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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자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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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링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7
최근연재일 :
2021.06.09 23:15
연재수 :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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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1
추천수 :
282
글자수 :
1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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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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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축제(1)

DUMMY

마을에 머무른 지 두 달, 소녀와 만난 지도 어느새 한 달이 다되었다. 새삼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생각하며 지붕 위에 올라갔다. 아직 세상은 동이 틀 무렵. 옅은 어둠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고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려 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랜만에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탓인지 기분이 상쾌했다.


“맛이 일품이군.”


불어오는 바람도 나쁘지 않았다. 길게 기른 흑발이 깃발처럼 나부꼈지만, 오히려 좋았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내 존재를 각인시켜주는 듯했다. 또한, 곧 이 마을 떠나야 한다는 것도 함께.


“...”


사실 이 마을에 머무르는 것도 생각도 해봤다. 소녀에게 마법을 가르치지 않고 흥미를 느낄 지식을 알려주며 가끔 레테의 후손을 만나 추억을 되새기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 어떨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들과 같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과 살아가는 시간이 달랐다. 진정으로 그들을 생각한다면 멀어져야 했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테니까.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처럼.


“쓰군.”


나는 빈 잔을 내려놓았다. 슬슬 어둠이 물러나고 빛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다. 아침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진다. 나는 지붕에서 내려와 부지런히 움직였다. 오늘은 나에게도 소녀에게도 중요한 하루, 준비할 일이 조금 남아 있었다.


“왔나.”

“스승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꽤 이른 시간에 온 소녀였다. 그런데 소녀의 복장이 평소와 달랐다. 수수한 갈색 튜닉이 아닌 귀족 아가씨들이 입을 만한 외출용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촌장이 큰마음을 먹었군.’


귀족 출신의 손녀가 평민들처럼 수수한 옷을 입고 다녔으니 표현은 안 하더라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입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겠지. 소녀는 제 모습이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며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저 어때요?”

“예쁘군.”


내 대답을 예상 못 했던 걸까.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스, 스승님께서 칭찬해주시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사실을 말한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라.”

“어쨌든 기뻐요!”


소녀는 신이 났는지 재잘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적절히 대답해주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소녀가 주인공이었으니까.


“아침은 먹었느냐?”

“아뇨! 도시에 가서 먹으려고 일부러 안 먹었어요!”

“아직 문 연 곳은 없을 테니 빵이라도 먹어둬라.”


나는 차원의 공간에서 딱딱한 바게트와 치즈를 꺼내 접시에 담아 소녀에게 건넸다.


“히히! 사실 배고팠는데.”

“그래 보였다.”

“그런데 스승님은 안 드세요?”

“이미 먹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잘 먹겠습니다! 우와! 맛있어!”


나는 소녀의 이가 부러지지 않도록 마법으로 빵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말랑말랑해진 빵에 치즈를 듬뿍 발라 입 안에 넣는 소녀.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배불렀다. 그렇게 바게트 반쪽을 해치운 소녀는 가볍게 배를 두드렸다. 귀족답지 않은 상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마을을 떠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지.’


소녀가 살아갈 장소는 이 마을이다. 내가 떠나더라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스승님, 언제 출발해요?”

“지금 가봤자 할 것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구경할 수 있잖아요.”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축제가 시작되면 여러 지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도시가 붐빌 테니까. 나는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의미를 안 소녀는 활짝 핀 꽃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가요!”

“내 마나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마나 과부하가 일어나지 않죠. 저도 다 알고 있다구요.”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지만, 소녀를 믿기로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텔레포트.”


새하얀 빛이 우리를 감싸고 도착한 장소는 내가 설치해둔 외부 마나 저장소였다. 소녀의 몸이 버티지 못했기 때문에 외부 마나 저장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내 거대한 마나 덩어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으니까.


“괜찮나?”

“네, 스승님 말씀대로 물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는데도 아프네요.”

“잠시 쉬었다 가지. 외부 마나 저장소라지만, 위험할 수 있다.”

“아뇨. 바로 가요!”


소녀의 의지를 읽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다시 통제를 풀어라.”


나는 다시 소녀의 손을 붙잡았다. 소녀는 내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손으로 꽉 잡았다. 나는 단단히 얼어붙은 땅으로 차오르는 온기를 밀어내며 나직이 외쳤다.


“텔레포트.”


우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항상 다니던 한적한 골목길이었다. 주변은 오물로 가득했고 길고양이들이 날카롭게 노려봤다. 하지만 나는 소녀부터 챙겼다. 소녀는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나는 소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쉬어야겠다.”

“아뇨...조금만 구경해요. 우리.”


처음이야 마나를 알려줬을 때는 적은 양이었기에 안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이 소녀의 마나 저장소로 흘러들어 갔던 터라 과부하가 온 것이다.


“업혀라.”


나는 소녀가 대답하기 전에 등에 업었다. 다행히 소녀는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나는 소녀의 온기를 그대로 느끼며 골목길에서 나갔다.


“인비저블.”


은신으로 몸을 숨긴 이유는 우리의 모습은 눈에 너무 띄었기 때문이다. 나보다는 소녀의 드레스가 문제였다. 소녀의 복장은 영락없는 귀족 아가씨였으니까. 거리로 나가자 소녀는 다시 힘을 냈다. 축 늘어진 몸과 다르게 목소리는 참 우렁찼다. 방음 마법을 펼쳐둬서 다행이었다.


“우와! 저기 좀 봐요!”

“보고 있다.”

“정말 멋지지 않아요?”

“그렇군.”


