) +2 21.05.28 68 6 10쪽
18 뜻밖의 인물 +2 21.05.27 78 6 13쪽
17 알면 다쳐 +4 21.05.26 71 8 13쪽
16 유물(2) 21.05.25 70 7 13쪽
15 유물(1) +6 21.05.24 78 10 12쪽
14 지상 최후의 용(2) +4 21.05.23 92 10 14쪽
13 지상 최후의 용(1) +4 21.05.22 101 10 15쪽
12 비극적인 이야기(2) 21.05.21 89 9 13쪽
11 비극적인 이야기(1) +4 21.05.20 113 13 13쪽
10 끝맺음 +4 21.05.19 125 11 13쪽
9 축제(2) +2 21.05.18 109 12 14쪽
8 축제(1) +2 21.05.17 127 11 11쪽
7 운명론 +1 21.05.16 143 12 11쪽
6 야외수업 +6 21.05.15 152 14 11쪽
5 대접 +4 21.05.14 163 13 13쪽
4 과거 인연 +2 21.05.13 187 16 14쪽
3 수업(2) +1 21.05.12 195 14 11쪽
2 수업(1) +2 21.05.12 252 1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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