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협상
내게 관심이 있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거 위험한데... 레이첼과의 만남을 빨리 끝내려고 고민하던 나는 문득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올줄 어떻게 알고 기다리고 계셨던 건지요?”
“호호호. 여자의 직감이랄까요. 이것도 인연인데 차라도 한잔 할까요?”
인연은 무슨 인연이야. 이년아.
위기감이 들었다. 지금 형을 찾는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레이첼의 이목을 덜 끌고 헤어져야만 했다.
나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저도 그러고야 싶지만 제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무래도 티타임은 미뤄야 될듯 싶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호호호. 그거 아쉽네요. 라파엘님과의 티타임이 무척 기대되었는데... 그래도 실망하지 말아요. 라파엘님과는 조만간 다시 만날것 같은 예감이 드니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불길해졌다. 이년이 자꾸 밑밥을 까네.
나를 술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도 그렇고 다시 만날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는 말도 그랬다.
아무래도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그, 그렇습니까? 하핫. 저도 레이첼양 같은 미인과의 티타임은 지금처럼 부득이한 상황만 아니라면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그럼 저 먼저 이만 가볼게요. 호호. 다음 번엔 티타임을 꼭 가졌으면 좋겠네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먼저 몸을 돌려 술집을 나갔다.
티타임은 개뿔. 절대 그럴일 없을거다. 이 년아. 당분간은 제로스상단 본부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을 생각이니까.
하지만 그런 내 다짐과는 달리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로스 상단 본부를 제발로 찾아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레이첼은 제로스 상단본부로 찾아온 나를 반겼다.
“어머나? 급한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라파엘님? 호호호. 저를 만나기 위해 직접 이 제로스상단 본부로 오시다니... 역시나 라파엘님도 저와의 티타임이 기대되셨군요?”
하아. 이 망할년. 지가 판을 다 짜놓고 모르는척 하는거 보소. 진짜 여우일세. 후우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내가 절대 고개도 돌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제로스 상단으로 직접 찾아간 이유는 바로 채무때문이다.
“하핫. 알아보니 그 급한일이 바로 제로스 상단과 관계된 일이었지 뭡니까. 그... 채무자중에 혹시 카리안 시리우스라고 있지 않나요?”
그 채무는 바로 형인 카리안 시리우스가 진 채무였다. 그리고 그 채권자가 바로 이 망할년인 레이첼 제로스였던 것이다!
술집에서 200골드를 지불하고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현재 내 형은 제로스 상단에서 대출받은 대출금을 갚지 못하여 제로스상단에 소환되었고 채무변제를 위해 이틀 전부터 이곳 제로스 상단에서 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아. 어쩌자고 형은 이 사갈같은 년한테 걸려든건지. 제로스상단은 교역상단의 탈을 썼지만 사실 주 수입원이 고리대금업이다. 이미 이곳에서 채무변제를 위해 일한다는 점에서 오늘 좋은 꼴은 못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아. 맞아요. 이틀 전부터 카리안님이 우리 제로스상단의 식구가 되었죠. 어쩐지 라파엘님이 낯설지 않은게 그 때문이었군요.”
내가 철제무기 교역을 한 시점과 형이 이곳에서 일을 시작하게된 시점이 공교롭게 일치하는 걸 보면 우연은 아닐거다.
알고도 당하는 느낌이지만 아쉬운건 나였기에 나는 본론을 꺼냈다.
“네 그렇습니다. 저... 그런데 형의 채무금액이 도대체 얼마인지요.”
“호호호. 라파엘님께서 대신 변제하실 생각이시군요. 정말이지 이 레이첼은 형제간의 우애에 감탄했답니다. 그럼. 말씀드리지요. 우선 카리안님께서는 3년전 저희 제로스상단에서 연리 50%로 5000골드를 대출을 받으셨어요.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대출금은 총 16875골드가 되었답니다.”
하아. 망할년. 연리 50%가 단리도 아니고 복리였냐?!
골이 아파온다. 현실적으로 16875골드라는 돈은 지금 당장 변제할 수 없을만큼 큰 금액이었다. 그래도 본격적으로 해상교역을 시작한 뒤라면 충분히 변제 가능한 금액이기도 했다. 나는 화를 억누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군요... 그럼 그 금액만 변제하면 되는 건가요?”
“이틀전까지는 그랬지만 지금은 새로운 계약을 맺어버려서 그게 힘드네요.”
망할... 설마 벌써 계약서를 쓴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
“새로운 계약이라니요?”
“대출금이 너무 커진 관계로 카리안님은 대출금의 이자를 동결하는 조건으로 우리 제로스상단과 근로계약을 했답니다. 제로스상단에서 매달 75골드의 월급을 수령하면서 일을 하고 월급에서 50골드를 빼 대출금을 공제하기로 했지요. 호호호. 이건 카리안님의 근로계약서랍니다.”
월급에서 50골드씩 공제하면 연간 공제금액이 600골드다. 그럼 대략 20년 이상을 이곳 상단에서 굴러야 한다는 말이었다.
근로계약서는 개뿔. 사실상 합법적인 노예계약서였다.
