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 장 거래 한 번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백색의 팔과 손들이 땅속에서 뿜어져 나온다. 움직이고 보이는 모든 사물들을 움켜쥔다. 바로 백동의 주박술이다. 조금 더 강화를 했는지 예전에 비해 훨씬 강력해 보인다. 그와 더불어 푸른 전격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전박탄이 되겠다.
퍼져나가던 전격의 그물은 반투명의 검은 에너지 막에 의해 막힌다. 진월이 발현한 검은 영력의 불길이 넓게 펴지면서 막아냈다. 반대쪽도 마찬가지다. 쉐인이 생성한 실드가 전격의 폭풍을 막고 있었다. 그들이 주박술과 전격을 막아내고 있는 동안 전철 부장 일행은 여유롭게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간다.
진월과 쉐인의 능력이라면 주박술과 전격을 파훼하고 나갈 수 있지만 뒤에 있는 팀원들이 문제다. 그저 멍하니 그라이아를 데리고 가는 것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진월 쪽으로 퍼지던 전격의 그물이 변화를 보인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는지 검은 영력의 불길이 전격을 흡수한다. 특성 자체가 음하고 어둠을 상징한다. 어떤 에너지가 되었건 투과하고 스며들며 빨아들일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쉐인 쪽으로 뻗어 있던 전격까지 순식간에 흡수된다. 남은 것은 주박술이다.
콰앙! 진월의 강력한 진각이 바닥을 뒤흔든다.
퍼져 나가는 충격파가 땅에서 솟아나오는 주박술을 부셔버린다.
“에너지 막 해제한 후 주변을 탐색한다.”
진월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자에너지 막이 사라진다. 진월은 블루투스로 창민을 찾는다.
“어디로 사라졌나?”
“여섯 블록 쯤 가다가 갑자기 자취를 감췄습니다.”
“어떻게 사라졌지?”
“아마도 그라이아란 여자의 능력으로 모습을 감춘 것 같습니다.”
“추적시스템에 걸리는 것이 전혀 없나?”
“네. 현재까지는 없습니다.”
“알았다.”
주변으로 소산했던 팀원들의 연락이 하나씩 들어온다. 물론 보고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보고가 일관되게 들어온다. 그때 쉐인이 슬쩍 옆으로 다가왔다.
“찾았답니까?”
“…….” 진월의 고개가 가로저어진다.
“쩝! 그 자들이 방해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진월이 쉐인을 지긋이 바라본다.
“확실한가?”
“뭐가요?”
“장난할 기분 아닙니다.” 갑자기 격식을 갖춘 높임말이다.
“…….” 쉐인 또한 높임에 당황한다.
“저들이 데려가게 놓아두면 나중에 데리고 가기 편할 것 같았습니까?”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섭섭해집니다.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격에 팀원들이 다칠 뻔한 것을 막기까지 했지 않습니까?”
턱! 진월의 커다란 손이 쉐인의 가슴을 덮는다. 쉐인도 갑자기 겁탈을 당했으니 당황한다. 그렇다고 손을 떼어놓을 수도 없다.
“왜, 왜 이러십니까?”
“좀 솔직해져 보시지요. 가슴에 이렇게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당신의 심장 소리가 쿵쾅거리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심박수가 빨라진 것은…….”
“것은? 뭡니까?”
“손 좀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느껴집니다. 더구나 말까지 높이시니 불안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
진월의 입장에서는 참 답이 안 나오는 인간이다. 일을 안 한 것도 아니니 더 이상 추궁해 봐야 나올 것도 없다. 더구나 얻어낼 것이 있으니 이 선에서 끝내는 것이 좋았다.
“바알께서는 저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나?”
“높임말 써주니 참 좋던데…….”
“알 수 없습니까?”
“참 묘하네. 이러니 또 무섭네요. 그냥 편한 대로 하세요. 제가 불안해서 안 되겠네요.”
쉐인은 현명한 선택을 한다. 세상살이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겠는가? 삶을 오랫동안 살아온 지혜를 발휘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이연후 회장이 방어를 잘 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더구나 그라이아라는 그 여자 또한 뛰어난 마법사라서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 같고요. 아마도 비전으로 보실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것이 아니라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그렇군요.”
“혹시라도 알게 되면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군.”
“물론이지요. 간만에 걸린 대어인데요.”
“…….”
진월은 쉐인의 말에도 아무 대꾸도 없다. 쉐인의 입장에서는 그라이아를 구속하면 당연히 본인들이 데리고 갈 줄 알고 있다. 하지만 진월의 생각은 달랐다. 바알과 쉐인의 힘이 너무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 일이지만 진월은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 * *
빛무리와 함께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꼭 공상과학영화에서 사람들이 순간 텔레포트를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푸른빛이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사람들의 형체가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연구 시설의 홀로 타천으로 가는 게이트를 여는 곳이다.
