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이면계약
바람잡이가 있었던거다.
형의 학교동기 살라딘이라는 녀석이 바로 제로스상단의 끄나풀역할을 하며 형에게 상인이 되라고 바람을 넣은 것이 분명했다. 말하자면 고급 인력을 후려쳐서 평생 부려먹기 위한 설계였던 것이다.
제로스 상단에게 돈을 빌린 뒤에 일은 안들어도 뻔히 보였다.
형이 구매하는 품목마다 같은 품목을 판매하는 제로스 상단 소유의 점포에서 덤핑으로 저렴한 값에 판매했을테니 형의 상점이 장사가 될리가 없지.
나는 대화를 하는 내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떤 형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어깨 펴. 형. 형은 잘못한거 없어. 그저 속은것 뿐이야. 일단 나가자 형.”
“그럴 수가 없어. 이곳에서 대출금을 모두 상환할때까지 일을 하기로 근로계약을 맺었어.”
나는 형에게 내가 상인이 되어 큰 돈을 벌었고 레이첼과의 협상으로 근로계약서를 파기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정,정말이냐 라파엘? 내 앞으로 책정된 대출금은 16875골드나 되는데...”
“이번에 교역을 해서 돈을 벌었거든. 그리고 형 대출금은 현금대신 스피노쟈의 점유율 5%를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변제한거야. 아직 자본금 여유는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 5%의 점유율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이 잠재적으로 20만 골드정도의 값어치는 되기에 속은 쓰렸지만 돈보다는 형이 더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아참. 그리고 잊었는데 이거 받아.”
나는 철제무기와 동봉된 엄마의 편지를 형에게 건냈다.
“이 편지는...”
“엄마가 보내는 안부편지야. 형이 연락이 없으니까 엄마가 형 소식좀 알아보라고 하더라. 그리고 이것도 받아.”
나는 형에게 1000골드를 건내며 말했다.
“우선 이걸로 학자금이랑 생활비로 써. 나중에 더 줄테니까.”
그러자 형이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미안하다. 라파엘. 그리고 고맙다.”
“고마우면 졸업하고 내 일좀 도와줘. 상단을 확장하면 사람이 부족할테니까.”
“물론이다. 졸업하고 연락하마.”
기사학교에가서 형이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 까지 본 뒤에야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1층 홀에서 맥주를 마시던 쟈넷에게 합류했다. 그녀가 물었다.
“형은 찾았어요?”
“찾긴 찾았지 아주 비싼 값을 치르고.”
잠재이익으로 보면 거의 수십만골드를 손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철제무기 교역으로 초반 자본금을 마련하려고 했는데 스피노쟈의 상업점유율을 양도함으로써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버린 것이다.
그런 일련의 사정들을 쟈넷에게 말하자 쟈넷이 내 얼굴을 잠시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런 일을 겪은 것 치고는 멀쩡해 보이는데요.”
“상대도 그만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으니 그 보상을 얻은 것 뿐이다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쟈넷이 물었다.
“뭐, 별거 아냐. 마음가짐이 약간 달라졌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전략의 수정이라고 할수있다.
왠만하면 나는 거래를 할때 서로간에 이득이 되는 윈윈게임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기왕이면 더불어 잘 먹고 잘사는게 좋지 않은가.
하지만 레이첼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날뛰는 년들한테는 신사적인 윈윈게임보다는 갈때까지 가는 제로썸 게임이 제격이다.
이제 시작이다. 나와 레이첼 둘 중 지는 쪽은 모든 것을 잃는 게임이 말이다.
***
나는 하루이틀 정도 두문불출하며 숙소에 있었다. 술도 마시지 않고 하루 세번 가져다 주는 식사조차 방에서 마셨다.
“도련님... 괜찮으신가요?”
문 밖에서 지크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간의 사정을 듣고 나를 걱정하여 찾아오것이었다. 지크 뿐만이 아니다. 한슨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마. 의기소침하거나 그런건 아니니까.”
내가 방에만 있던 건 다름 아니라 앞으로의 전략수립을 위해서였다. 철제무기라는 교역품목은 더 이상 구매할 수 없는 만큼 교역품목을 어떤 것으로 정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고민끝에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레이첼을 엿먹이면서 떼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그러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나 대신 전면에 나서줄 친구가 필요했다.
마침 그런 일에 적격인 사람이 내 동료중에 한명이 있다.
“지크! 아직 있어?”
“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케빈을 불러와.”
이윽고 내 방에 온 케빈에게 무언가 지시를 한 나는 지크와 함께 오랜만에 외출에 나섰다.
목적지는 교역상점가. 갈때 교역품을 실은 짐마차까지 싹 가지고 갔다. 어차피 스피노쟈의 점유율을 모두 잃었으니 조금이라도 현금화 시킬 생각이었다. 덤으로 앞으로 계획을 위한 밑밥도 하나 깔고 말이다.
***
“무, 무슨일로 부르셨습니까. 상단주.”
잔뜩 긴장한 표정의 체이스. 후후후. 이미 일련의 상황들을 보아 그는 어느정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챈듯 했다.
