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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아님 님의 서재입니다.

S.N.L (Save and Load)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러아님
작품등록일 :
2018.11.17 15:37
최근연재일 :
2019.07.1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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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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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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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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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SNL - 27

DUMMY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도박이었다.

공석을 대면하는 것을 시작으로, 몸속에 억지로 마법의 힘을 심어 놓는 것, 공석이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것, 늦지 않게 보육원 쪽을 마무리하고 공석을 돕는 것까지, 콕 집어서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공석이 재영의 말을 무시하거나 겁먹어서 싸우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으며, 용감히 싸우더라도 자이언트 엘리펀트를 이겨내지 못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엔 마법의 힘을 심을 때 거부반응을 일으켜 심맥이 터져버릴 수도 있었다. 동일한 영혼이기에 영혼의 영향을 받는 마나홀의 형태도 유사할 거란 생각으로 시도한 도박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처음엔 모든 걸 혼자서 하려고 했었다. 누구보다 강하고, 또한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주도적으로 사건을 이끌 때 가장 확실한 결과가 나온다고 믿었다.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만, 그 결과 다른 이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다른 이들을 장기 말처럼 원하는 위치에 놓으려고만 했지 그들 각자가 지닌 마음가짐과 열망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혼자서 세상을 지킬 수는 없다. 혼자서 세상을 지킬 게 아니라면, 발버둥도 함께 쳐야한다. 혼자서만 분투할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등을 적당히 밀어주고 서로 의지할 필요가 있었다.

마고 덕에 그것을 깨달은 재영은 소중한 것은 스스로 지키도록 공석의 등을 떠밀었다. 그 결과 공석은 기대 이상의 결과를 이끌었다.


김태석과 박정자 부부가 사망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한 때는 재영에게도 부모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들까지 살리는 결과를 위해 과거를 더 반복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재영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의 죽음이 공석이 각성하기 위한 중요한 계기였으므로 그들이 살아나면 공석이 각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시간을 반복한다고 이번보다 더 좋은 결과가 발생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런 리스크를 짊어지기엔 김태석 부부를 향한 재영의 감정이 너무 빛바랜 상태였다.

그들과 인연이 있었던 전생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김태석과 박정자에게 보냈던 감정을 지금은 보육원 식구들에게 쏟고 있었다. 전생과 현생의 모든 사람을 담기엔 재영의 마음의 그릇이 그만큼 크지 못했다.


자괴감이 드는 일이지만, 재영은 김태석 부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보다 공석의 각성과 보육원이 무사한 데에서 오는 기쁨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사실 재영은 이 시간대의 공석에게 부러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전생의 재영은 김태석 부부는커녕 김정연까지 잃었으니까. 공석에겐 어찌됐든 괴로운 일이겠지만, 같으면서도 다른 운명을 살고 있는 재영에겐 공석이 운 좋은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재영은 기절한 공석에게 응급처치를 했다.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재영의 응급처치는 어지간한 의사들 못지않았다. 물론 의사들처럼 능숙하게 외과적 수단을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기를 응용한 응급처치로 유용한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재영은 공석의 혈도를 자극해 고통과 출혈을 줄이고 많은 혈액이 필요한 뇌와 오장육부에 혈류가 원활히 흐르도록 했다. 외부에서 힘을 가해 뼈를 맞출 뿐만 아니라 환부의 근육을 자극해 스스로 어긋난 뼈를 맞추게 했다. 뼈가 튀어나올 정도의 중상이면 불가능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환부조직의 2차 손상을 막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공석의 응급처치를 끝내고 재영은 김태석과 박정자 부부의 시신을 잔해 속에서 찾아냈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그들의 눈꺼풀을 감겨주었고 진심으로 명복을 빌었다. 비록 그들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딸인 김정연이 죽지 않은 것으로 용서해주길 바랐다.


이후에는 인근의 무너진 건물에서 생존자들을 찾아내 구조했다. 괴끼리가 성대하게 날뛴 까닭에 생존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재영은 중상자에 한해 그들에게도 응급처치를 했다. 임시방편으로 취할 수 있는 구조작업을 끝내고 떠나려고 하니 생존자들이 재영을 붙잡고 매달렸다.


