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2 장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어느 정도 활력을 회복한 그라이아가 투첼을 돌아본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뭔가 교감을 나누는 것 같다. 투첼이 싫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죽어도 굽히기 싫다는 의지의 표현처럼 보인다.
그라이아의 손이 서서히 들린다. 방향은 바로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진월을 향해서다. 하지만 진월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그녀의 몸에서 일렁이는 마력이 손으로 모인다. 아무리 진월이 흑천으로 인해 강해진 상태지만 바로 코앞에서 직격을 당하면 멀쩡할 리 만무했다.
모여진 마력이 빛을 뿜는다. 마력의 색깔은 녹색이었지만 점점 백색광으로 변한다. 마치 투첼이 내뿜는 백염과 같은 모습이다.
쩡!
금속이 갈라지는 기음이 들린다. 그 순간 투첼의 모습이 사라진다. 블링크와 같은 순간이동마법을 쓴 것이 아니다. 기묘하게도 그라이아가 있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허공에 흰색의 선이 그려지는 것은 투첼이 엄청난 속도로 현장을 벗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그라이아가 돌아선다. 그녀의 손앞에서 기음을 토했던 것은 백색의 마법진이었다. 백색의 마법진을 구현할 수 있는 것으로 봤을 때 그녀는 백마녀였다. 백마녀는 원래 악한 족속이 아니다. 흑천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라이아가 살던 곳을 두고 이곳으로 온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라이아의 영창이 순식간에 이어진다.
“저주에 의해 나에게 속한 자, 다시 나의 피와 살이 되어라!”
그라이아의 앞에 놓여 있던 마법진이 꺼지듯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흰빛의 줄기가 향하던 곳에서 기음이 터진다.
쩡쩡쩡쩡!
마법진이 사방의 공간을 막는다.
쾅 콰광~ 굉음이 터진다.
도망가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싸움이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든 투첼은 저주에 의해 그라이아에게 속한 자다. 속한 자가 지배하는 자를 이기기는 정말 어렵다. 정해진 규율의 계를 부술 만큼 강하지 않다면 이루어지기 요원한 소망이다.
마법진이 부서지면 다른 마법진이 다시 만들어진다. 만들어지는 마법진은 그라이아의 힘에 의한 마법진이 아니다. 이미 수천 년 전부터 투첼을 구속해오던 저주의 마법진이다. 그라이아가 제공한 것은 마법진이 구현되는데 필요한 시전 마력일 뿐이다.
마법진을 부수던 투첼의 힘은 점점 감소한다. 마법진의 위력 중 하나가 바로 투첼의 힘과 상극이라는 것도 있다. 힘을 빨아들이는 투첼의 힘을 상쇄시키며 오히려 그의 힘을 흡수하는 마법진이었다. 과거 어떤 현자가 만든 마법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진월이 가진 힘의 원리와 비슷하게 구동되고 있었다.
“크아아아~!”
투첼이 억울하다는 듯 괴성을 토해낸다. 어느 순간 그가 내지르던 팔이 마법진에 박힌다. 마법진이 부서지지 않고 팔을 봉쇄한 것처럼 보인다. 마법진 밖으로 빠져나온 팔 또한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공간으로 전이시켜 버린 것 같다. 좌우의 마법진이 서로의 거리를 좁힌다. 위아래 마법진 또한 서로 거리를 좁힌다. 투첼의 신체가 마법진에 먹히듯 사라진다. 마지막에 사라진 것은 투첼의 입술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 남은 것은 바로 그라이아가 발현했던 백색광의 마력 덩어리뿐이다.
마력 덩어리가 허공을 날아 그라이아의 손으로 들어온다. 그녀가 만들었던 마법진의 문양이 그녀의 손에 그려진다. 잠시 후 마법진의 모양이 일그러지며 투첼의 입술 모양이 만들어진다.
“크아~!”
입술이 된 투첼이 소리를 지르려하자 그라이아가 손을 쥐어버린다.
“되셨나요?”
“현명한 선택이다.”
“글쎄요. 목숨은 구했지만…….”
철컥 철컥!
