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4 장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신의 민서가 두려움에 떨며 주저앉는다. 그녀는 벌벌 떨며 뒤로 물러난다. 바닥의 날카로운 돌들이 그녀의 피부를 찢는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다. 마음이 급했다. 그녀를 향해서 다가서는 남자를 피해야만 했다. 그 남자는 복부에 세 개의 칼날이 박혀 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왔다. 진득한 피가 남자의 몸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 피는 바닥을 적시고 민서를 향해 다가선다.
“아, 안 돼!”
그녀가 거부하지만 남자의 발걸음은 무겁게 한걸음씩 다가선다.
저벅 저벅
다가서던 남자가 손짓한다. 그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일어 그녀의 몸을 휘감는다.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남자의 손짓과 기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검은 기운이 그녀의 목을 휘감는다. 숨을 쉬기도 힘들다. 그녀의 몸은 의지와는 다르게 허공으로 들려진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남자가 점점 더 다가선다.
“큭, 제, 제발…….”
민서가 목에 감긴 검은 기운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애원한다. 하지만 다가서는 남자는 절대 동요하지 않는다. 거대한 체격을 지닌 남자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차갑게 번들거리는 검은 칼날이 그녀의 피부에 닿는다.
“…….”
민서의 입이 벌어진다.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차가운 금속 재질의 물체가 그녀의 몸을 파고들자 모든 의식이 소멸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현실에서 한번, 그리고 의식 속에서 한번 죽음을 맞고 있다. 죽음의 고통과 그 순간의 회한을 느껴보지 않은 자들은 절대 알 수 없었다. 죽은 자가 다시 한 번 죽음을 맞는 지옥의 고통을 현세에서 느끼고 있었다.
민서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느껴지던 고통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두려움에 힘차게 요동치던 심장 또한 점점 그 속도를 늦춰간다. 다시 한 번 죽음과 인사를 나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뱃속을 차갑게 채우고 있던 칼날의 느낌이 달랐다.
묘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왜?
민서의 눈동자에 아래에서 올라오는 금빛 빛줄기가 가득 찬다. 본적이 있고 친근감이 느껴지는 기운이다. 하지만 그녀의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적이다. 죽여…라…….]
* * *
진월은 전신에 흘러내린 땀으로 목욕을 한 상태다. 민서의 앞에서 약간 물러나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다. 국장은 반대편에서 민서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움찔!
민서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국장은 얼굴을 보고 있어 보지 못한다.
“음!”
국장이 비음을 내뱉는다. 민서의 눈꺼풀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월 또한 국장의 비음에 고개를 돌린다.
번쩍! 민서의 눈이 갑자기 뜨인다. 그런데 그 모습이 불길했다. 눈동자에는 붉은 홍염의 불길이 피어올라있다. 그녀의 눈동자가 향해 있는 곳은 바로 진월이다. 좁은 공간이기는 하지만 마치 진월만이 있는 것처럼 그를 노려보고 있다.
진월과 국장의 시선이 교차한다. 국장이 진월을 향해 소리친다.
“무조건 받아내라!”
“…….”
진월이 답을 하기도 전에 민서의 몸이 허공에 떠오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에 박혀있던 모든 침들이 마치 비수라도 되는 것처럼 진월을 향해 쏘아져 나간다.
침들이 순식간에 진월의 코앞까지 다가온다. 하지만 진월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침이 금빛으로 반짝인다. 진월의 금빛 영력이 아직까지 기운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뚝!
모든 침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박힌 것처럼 허공에 멈춰 선다.
진월과의 거리는 불과 손가락 하나 정도나 된다. 진월의 시선이 전면의 침에 향해 있다. 그의 고개가 우측으로 돌아간다. 그에 따라 침들도 모두 우측 벽에 박힌다.
파파파팍~
진월의 고개가 원상태로 돌아온 순간, 실내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다.
민서의 환영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변해있었다. 민서 또한 어느새 붉은 원피스를 걸치고 있다. 특이한 점은 금빛의 줄들이 그녀의 몸매라인을 부각시키며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공간 또한 어둡게 변했지만 붉은 빛과 금빛의 불길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불길들은 민서가 발을 디디는 지점 주변으로 더 크게 일어난다.