“제발 도와주세요! 저기에 우리 엄마가 깔려있어요!”

“잔해 아래에 저희 언니가 있어요! 분명 살아있을 거예요! 아까까지 제 이름을 애타게 불렀어요!”

“아들 내외랑 손주가 모두 저 아래에 있다오! 제발, 제발······!”


생존자들은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얼굴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와중에도 재영에게 애원했다. 괴력으로 건물 잔해를 걷어내고 자신을 구한 재영이라면 가족들도 구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그들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재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당신들이 전부입니다.”


생존자들이 울부짖었다. 그들 대부분은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받아들인 이조차도 시신이라도 봐야겠다며 사정했다.

그러나 재영은 그들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군경과 소방인력이 코앞까지 와있었다. 재영은 공권력과 엮이고 싶지 않았고 이 이상의 목격자가 생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 뒤처리는 어차피 지금 오는 관과 군의 인력들이 할 것이기에 재영이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사실, 애초부터 피해자들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모든 이들을 구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피해자들의 존재가 자신의 무능에 대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들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웠기에 재영은 그냥 떠날 생각이었다.

그랬던 재영이 마음을 고쳐먹고 피해자들을 도와준 것은 순전히 우연으로, 김태석 부부의 시신을 찾던 중 잔해 속에서 김태석 일가의 가족사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액자가 부서지고 반으로 찢어진 사진.

진즉에 김태석 부부에 대한 마음을 정리한 재영에게 큰 의미가 있는 사진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조각으로 찢어진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일가의 모습을 보고나니 피해자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뿐이다.

재영은 마고의 눈을 소환해 계속해서 매달리는 이들을 환상으로 떼어놓고 자리를 떴다.

자신이 누구에게 애원했는지조차 잊어먹은 채, 피해자들은 멍청히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일주일이 흘렀다.

위상충돌 당일 대한민국에는 공식적으로만 78개의 균열이 열렸고, 쏟아져 나온 괴물로 인해 사망 2,859명, 부상 10,212명이라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물론 재영과 두 자경단원이 처리한 거대균열은 78개라는 수치에 집계되지 않았다. 재영이 박수찬에게 부탁해 의도적으로 그 흔적을 지운 탓이었다.

대한민국은 세계주요국 중 가장 빠르게 피해상황을 파악한 국가 중 하나였는데, 좁은 국토와 구석까지 촘촘히 뻗친 행정력이 종합된 결과였다.

이후에도 새로운 균열이 계속해서 열리며 지속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위상충돌 당일만큼 다수의 균열이 일시에 열리진 않았고, 이즈음에는 전군이 사실상 전시상태에 돌입해있었기에 첫날만큼 큰 피해가 발생하지도 않았다.


전국은 애도의 물결에 휩싸였다.

평시 같았으면 곳곳에 분향소가 세워져도 이상하지 않은 참사였다. 하지만 언제 괴물들의 습격이 발생할지 모르는 까닭에 인파가 몰릴 수 있는 분향소의 설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더 많은 희생자를 낼 수는 없다며 누구보다 강하게 반대한 탓이 컸다.

일주일이 지난 현재에는 군 병력이 상시 전투태세로 대기 중인데다가 경찰인력도 소화기(小火器)로 무장한 채 시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외출을 두려워했지만 집안에 숨어만 있어서는 괴물의 습격으로 죽기 전에 직장에서 잘려 굶어죽을 형국이었다. 가게와 회사가 문을 열었고, 거리에도 사람들이 다시 나타났다. 사회 분위기가 진정되자 최종적으로 학교도 학생들을 받았다.

일상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거실에 틀어진 TV에서 긴급속보가 흘러나왔다. 경기도 양평군 인근에 발생한 균열에서 괴물이 나타났고 출동한 군부대에 의해 소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뉴스를 본 박문희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등하교는 꼭 큰 길로, 그리고 사람 많은 길로 다니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다싶으면 학교를 땡땡이쳐도 된단다. 그러니까 다치지만 마렴. 알겠니?”


재영, 명우, 연채는 이구동성으로 네, 하고 대답했다.