어쨌거나 레이첼이 건낸 근로계약서를 검토하던 나는 결국 우려한 대로 계약조항 하나가 빠져있음을 알수 있었다.
“으음... 체무변제시에 근로계약이 종료된다는 조항이 빠져있군요.”
그 조항이 없다면 내가 나중에 체무변제를 하여 형의 근로계약을 종료하고 싶어도 제로스 상단쪽에서 거부하면 근로계약을 파기 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악질적인 사기계약이었다.
“어머나. 그런가요? 담당자가 모르고 빠뜨렸나보네요. 하지만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면 그대로 이행해야겠죠. 계약은 신성한 법이니까요.”
이 무역왕의 세계관에서 계약이란 절대로 어길수 없는 신성한 것이었다. 만약 계약자가 계약을 어기고자 한다면 계약자가 원하지 않는 최악의 형태로 계약이 이행된다.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일단 계약서가 작성된 이상 이행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말은 일단 계약서를 쓴 이상 계약서를 파기하지 않으면 계약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녀가 짜놓은 그림을 보니 대충 내게 어떤걸 요구할지 짐작이 갔다. 계약서에 써 있는대로 계약을 이행하겠다는 그녀의 말은 액면 그대로 카리안형을 죽을때까지 굴리겠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을 협상카드로 삼아 나를 압박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형의 남은 인생이 협상카드로 나온 이상 주도권은 내게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허우적 거리다가 그녀가 의도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무역왕의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무력감이었다.
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후우. 까놓고 말하죠. 카리안 형의 근로계약을 파기하고 싶습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레이첼양.”
“어머 라파엘님. 당신처럼 멋진분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면 저 설렌다구요. 후훗. 그럼 염치불구하고 제 요구조건을 말해볼까요?”
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말했다.
“라파엘님과 안면도 있으니 저도 크게 욕심부릴 생각은 없답니다. 제가 원하는 조건은 단 한가지 라파엘님이 가진 스피노쟈의 점유율 5%를 제게 양도하는 것 뿐이에요.”
그녀의 요구조건은 예상답안 그대로였다. 후후후. 망할년 그럴 줄 알았지.
제로스 상단은 스피노쟈의 철제공방을 지을만큼 철제무기 교역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그런 제롯노스 상단에게 스피노쟈에 5%의 상업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내 존재는 무척이나 거슬렸을거다.
왜냐하면 100% 상업점유율을 가진 도시에서는 교역품 구매시 10% 할인된 금액으로 구매가 가능하며 판매시에는 10% 추가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게헨나와의 전쟁때문에 철제무기의 수요가 급증하여 날개돋힌듯 팔려나가는 만큼 10%의 차익은 어마어마 했을테니 말이다.
이런 레이첼의 속셈을 꽤뚫고 있는 나이지만 형의 남은 인생이 저당잡힌 만큼 협상의 남은 수순은 외길뿐이었다.
“후우.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계약서를 쓰지요.”
스피노쟈 상업점유율 양도 계약서를 쓰고 난 뒤 레이첼에게 받은 형의 근로계약서를 파기했다.
후우. 어떻게 얻은 점유율인데... 이걸 허무하게 넘겨주려다 보니 화가나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레이첼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호호. 카리안님은 2층에 있는 용병대기실에 계실거에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레이첼양.”
“저도 라파엘님과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을게요.”
이번에는 내 완패였다. 레이첼은 자신이 짜놓은 판에 놀아나는 나를 보며 비웃었겠지. 하지만 말이다. 너무 기뻐하지 말라고 나는 조만간 다시 돌아올거다. 그리고 다음에 돌아올땐 레이첼 네가 내가 짠 판에서 협상을 하게될거다.
***
“라, 라파엘? 네가 여긴 어떻게?”
내가 용병대기실에 들어가자 카리안형이 나를 알아보곤 놀란 얼굴을 했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많이 상한듯 보였다. 그 모습이 안쓰럽기는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좋은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내가 여기있는게 놀라워? 난 형이 여기있는게 더 놀라운데.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후우. 너를 볼 면목이 없다. 사실은...”
그렇게 형이 저간의 사정을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형의 말을 요약하면 이랬다. 기사학교 등록금이 증가해서 집에서 보낸 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
그때문에 돈을 벌자는 생각으로 총독부에서 무담보 대출을 받아 상계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어떤 전략도 없이 무턱대고 상계에 발을 들였으니 이익을 볼리가 만무.
설상가상으로 정부기관인 총독부의 채무를 해결하지 못하면 기사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기 때문에 결국 고율의 이자로 제로스상단에서 빌렸다는 것이다.
형의 설명을 듣던 나는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그런데 형. 우리가문이 상인이라고 해도 형은 상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런데 어떻게 점포를 운영할 생각을 다했어?”
“후우. 사실 내 기사학교 동기인 살라딘이 학자금이 모자라면 상점을 개설해서 돈을 보태면 되지 않냐고 하더라고. 자기도 알브힘에 상점을 개설하고 가끔씩 관리정도만 해도 학자금 정도는 충분히 대고도 남는다고 말이다.”
형의 말을 듣고나니 어째서 고지식한 형이 상계에 뛰어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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