[죽여라!]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죽어!”
민서가 진월을 향해 소리친다.
진월의 주변으로 불길이 일어난다. 붉지만 금빛도 섞인 불길이다. 순식간에 진월의 전신을 태워버릴 듯 이글이글 타오른다.
징징징!
불길 속에서 세 개의 칼날 또한 만들어진다. 불길이 일어나며 동시다발적으로 행해지는 공격이다. 칼날은 생성되자마자 진월의 복부로 날아든다.
푸푸푹~
현실에서의 모습과 민서의 꿈속에서 재현되었던 모습이 다시 반복된다.
민서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악몽과도 같은 기억을 떨어뜨려내기를 원한다. 똑같은 모습의 반복을 연출하고 이번에는 필히 눈앞의 사내를 제거하겠다는 일념이다. 그녀의 현혹과 환영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펼쳐진다. 그녀의 현혹에 의한 압박이 전개된다. 만약 진월이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이미 그는 절명했을지도 모른다. 불길에 의한 뜨거운 고통과 복부에 박힌 칼날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고통을 입었으니 말이다. 그 외에도 민서의 수준은 인간의 의지를 조정해 스스로 신체 기능을 저하시키게끔 만들 수도 있었다. 실연이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으면서 생체 기능이 저하되는 상황을 아주 빠르게 전개시킨다고 보면 된다. 본인이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호르몬의 분비 촉진을 유도해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진월에게도 똑같은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진월의 인상이 구겨져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복부에 박힌 칼날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뇌가 마음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신체기능을 그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는 진월이기에 느낄 수 있었다.
민서가 진월 가까이 다가선다. 꿈속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녀 스스로 진월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 다시 환영의 불길이 일어난다. 금빛과 붉은 빛이 섞인 불길이다. 불길은 다시 거대한 칼날로 변화한다. 끝을 보겠다는 심산이다.
그녀의 손이 진월의 가슴으로 향한다. 칼날이 심장을 노리고 정확히 파고든다.
그녀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린다. 왜 흘러내리는지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무의식속에서는 계속 부르짖는 목소리가 들린다.
[죽여라!]
진월의 모습이 보인다. 전신에 네 개나 되는 칼날이 박혀 있음에도 그녀를 보는 눈빛에 원망은 없다. 민서가 묻는다.
“왜……?”
많은 것을 함축한 물음이다.
“궁금한가?”
“…….”
진월의 질문에 민서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심장에 칼날이 박힌 사람이 멀쩡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의문은 사라지고 없다.
진월의 눈이 민서의 눈을 응시한다.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마음…….”
진월의 심장에 박힌 칼날을 쥔 민서의 손이 떨린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져 내린다.
칙~ 치익~
환영의 불길이지만 열기를 지니고 있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순식간에 증발한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불길을 본다. 금빛이 섞인 불길은 왠지 낯설지 않았다. 따뜻한 온기도 느껴진다. 그녀의 마음속에 친근함과 더불어 어떤 감정이 떠오르려 한다. 그때!
[죽여라!]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다시 살심을 일으키는 주문 같은 음성이 들려온다.
슬쩍 떨리던 그녀의 손이 진월의 가슴에 박힌 칼날을 꽉 움켜쥔다. 그녀의 손이 베어 피가 나오는 줄도 모르고 잡고 있다. 입술 또한 질끈 깨물고 있다. 뭔가 그녀의 의지를 지배하려 하고 그녀는 그것에 저항하고 있다.
“아아악~!”
민서가 도저히 참기 힘든지 비명을 지른다. 그녀의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을 떨어내고 싶은가 보다. 머리를 잡고 괴로워하는 모습 또한 보인다.
저벅!
진월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다. 민서는 고통 속에서도 진월의 움직임을 느낀다.
민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진다. 현실과 꿈속에서 봤던 장면이 다시 연출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녀는 지금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려는 자와 싸우고 있었다.
“다시는!”
진월의 목소리다. 민서는 깜짝 놀라 다가선 진월을 올려다본다. 움직이려 하지만 움직여지지 않는다. 마치 뭔가에 구속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진월을 죽이라는 명령이 끊임없이 들린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고 싶었다. 늪과 같이 진득한 어둠이 그녀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벗어나려 할수록 그녀는 더 깊이 잠겨들었다.