중학교 이하 아이들은 박문희가 자가용으로 등하교 시켰다. 그렇기에 스스로 등교하겠다는 고등학생들만 불러 모아 집을 나서기 전에 주의를 준 것이다. 박문희의 설교는 상당히 길게 이어졌다. 이대로면 영락없이 지각이지만 세상이 변한 마당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재영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시간을 되돌리고 오래 지나지 않을수록, 내 행동패턴이 똑같을수록 미래의 변화가 적어지는구나.’


오늘 아침을 한 번 되돌린 까닭에 재영이 박문희의 설교를 듣는 것도 두 번째였다.

재영은 지난 일주일 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 얻은 고유능력을 시험했다.

우로보로스의 설명조차 없는 불명의 능력이었기에 재영 스스로 하나부터 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일주일 간 알아낸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 일정 시점을 ‘저장’하면 ‘불러오기’를 통해 저장된 시점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다. 능력이 처음 생겼을 때에는 저장지점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임의로 위상충돌이 시작된 시점으로 불러오기 된 것이었다.


하나, 무한히 불러오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용가능 횟수는 음력을 기준으로 한 달에 최대 5회. 보름달이 뜨는 날 밤 0시에 초기화됐다는 메시지가 뜨면서 5회의 충전량이 다시 채워졌다. ‘초기화’라는 단어로 알 수 있듯이 이전 달의 불러오기를 모두 사용하지 않고 남겨놓았더라도 오는 달로 이월되지는 않았다. 또한, 충전량 초기화와 함께 저장지점도 초기화되어 다시 설정하지 않는다면 보름날 0시로 불러오기로 되었다.


하나,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기 때문에 예지능력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제약이 뒤따랐다. 두 시간 전으로 되돌렸을 때에는 역사가 거의 완벽하게 되풀이되었지만, 닷새 전으로 되돌렸을 때에는 상당 부분이 바뀌었다. 닷새를 되돌린 뒤 이틀째에는 저녁 식사 메뉴가 바뀌었고 사흘째에는 싸우지 않았던 동생들이 다투어 한 명이 얼굴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재영의 행동도 역사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불러오기 한 후 재영이 전 회차와 똑같이 행동한 경우에는 역사의 흐름도 똑같이 진행됐지만, 다른 행동을 한 때에는 역사도 바뀌었다.


하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담을 주는 능력은 아니다. 불러오기 시 세상이 암전되고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유발되긴 하지만 능력의 장점에 비교했을 때에는 없는 단점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기억 등의 정신활동은 시공간을 넘어서 유지되지만 육체의 변화는 유지되지 않는다.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고 불러오기 했더니 상처가 사라졌다. 사실상 죽지만 않으면 불러오기를 통해 재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 범위 밖에서의 공격을 통해 목숨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어디까지나 시전자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지, 부활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 고유능력을 사용할수록 재영에게 깃든 혼돈의 잔향이 짙어진다. 재영의 행위로 인해 미래의 변화폭이 크면 잔향도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혼돈의 잔향이 짙어지면 어떤 영향을 미치냐고 마고에게 물었지만 그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여기까지가 일주일 동안 얻은 정보였다.

재영은 이것들을 알아내기 위해 상당히 큰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위상충돌의 이튿날이 보름이라서 5회의 스톡이 다시 채워졌는데, 능력을 파악하기 위한 테스트에 3회의 스톡을 사용한 것이다.


강력한 능력이긴 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테스트 결과 재영이 내린 결론이었다.

일단 월 5회의 횟수제한이 있고, 저장을 언제 하느냐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제한될 수 있었다. 재수 없게 특정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에 저장을 했다면 몇 번을 불러오기 한들 해당 사건에 대응할 시간이 적어진다.

위상충돌 당일 시간 부족 때문에 김태석 부부의 희생을 막지 못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불러오기되는 시점이 제로아워가 아니라 그보다 더 이전이었다면 보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영은 자신이 보육원에 있을 때에만 저장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보육원만큼은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였다.


알아낸 사실들을 종합하면,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서포트에 적합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투를 되풀이 해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들어 승리하는 게 나쁜 전략은 아니지만, 그런 귀찮은 과정 없이 그냥 압도적인 힘으로 한 번에 승리하는 편이 더 쉬운 것은 명백하다.