거리 곳곳에는 축제를 알리는 장식들이 가득했고 소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나는 소녀가 원하는 장소로 이동하면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많은 사람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도 발걸음을 옮기며 거리를 구경하다가 상점가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로 이동했다. 우리는 허름한 나무 간판이 인상적인 상점에 도착했다. 상점 간판을 본 소녀는 온몸으로 기뻐하며 소리쳤다.


“과자 상점이다!”

“여기서 밀크 쿠키를 사온다.”

“밀크 쿠키! 밀크 쿠키!”


살짝 먼지 낀 유리창 안쪽으로 진열된 밀크 쿠키들을 본 소녀의 눈이 번쩍였다. 나는 헤벌쭉 웃으며 유리창으로 손을 뻗으려는 소녀의 팔을 붙잡고는 문을 두드렸다.


“네! 나갑니다!”


나는 청년이 문을 열기 전에 염동력으로 잠긴 문을 활짝 열었다.


“누구? 헉!”


문으로 다가오던 청년의 발이 뚝 멈췄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하긴 문이 스스로 열린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나는 은신을 해제하려고 했지만, 소녀가 한발 빨랐다.


“나는 귀신이다!”

“귀, 귀신? 맙소사! 귀신이라니!”


청년의 반응이 재밌는지 소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다그쳤다.


“어허! 어서 무릎을 꿇지 않고 뭐하는 게냐!”


청년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다. 청년은 소녀처럼 특별한 능력이 없었다. 레테가 정령을 잘 다뤘던 걸 생각하면 약간 아쉽게 느껴졌다. 그건 그거고. 나는 소녀의 행동을 딱히 제재하지 않았다. 소녀는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완벽하게 귀신을 연기했다.


“네게 작은 재주가 있다고 해서 이 몸이 직접 찾아왔으리라.”

“재주요?”

“그래, 내 듣기로는 과자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다더구나.”

“하하! 과찬이십니다.”


소녀의 말을 들은 청년은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를 챈 듯했다. 내가 전에 말했던 소녀라는 걸 말이다. 그러나 청년은 사실을 밝히지 않고 소녀와 놀아주었다. 내 눈에는 마음씨 좋은 청년이 아니라 호구로 보였다. 이번 축제에서 팔 밀크 쿠키들을 아낌없이 퍼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과하면 좋지 못했으니까. 은신 마법을 풀자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청년과 시선을 마주친 소녀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살짝 미안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청년은 소녀를 미소로 받아주었다.


“남는 방이 있나?”

“아가씨가 쓸 방은 충분하죠.”

“잠시 신세 지겠다.”

“형님이라면 얼마든지요. 자자, 안으로 들어오세요.”


우리는 청년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상점 분위기와 다르게 안쪽은 새것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공간은 크지 않았지만, 혼자 살기에는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2층에서 쉬시죠.”

“값은.”

“하하! 됐어요. 저희 사이에 돈은 무슨. 편히 쉬다 가십시오!”

“밀크 쿠키 값을 치르려고 꺼낸 말이었다만.”

“그건 제대로 내셔야죠.”


청년의 정색에 사태의 원흉인 소녀는 슬그머니 내 등 뒤로 숨어버렸다. 청년은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


“제자 분이 참 귀엽네요. 제가 5살만 어렸다면.”

“헛소리는 그만하고 안내해라.”


하지만 청년의 헛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얼굴 반반하지. 성격도 좋고 몸매도 나쁘지 않고 밀크 쿠키도 잘 만들고. 딱 네가 원하는 남편감 아니니?”

“뭐래요. 전 아저씨 싫은데요?”

“아, 아저씨? 겨우 21살인데.”

“제 스타일도 아니니까 넘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푸슉!

청년의 심장에 비수가 박힌 소리가 들린 건 착각일까. 청년은 가슴을 부여잡고 상처받은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녀는 코웃음 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장난을 장난으로 못 받아들이다니. 후우, 형님 제자 맞네요.”


상처받은 모습과 달리 청년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나는 레테와 너무나도 닮은 청년의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드, 진지하게 나 어때? 한 번쯤은 데리고 살 만하지 않아? 뭐? 내 장점이 뭐냐고? 그야 얼굴 반반하지. 성격 좋지. 몸매도 꿀리지 않...지? 이건 애매하니까 패스! 맞다! 나 요리 잘하잖...에이! 농담이야. 아니!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잖아! 너무해!’


어쩜 이리도 하는 짓이 똑같은지.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올 뿐이다.


“어라? 방금 웃으셨죠? 맞죠?”

“...안 웃었다.”


나는 소녀의 말에 정색하며 청년이 내준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건수를 잡자 소녀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소녀의 시선을 피했다. 뒤통수가 미치도록 따가웠다.


작가의말

오타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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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엔딩(2) +2 21.05.31 64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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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진리의 탑으로(1) +2 21.05.28 68 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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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알면 다쳐 +4 21.05.26 71 8 13쪽
16 유물(2) 21.05.25 70 7 13쪽
15 유물(1) +6 21.05.24 78 10 12쪽
14 지상 최후의 용(2) +4 21.05.23 92 10 14쪽
13 지상 최후의 용(1) +4 21.05.22 101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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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비극적인 이야기(1) +4 21.05.20 113 1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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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축제(2) +2 21.05.18 109 12 14쪽
» 축제(1) +2 21.05.17 128 11 11쪽
7 운명론 +1 21.05.16 143 12 11쪽
6 야외수업 +6 21.05.15 152 14 11쪽
5 대접 +4 21.05.14 163 13 13쪽
4 과거 인연 +2 21.05.13 187 16 14쪽
3 수업(2) +1 21.05.12 195 14 11쪽
2 수업(1) +2 21.05.12 252 1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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