그라이아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한다. 그녀의 팔목에는 수갑이 채워진다. 특수 수갑으로 양자에너지를 방출하는 수갑이다. 그녀의 목에도 수갑 형태의 목걸이가 채워진다. 똑같은 기능을 하지만 고폭탄이 심어져 있어 강제로 해제하려하면 폭발하도록 만들어진 목걸이다.
그녀는 목숨은 건졌지만 자유를 잃었다.
쉐인이 곁에 나타나며 구속과 제한의 룬어까지 외친다.
“라이도(raidho)의한 에이화즈(eihwaz)로 그대를 구속하니 속박의 멍에를 지리라.”
허공에서 빨간색과 파란색의 빛줄기가 엉키며 밧줄이 된다. 그라이아의 전신 구석구석을 칭칭 감는다. 그라이아 또한 약간은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찡그린다. 쉐인을 바라보는 눈빛 또한 곱지 않았다. 쉐인은 예의 그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다.
“좀 참으세요. 워낙 강한 분이시라…….”
“이런다고 내가…….”
“아아! 알고 있답니다. 완벽한 보호 장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은요. 하지만 시간은 벌 수 있겠지요.”
“…….”
쉐인의 답변에 그라이아는 할 말을 잃는다. 그때 앞에 서 있던 진월이 무릎을 꿇는다.
철퍽!
촤르르륵~ 몸에 입혀져 있던 용린들 또한 순식간에 사라진다.
화아악~ 진월의 신체에서 뜨거운 열기가 방출된다.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열기다. 뜨거운 난로 옆에 있다고 해도 믿게 생겼다. 물이 끓어 수증기가 발생하듯 진월의 몸에서 하얀 증기가 확 솟구친다.
“으음…….”
약한 비음도 흘러나온다. 진월이 본인의 손을 들어 상태를 확인한다. 수증기와 열기가 급속도로 뿜어져 나가며 피부가 오그라든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시 복원이 되는 모습도 보인다. 그만큼 그가 소비한 에너지가 대단했다는 반증이다.
진월이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우둑~ 우두둑~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리까지 들린다. 흑천이 몸을 한번 빌려 쓴 대가가 꽤 컸다. 진월이 현재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이상을 가져다 쓴 결과로 보였다.
쉐인이 홀쭉해진 진월을 보며 묻는다.
“물이라도 드릴까요?”
“됐고…….”
진월은 대답하며 그라이아를 본다. 쉐인은 잘됐다 싶어 용건을 꺼낸다.
“그러면 그라이아는 저희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우리끼리 협약이 그렇잖습니까?”
“예외 없는 법칙은 없지.”
“이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흑천과 약속을 했으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어. 더구나 감당 가능할까?”
“…….”
“등급도 떨어지는 신이라면서?”
“그건 또 언제 듣고.”
“마음 써 준 것 다 들었어. 그건 고마워.”
“헐!”
진월의 갑작스런 마음 표현에 쉐인이 당황한다. 주변의 인물들 모두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진월의 입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말이니 말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양보하도록 해.”
“…….”
쉐인이 진월을 천천히 살핀다. 정말 진월이 맞는지 확인 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쉐인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진월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라이아의 능력으로 봤을 때 그녀의 이지를 제압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아무리 신적인 능력을 지닌 구름을 타는 자 바알이라도 말이다.
진월이 피식 웃는다.
“수긍했으면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뭡니까?”
주지도 않을 거면서 부탁을 한다고 하자 쉐인이 모처럼 찬바람을 일으킨다.
“저번에 갔던 곳에 한 번 더 다녀와 줄 수 있을까?”
“네에?”
쉐인이 기겁을 한다. 눈빛은 즉시 그라이아를 향한다. 지금 본인 보고 그라이아를 그곳에다가 데려다 주라는 말이다.
“풀어주라는 말인가요?”
“설마. 제 고향으로 가면 처벌을 받던가, 죽을 때까지 싸우던가 해야 할 여자야. 그러니 용신족 마을로 가는 것이 좋겠지.”
“받아줄까요?”
“누가 받아줄 거라고 말했나? 거기 가둬두라는 말이지.”
“쓸데도 없는 여자를 받아줄까요?”
“입 아프게 하네. 이미 흑천이 이야기 해뒀다니까 알아서 하겠지. 그러니 해줄 거야? 말거야?”
“허참!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이겁니까?”
“싫어? 싫으면 내가 직접 하고.”