대신에 불시의 상황에 대처하고 아군의 희생을 줄이는 데 탁월하였기에, 개인의 힘보다는 전체의 힘을 늘려서 위기를 극복하려는 재영에겐 유용한 능력이었다.

간단한 고민 끝에 재영은 불명의 능력에 Save and Load, 줄여서 SNL이라는 명칭을 임의로 붙였다.


박문희의 긴 설교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두 번이나 들은 재영은 SNL에 대한 테스트를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학교로 향했다.




결석한 아이들이 상당히 많았음에도 학교는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균열이 열린 지역에서는 반 친구가 희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침울해있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재영이 다니는 함천고등학교는 다행히 일주일 간 한 번도 균열이 열리지 않은 안전지대에 있었다. 타지의 친인척이 참사를 당한 경우도 있지만, 그런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를 나오지 않았기에 추모로 인한 울적함보다는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느라 학교는 활기가 넘쳤다.

물론 이 지역에도 균열이 열렸었다. 그것도 대한민국 유일의 거대균열이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학교에 재영과 윤슬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아이들의 주된 화젯거리는 단연 균열의 정체와 균열을 통해 등장하는 괴물들에 관한 것이었다. 벌써부터 등장했던 괴물의 스펙을 줄줄 외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괴물vs한국군’이라는 주제로 누가 우세한지 열띤 대화를 나누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한 대화의 대부분은 국군의 화력이 우세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는데, 위상충돌 초기에 한해서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사실이 그러하기도 했지만 아이들 대부분이 그러한 결론을 내린 까닭은 무의식중에 ‘그래야만 한다’는 바람이 담긴 탓이 컸다.


그러다가 아이들의 대화는 어느 기점을 지나자 괴물의 등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초능력자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미 전 세계에서 정화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는 초능력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 영상들이 넘쳐났고 실제로 봤다는 목격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관한 공식적인 발표나 언론보도는 아직까지 없었다.

음모론자들은 정부가 정보를 통제한다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실상은 정화자에 대해 아직까지 명확한 것이 없기에 섣불리 공식발표를 할 수 없는 것에 불과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불확실한 정보를 공표했다간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역사의 흐름이 재영의 전생과 비슷하게 흘러갔다면 아마 구조된 공석은 이미 정부와 접촉을 한 상태일 테고, 정부도 정화자에 대해 파악해나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아이들의 핸드폰은 동영상 사이트나 인터넷 커뮤니티에 업로드 된 영상을 쉴 새 없이 재생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괴물들과 싸워 이긴 정체불명의 초능력자들에 관한 영상이었다. 예전이었다면 굳이 분석할 필요도 없지 조작이라는 단어 하나로 결론지었겠지만, 초자연적 현상이 실존한다는 게 밝혀진 지금은 진짜냐 가짜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그 영상들 중에는 멀리서 공석의 사투를 찍은 것도 있었고, 공석처럼 각성하여 괴물을 물리친 다른 이들의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일선에서 사투를 벌인 제3자경단원들의 모습이었다. 흑복차림의 재영도 공석을 촬영한 영상의 말미에 가끔씩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거 조작 아냐? 괴물이 튀어나오는 세상이라지만 괴물은 괴물이고 인간은 인간이지. 어떻게 인간이 칼 들고 괴물을 이겨? 이거 진짜라는 애들은 게임을 너무 많이 한 게 분명해.”

“아니, 이거 다 진짜라니까. 어떤 미친놈이 이 판국에 이런 조작 영상이나 만들고 앉아있겠냐?”

“근데 조작이든 아니든 멋있긴 하다. 와 씨, 좀 고어하긴 해도 휙휙 칼질하는 게 간지는 장난 아니네.”

“야, 우리 사촌형이 대학교 영상제작학과인데 그거 다 CG래.”

“뭐? 미디어영상학과 다니는 우리 친형은 진짜라는데?”