진월의 몸에 박혀 있던 칼날이 다시 민서의 몸을 꿰뚫는다.
이상했다. 고통은 없었다.
대신 따뜻함이 느껴졌다. 몸의 중심을 꿰뚫고 승천하는 기운도 느껴진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따뜻한 기운이 뇌를 두들긴다. 몸을 꿰뚫은 칼날 속에 포함된 금빛 영력이 민서의 몸을 파헤치며 전진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 잠긴 민서가 하늘을 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금빛 빛줄기가 어둠을 관통한다. 진득한 어둠이 빛줄기에 맞아 소멸하기 시작한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빛줄기처럼 어둠과 민서를 같이 씻어 내린다. 주변은 온통 금빛 빛줄기로 칠해진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꽈악! 그녀의 몸을 옥죄는 강인한 팔이 느껴진다.
어느새 감겼는지 모를 눈이 떠진다. 그녀의 눈앞에는 튼튼한 사내의 가슴 판이 자리하고 있었다.
“……혼자가 되게 하지 않는다고 했다.”
“…….”
민서는 한참 진월을 올려다본다. 너무 꽉 안고 있어 숨이 답답함에도 밀어내지 않는다. 그녀의 부드러운 뺨이 진월의 가슴에 닿는다. 오히려 더 꽉 안아달라는 듯 얌전한 고양이가 되어 있다.
진월의 손이 민서의 등을 쓰다듬는다. 차갑던 민서의 몸이 따뜻해졌다.
따뜻한 살결의 감촉이 좋았을까? 진월의 손은 계속 그렇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좋으냐?” 국장의 질문이다.
“…….”
“좋기도 하겠지.”
“…….”
“여기다 그냥 신방 차려 주리?”
“옷이나 가져다주시지요.”
“신방 차릴 건데 옷이 왜 필요하냐?”
피식피식 웃으며 질문을 던지던 국장이 갑자기 서늘한 한기를 느낀다. 국장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기가 나오는 곳으로 향한다.
“헤헤, 정신은 들었느냐?”
“그 말뜻이 뭔가요? 국!장!님!”
“아니, 별 다른 뜻은 없고. 그동안 네가 제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이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은 미친년처럼 굴었다는 말인가요?”
“그, 그건 절대 아니다.”
“그러면 팀장님이 지금 알몸으로 있는 저를 이렇게 가려주고 있는 것이 뭐가 잘못된 거지요? 오히려 가려주고 있는데 신방 이야기가 왜 나와요?”
민서가 소리를 빽 지른다. 방금 전까지 의식을 잃고 미친 듯 진월을 공격했던 사람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다.
“더구나!”
“더구나?”
“저 이렇게 벗겨놓은 것 국장님이시지요?”
“…….”
국장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맞으니 할 말이 없다.
“직장 내 성폭행이 뭔지 확실히 보여주시네요.”
“…….”
“고소할거예요.”
물에 빠진 놈 살려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다. 국장은 계속 당하고 진월은 피식 웃는다. 그의 품속에는 부드러운 민서가 들어있으니 마냥 행복한 모양이다. 그런 모습을 본 국장이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 후 사라진다.
“옷은 만들어서 가지고 오마.”
“…….”
국장의 센스에 둘은 웃을 수밖에 없다.
* * *
소파에 앉아 있던 회장의 미간이 좁아진다. 뇌리를 띵 하고 울리는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팽팽히 당겨져 있던 현이 끊기는 느낌이었다. 마법사로 치면 패밀리어를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결국 금제의 사슬을 풀어내는 군. 대단한 녀석이야.”
“민서 말씀입니까?” 곁에 있던 전철 부장의 질문이다.
“…….”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 도움이 있었겠지요.”
“그렇기야 했겠지. 그렇다고 해도 대단해. 죽을 수도 있는 모험인데 말이야.”
“완전히 벗어난 겁니까?”
“허허, 글쎄?”
회장은 민서가 금제에서 풀려났음에도 의문을 표하며 웃고 있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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