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합작
33화.
러셀총독이 다녀간지 며칠 지나지 않아 라이올라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라이올라님. 이렇듯 다시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를 놀리는 건가? 대자보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면서?”
내가 붙인 대자보 때문에 그간 꽤나 고생했는지 라이올라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핫. 그러셨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권했던 대로 피해보상금 요구를 순순히 철회하셨으면 그 고생은 안하셨을것 아닙니까?"
“더 이상 긴 말 하지 않겠네. 자네가 얘기했던 조건을 수용하겠네. 그러니 대자보를 떼어주게.”
내가 말했던 조건. 바로 피해보상금의 지분요구 철회였다.
그의 제안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도록 하지요.”
내가 순순히 승낙하자 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군. 러셀총독을 통해 중재를 부탁했을때는 거절을 하고 내가 와야만 한다기에 오긴 왔네만. 이렇듯 쉽게 대자보를 뗀다고 할줄은 몰랐구만.혹시 내게 원하는 것이라도 있는가?"
그런 사소한 부분에서 내 의도를 캐치해낸걸 보면 역시나 녹록치 않은 인사였다.
하긴 이정도 눈치는 있으니 이곳 상인조합의 조합장이 되었겠지.
그의 말대로 나는 그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새로운 제안이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는 이번에 라이올라님과 얼굴을 붉히긴 했지만 상인조합과 반목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기왕이면 상생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안?”
라이올라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 말은 진심이었다.
160만 골드 청구서를 봤을 때는 다 엎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확실한 적대세력인 레이첼이 건재한만큼 굳이 적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예. 제안입니다. 저와 라이올라님 모두 큰 이문을 거둘 수 있는 제안이지요. 물론 라이올라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거절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저를 찾아오신만큼 피해보상금 청구만 철회해주신다면 대자보는 떼어드리도록 하지요.”
말을 마친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차피 상계란 곳이 이문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 아닌가. 그렇기에 적절한 이문만 제공한다면 그도 내 제안에 안따를 이유는 없었다.
“큰 이문을 얻을 수 있는 제안이라. 자세히 말해보도록 하게. 납득할만한 제안이라면 받아들이겠네.”
“우선 한가지 묻도록 하지요. 라이올라님이 생각하시는 가장 큰 이문이 남는 업종이 무엇입니까?”
내 물음에 잠시 생각한 라이올라가 답했다.
“아무래도 역시 돈놀이가 아니겠나? 고리대금업만큼 큰 이문을 남기는 업종은 없지.”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돈으로 돈을 버는 돈놀이 말입니다.”
그러자 라이올라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럼 고리대금업을 하자 이건가?”
“제가 계획한 사업이 돈놀이는 맞지만 고리대금업은 아닙니다.”
그러자 라이올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사업을 하자는건가?”
라이올라는 아직 내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지는 못한듯 했다.
잠시 숨을 고른 내가 대답했다.
“바로 은행사업입니다.”
“은행사업? 은행이라면 상인조합에도 있다네. 상인들에게 대출을 해주기도 하고 상인들의 돈을 보관하기도 하지. 혹은 각 나라의 금화들을 환전하는 환전소 역할도 하고 말이야.”
라이올라는 은행설립이라는 내 제안이 어째서 큰 이문이 남는다는 것인지 의아해 하였다.
확실히 은행은 예전부터 있어왔기에 새로울 제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은행의 기능이 있었다.
“물론 그렇지요. 상인조합에도 은행이 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거기에 한가지를 더 추가하고자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배제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라이올라님께서 저와의 합작을 승낙하신다면 우선 제가 라이올라님과 상생을 원한다는 증거로 라파엘 상단이 상인조합에 가입할 것입니다.”
내가 상인조합 가입이라는 수를 쓰자 그는 고민했다.
상인조합에 가입한다는 건 내 잉여기금을 상인조합에 있는 은행에 예탁하여 현금유동성을 더욱 원할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내게 물었다.
“그럼 일단 자네와 내가 어떤식으로 합작을 할지 세부적인 계획은 이야기 해줄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일단 새로 설립할 은행은 저와 라이올라님을 주축 투자자로 하고 상인조합에서 투자자를 모집하여 출자금에 따라 지분을 분배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상인조합내에 있는 작은 은행창구는 폐기하고 광장근처에 큰 건물을 매입하여 새로 설립하게 될 은행의 본점으로 삼을겁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다. 기왕지사 은행을 시작할 것이라면 건물도 상인조합 건물에 딸려있는 창구가 아니라 새로운 건물을 은행으로 쓰는게 나았다.
“나와 자네가 주축이라... 그렇다면 운영은 누가 하고?”