조례가 끝나고 수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교실은 수업 중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수선했다. 쉬는 시간만으로는 일주일 간 쌓였던 이야기를 모두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사들도 어느 정도 수업을 포기한 상태였다. 교사도 사람인데 수업이니 시험범위니 하는 것들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현재 학교의 의의는 수업 그 자체보다는 ‘평소의 일상이 계속 된다’는 안정감을 주기 위한 도구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


그때 교실 구석에서 몰래 핸드폰을 보고 있던 한 남학생이 탄성을 내질렀다. 이목이 집중되자 남학생은 교사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모두 들리게끔 말했다.


“지금 특별대국민담화 한대!”


일주일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특별담화가 있었지만 번번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정부가 빨리 관련정보를 뱉어내어 궁금증을 해소시켜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학생들의 시선이 교사를 향했다. 교실TV로 다 같이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애원의 시선이었다. 학생들의 부탁이 아니라 본인의 궁금증 때문에라도 교사는 TV를 틀지 않을 수 없었다.




역대 대통령들에 비해 비교적 젊은 50대 후반의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많은 사건이 있었던 요 며칠 사이 부쩍 늙은 모습이었다. 원고를 외울 시간도 없었는지 대놓고 읽으면서 진행했지만 그에 대해 뭐라 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국민들께서 궁금해 하실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항간에 이야기가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초능력자’에 관한 것일 겁니다.”


일부 학생들이 오오, 하는 소리를 낸 것을 제외하면 다들 다음 내용에 집중하며 숨을 죽였다.


“우리 정부는 참사가 일어난 그날부터 이른바 ‘초능력자’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들과 접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들 중 많은 분들이 정체를 숨기고 사라졌지만, 다행히 몇 분이 도움을 주셔서 현황을 파악하는 데 큰 성과가 있었습니다.”


정화자 한 사람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으니 여러 명의 말을 교차검증하고 진짜 정화자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테스트도 거쳤을 것이다. 그러니 공식발표까지 오래 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일주일 만에 공표하는 건 굉장히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정화자라 밝힌 그분들은 우로보로스 시스템에 의해 많은 정보를 얻었고, 그 정보를 우리 정부와 공유하길 선뜻 수락하였습니다. 우로보로스 시스템이란 전 세계인에게 위상충돌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보냈던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정화자 분들은 지속적으로 우로보로스와의 교신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로보로스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세계와 충돌에 균열이 발생했고, 그로인해 다른 차원의 괴물들이 이쪽으로 건너온 것이라고 합니다. 충돌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며, 앞으로 계속해서 균열이 발생할 겁니다.”


습격이 이제 시작이라는 발표에 카메라 셔터가 요란하게 터졌다.


“저는 대통령이자 국군통수권자로서 국민 여러분의 일상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국전쟁 이후로 유례없는 국가적 위기입니다. 민, 관, 군이 힘을 합쳐 이 위기를 극복하기를 고대합니다. 특히, 정화자 분들을 대상으로 한 관계부서를 신설하기로 하였습니다. 정화자전담위원회로 명명한 이 부서는 정화자를 지원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입니다. 많은 정화자분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TV가 꺼지자 학교 전체가 들썩였다.


“우와아! 초능력자가 진짜래!”

“초능력자가 아니고 정화자라잖아, 멍청아. 근데 그게 뭔 뜻이지?”

“나도 초능력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강철의 연금술사처럼 손가락 딱 튕기면 불 나가는 그런 거.”

“미쳤냐? 지금 그런 거 있어봤자 괴물이랑 싸우는 신세야. 군인들 앞에서 고기방패 서주는 거라고!”

“아, 망했다. 왜 하필 군대 다녀오기 전에 이딴 일이 생기는 건데! 복무기간 늘어나는 거 아냐?”

“균열이 어디에 생기는지 알 수 있는 방법 같은 거 없나? 집 앞에 생기면 군대 오기도 전에 죽는 거잖아!”


정화자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자 많은 아이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외에도 전 국토가 언제어디든 전쟁터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나 훗날 지게 될 병역에 대한 걱정 등 다양한 반응이 표출되었다.

그러나 반응은 제각각이어도 마음속에 품은 생각 하나 만큼은 모두가 동일했다.

세상이 격변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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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SNL - 33 19.01.18 192 3 14쪽
33 SNL - 32 19.01.16 215 4 17쪽
32 SNL - 31 19.01.14 236 5 16쪽
31 SNL - 30 19.01.12 239 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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