외출할때 짐마차를 모두 끌고 나갔으니 그도 내가 교역품을 되팔기 위해 갔다는 것을 알았을거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비자금을 조성한 걸 들킬게 뻔하기에 도망쳐야 했지만 외출하기 전 케빈에게 체이스를 단단히 감시하라고 일러두었기에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렇듯 나와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흐음. 그게말이야. 체이스. 내가 스피노쟈의 상업점유율 5%양도에 해버려서 굳이 스피노쟈에 갈 필요가 없어졌거든? 그래서 브랜디와 유락을 처분하러 중개상에 갔었는데 말야...”
이렇게 말한 나는 체이스가 내게 주었던 위조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산이 조금 이상한거야. 분명 체이스 당신은 브랜디는 개당수가 8골드, 유락은 개당수가 6골드라고 했었지? 그런데 중개상은 브랜디는 개당수가 7골드에 유락은 개당수가 5골드에 판매를 했다는 거야. 그거 참 이상하지? 분명 이 계약서에는 개당수가 8골드랑 6골드라고 적혀있는데 말이야. 그럼 도대체 500골드라는 금액은 어디로 증발했을까?”
내 말에 체이스의 표정이 일순간 당황스러움으로 가득찼다. 그로서는 보물상자를 털려서 가뜩이나 심란한 판국에 분식회계까지 들통이 났으니 설상가상인 셈이었다.
체이스는 진땀을 흘리며 변명을 했다.
“그...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계약서대로 구매하고 금액을 지불했을 뿐이라서...”
“그럼. 그럼. 나는 당연히 체이스 당신을 믿지. 그럼 이걸 판매한 중개상이 위조계약서를 준거구만?”
그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예? 위조계약서요?”
“그렇지. 당신이 아니라면 중개상이 위조계약서를 만든게 분명하지. 후후후. 감히 나를 상대로 이런 짓을 하다니. 이 계약서를 들고 총독부에 들고가서 고발해야 겠어. 계약서를 위조한 중죄인을 엄벌에 쳐해달라고 말이야.”
내 말에 체이스의 얼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흑빛으로 변했다.
이 무역왕의 세계에서 계약은 신성했다. 계약을 어긴다 하여도 마치 신이 개입한 것처럼 최악의 형태로 이행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관인 만큼 계약서를 위조하는 행위는 중죄의 처분이 내려졌다.
체이스가 갑자기 내 앞에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상단주님. 제가 갑자기 욕심이 나서... 이번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그의 말에 나는 씨익 웃었다. 드디어 내가 원하던 말이 나왔다.
“그럼. 그럼. 사람이 욕심이 날수도 있지. 자네와 정도 들었으니 눈감아 줘야지.”
“정말이십니까?”
체이스는 재차 내게 확인하듯 물었다. 그래. 눈감아 줘야지. 단 그냥은 안된다.
“물론이야. 단, 당신이 나를 위해 한가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나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 이건...”
“읽어봐. 당신과 내가 체결할 계약서이니까.”
내 말에 한차례 침을 삼킨 그가 계약서를 읽었다.
본 계약서는 갑을 라파엘 시리우스. 을을 체이스로 지칭한다.
1. 계약서 작성과 동시에 을(체이스)은 본인 이름의 상단을 창설한다.
2. 을은 상단 창설 즉시 상단의 운영권을 갑에게 양도한다.
3. 을(체이스)은 을(체이스)이 창설한 상단이 올린 이익금의 90%를 갑(라파엘 시리우스)에게 지불한다.
4. 을(체이스)은 상단운영으로 발생한 모든 법적책임을 본인이 진다.
5. 법적인 문제가 생기는 즉시 을은 갑에게 을이 창설한 상단의 모든 자산을 갑이 창설한 상단에게 양도한다.
6. 위 계약 내용은 계약 당사자를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는다.
계약서 내용을 요약하면 체이스의 이름으로 된 차명상단을 내가 운영하며 모든 법적책임은 체이스에게 떠넘기는 게 골자였다.
“이...이런 말도 안되는 계약이...”
“말이 안되는건 당신이 한 계약서위조고. 당신은 선택만 하면 돼. 위조계약서를 쓴 죄값을 치르던가 아니면 이 계약서에 서명을 하던가.”
그가 불안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법적책임을 모두 제가 진다는 건... 혹시 불법적인 일을 할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꼭 그런건 아니고. 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고만 말해둘게.”
체이스가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계약서 위조와 이면계약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는게 리스크가 더 적은지를 계산하느라 바쁠테지.
하지만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엔 없을거다. 내가 건낸 선택지는 채찍 뿐 아니라 당근도 함께 있었으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고 고민끝에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정말... 10%의 이익금은 제게 주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나는 계약서의 내용을준수하는 준법시민이라고. 노 게인 노 페인이라는 말이 있지? 리스크를 감수하는 만큼 짭짤한 이득이 있을거라는 건 내가 장담할게. 그런 유망한 상단의 이익금의 10%가 바로 체이스 당신 것이 된다고. 후후후. 잘 생각해봐.”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