“네. 싫습니다. 직접 하세요.”
“동맹파기!”
“겁 안 납니다.”
저벅! 진월이 한걸음 앞으로 다가선다.
움찔! 쉐인이 슬쩍 놀라며 뒤로 약간 무른다.
진월의 얼굴에는 슬쩍 미소가 떠오른다. 쉐인은 반대로 잘생긴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철컥! 쉐인의 목에 뭔가 채워진다.
“억!”
강희가 능력을 발현해 빠른 속도로 목에 목걸이를 채웠다. 그라이아의 목에 걸린 목걸이와 같은 종류다. 워낙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고 방심하고 있었으니 피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눈앞에는 저승사자 같은 진월이 버티고 있었지 않은가. 모든 정신이 진월에게 집중되어 있을 찰나였다.
“이, 이게 뭡니까?”
“죄인취급!”
“장난하지 마시고요.”
“장난? 동맹파기면 당신들은 죄인이 된다. 저번에도 경고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말 이럴 겁니까?”
“그러면 이러지 않게 하던가?”
“네.”
“무슨 네?”
“하지요. 합니다.”
“왜 굳이 이렇게 해야 말을 듣는 거지?”
“저도 자존심이란 것이 있거든요.”
“밥 먹여 주는 것은 실속이야. 자존심이 아니고.”
“지금은 밥 먹기 싫거든요.”
쉐인도 다시 오기가 발동한다. 풀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견지한다.
진월과 쉐인의 눈싸움 한 판이 벌어진다. 불꽃이라도 튀게 생겼다. 진월이 쉐인을 보며 조용히 뇌까린다.
“마음에 안 들어.”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둘 다 우선 본부에 가둬두지.”
“예!”
대원들의 대답은 우렁찼다. 대원들이 쉐인을 구속하려 하자 쉐인이 그들의 손길을 거부한다.
“이 따위 것…….”
징징징! 삐삐삐삐~
마력에 대한 반응과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린다. 목에 걸린 목걸이의 주변이 붉은 색으로 점등된다. 더 강한 마력이 부여되어 목걸이가 견딜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면 폭발을 하게끔 만들어진 장치다.
진월이 미간을 구기며 한마디 한다.
“그라이아 앞에서 어떻게 될지 시연을 해주려는 의도라면 잘 하고 있는 거야.”
콰앙! 갑자기 굉음이 발생한다.
모두의 시선이 굉음이 들린 곳을 본다. AWC의 다리 하나가 싹둑 잘려나간다. 고강도의 강철로 만들어진 다리가 깨끗하게 잘렸다. 사람의 목이라면 그 흔적도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아무리 강철 같은 육체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진월이 다시 쉐인에게 말을 건넨다.
“계속 해.”
“…….”
“억울해?”
끄덕끄덕!
쉐인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린 애들 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지켜보기가 민망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지켜보던 그라이아는 뒷골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까짓 장난감들이란 생각이 많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지켜본 결과 절대 장난감은 아니었다.
진월이 쉐인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말없이 풀어준다.
딸깍!
쉐인은 목이 괜찮은지 만져보기까지 한다. 그런 쉐인을 보며 진월이 중얼거린다.
“어차피 죽지도 않을 인간이…….”
“그러니 자존심 하나로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까불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냥 해주면 재미없잖아요. 바알님 볼 면목도 없고…….”
“핑계는……. 당신네 쪽이야말로 누가 주(主)고 종(從)인지 구분이 안가.”
“그런가요?”
쉐인이 의문을 표하며 피식 웃는다.
“갔다 오지요. 그 대가는 꼭 받을 겁니다.”
“얼마든지.”
쉐인이 그라이아의 손을 슬쩍 잡는다. 신사가 숙녀에게 춤을 권할 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완전 꾼의 모습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에서 작은 읊조림이 있더니 빛이 번진다. 둘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국장과 진월을 처리하기 위해 파견 나온 군 병력은 지금 벌어진 상황이 어안이 벙벙했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직접 눈으로 봤으니 안 믿을 수도 없었다. 국장은 그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중령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라는 압박을 확실히 넣고 있다.
“봤지?”
“네.”
“쟤만 보내도 너희는 다 끝난다.”
“…….”
더 이상의 어떤 말도 필요 없는 협박이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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