“일단 운영자체는 저를 믿고 맡겨주십시오. 제 입으로 이런말 하긴 뭐 하지만 100일전까지만 해도 저는 자본금이 하나도 없는 일반 시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200만골드의 자산을 가지게 되었지요.”
여러 행운적인 요소가 겹치긴 했어도 이 세계에 와서 내가 행한 일들은 모두 적절하였고 결과적으로 무일푼에서 시작한 내게 큰 부를 안겨주었다.
딱히 거짓말 하는 것도 아니기에 나는 당당히 내가 그려온 족적을 그에게 말할수 있었다.
잠시 고민한 그가 말했다.
“좋네.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라이올라도 내가 짧은 시간내에 큰 부를 이루었다는 것을 인정했는지 내가 운영을 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내가 운영을 해서 은행이 더욱 크게 된다면 그게 나았을테니 말이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쳤지만 내 뜻대로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자 나는 기쁜 마음에 웃음이 절로나왔다.
“하하핫. 실망시켜드릴일은 없을 겁니다. 일단 합작 은행설립 계약서만 쓰시면 세부적인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해관계가 일치했으니 계약에 걸림돌은 없었다.
계약서를 쓴 뒤 라이올라가 물었다.
“자 이제 합작을 하기로 했으니 자네의 계획을 말해주게.”
“저는 은행을 통해 대출업을 할 생각입니다. 고리대금업과 개념자체는 같습니다. 다만 저리로 대출해줄 겁니다.”
저리대출이라는 말에 라이올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리대출이라면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닐세. 우선 고리대금에 허덕이는 자들이 닥치는 대로 대출을 하고자 할 텐데 우리 자금은 순식간에 바닥나버릴걸세.”
“자금이 없다면 만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라이올라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무슨 수로말인가? 저리대출로 얻는 이자야 고만고만 할테고. 교역으로 번 돈을 다 쏟아붙자 그건가? 그걸로도 부족할걸세. 은행업에서 자본금이 떨어지는 건 파산이란 말이네!”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자금을 만든다는 말은 즉, 기존에 시중에서 통용되고 있는 화폐가 아닌 새로운 화폐를 발행한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화폐? 그게 무슨 뜻인가?”
설명을 요구하는 그에게 나는 우리가 방금전에 서명을 한 계약서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바로 산출량이 한정된 금으로 주조하는 금화 대신 종이로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화폐인 지폐입니다.”
지폐발행.
이것이 바로 내가 준비한 히든카드였다. 지폐발행을 통해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가 많아진다면 지금 성행하는 고리대금업도 그 기세가 꺾일 것이었다. 유통되는 금화의 부족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이 고리대금업이 성행하는 근본적인 이유였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이렇듯 합작까지 해가면서 은행업을 하고자 하는건 고리대금업에 신음하는 시민들을 위한 대승적인 결단같은건 절대 아니다.
바로 주적이라 할 수 있는 제로스 상단의 주 수입원이 고리대금업이기에 그들의 자금줄을 끊어놓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전에 눈 앞의 인물을 납득시켜야 할테지만 말이다.
“자네 말대로 그 종이로 된 돈을 찍어낸다면 확실히 금화보다는 시중에 많이 유통할 수 있겠지.하지만 어떤 바보가 그 종이쪼가리를 금화 대신이라고 여기겠는가? 사용처가 없는 화폐는 쓰레기와 동일하지. 현재 통용되는 화폐인 은화가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법적 금은비가가 깨진 작금의 상황에서 은화는 사실상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거래자체를 하지 않는다. 바보가 아니라면 가치가 계속 떨어지는 은화를 받을리가 없었으니까.
라이올라는 그 사실을 근거로 들어 지폐의 실용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내게 그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이 없다면 이렇듯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터였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지폐를 실제 화폐와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 되지 않습니까? 더불어서 이 지폐를 우리 은행에 가져오면 동일한 가치의 금으로 태환해준다는 것을 보증해주는 겁니다.”
태환지폐.
즉, 금으로 교환이 가능한 지폐를 뜻했다. 지폐가 금과의 태환이 가능하다면 은행이 파산하지 않는 한은 금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고 하면 저마다 금함유량이 달라 가치가 제각각인 금화보다는 일정량의 금과 태환이 가능한 이 지폐가 실물경제에서 유통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었다.
화폐라는 건 결국 거래에서 편리할수록 많이 쓰이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지폐라는 새로운 화폐는 언젠가 금화를 대체하게 될지 몰랐다.
물론 그것을 위해선 넘어야할 산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지폐의 사용처라고 해봐야 상인조합 휘하 상점들 뿐일텐데 그렇게 사용처가 한정적이라면 사람들이 그 지폐를 화폐로서 받아들이겠나?”
라이올라의 우려섞인 말에 나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사용처가 한정적이라면 늘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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