사람들이 나타난 곳의 뒤로 동그란 원형의 게이트가 놓여 있다. 게이트의 높이는 4미터 정도 된다. 가운데는 뻥 뚫려 있고 테두리의 두께는 30~40센티 정도다. 테두리에는 룬 문자와 상형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모습을 드러낸 이들이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한쪽 구석에 만들어진 원통형의 관처럼 생긴 것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위아래는 원반 모양의 판으로 만들어졌고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빛이 사라지자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는 사람이 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원판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주변을 유심히 살핀다.
“신기한 곳이네요.”
“저희 연구시설이랍니다.” 블랙이 답해준다.
“당신들에게도 순간 이동 기술이 있네요. 놀랐어요.”
“원래는 이렇게 쓰는 것이 아니랍니다. 당신을 위해서 좀 무리를 했다고 보시면 돼요.”
“흐응~! 이렇게 이유 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보니 저한테 많은 것을 바라시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호호,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다만 혈액만 한번 채취해주시면 되요.”
“피를요?”
“저희가 원하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랍니다.”
“그래요?”
그라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게이트와 그들이 나타난 곳, 그리고 유리벽 뒤의 사람들이 보인다. 통제실 안에서 게이트를 통제하는 인원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지 게이트만을 통제하는 인원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연구진들도 보인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순간 이동을 위해서는 그 사람의 유전적인 정보부터 신체 전반에 관한 사항이 입력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한 것은 신체 스캔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라이아의 유전 정보는 이미 그녀의 어깨에서 나온 혈액과 Whole body scan을 통해 파악되어 있는 상태였다.
IUC의 기술력이 현재 과학에 비해 수십 년을 앞서 있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순간 이동 또한 원래는 게이트를 통해 타천으로 이동해야 할 에너지를 현재에서 장소만 이동하기 위해 모두 소진해버렸다. 필요한 양자에너지와 전력을 얻기 위해서 최소 1, 2개월의 공을 다시 들여야 하게 된 것이다.
그라이아는 그런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으니 신기한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블랙이 그런 그녀를 부른다.
“저희 회장님께서 좀 뵈셨으면 합니다.”
“회장님? 회장님이 여기서는 왕 같은 사람인가요?”
“뭐, 그렇다고 보시면 되겠네요.”
그라이아가 블랙의 안내로 이연후 회장을 만나러 간다. 그 사이 전철 부장은 연구진들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결과는 나왔나?”
“네. 다크 하이 엘프와 거의 유사한 유전자 패턴입니다. 생명과 연관된 인간의 염기 구조와는 배열과 구성이 완전히 다릅니다. 저들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만 안다면 다크 하이 엘프의 염기 구조와 비교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많은 부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군.”
잠시 후 블랙이 블루투스를 통해 전철의 요구사항을 듣는다. 이들은 굳이 성배와 검을 찾지 않아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과학으로 찾고 있었다. 혹시 유물을 찾아도 영생의 비밀을 풀지 못할 때를 대비해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철 부장이 전해들은 그라이아의 수명은 다크 하이 엘프에 비해서는 짧았다. 그들에게는 비교할 수 있는 데이터가 종족별로 꽤 많았다. 수명 연장을 위한 유전자 지도가 거의 완성 단계에 다가가고 있었다.
블랙과 그라이아가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그들이 탄 층수는 표시가 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저 상단에 B10이라고 쓰인 단추 하나만 있다. 블랙이 그 층을 누르자 문이 닫히며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라이아도 이 세계로 온 후 타봤기에 엘리베이터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안다. 그저 특이하다 생각하면서도 뭔지 모르게 비밀이 많은 조직이란 생각을 한다.
블랙과 그라이아가 내린 곳은 건물의 지하 10층이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블랙이 무작정 벽으로 걸어간다. 그녀가 손을 뻗자 아무것도 없던 벽에서 빛이 나와 그녀의 손바닥을 스캔한다. 블랙이 무슨 암호를 말하자 삐 소리가 나며 벽이 열린다. 다른 엘리베이터가 숨겨져 있었다. 다시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단추는 하나뿐이다. 고속엘리베이터인지 움직이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올라가는 층은 표시되지 않지만 움직이는 속도는 체감으로 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드러난 광경은 넓은 사무실이다. 블랙과 그라이아가 들어서자 주변이 보이던 유리창이 검은 색으로 물이 든다. 자연스럽게 건물의 위치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든다. 책상에는 이연후 회장이 앉아 있다. 엘리베이터 문의 정면에는 민서가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다. 마치 그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기다리고 있는 자세다.
블랙이 그녀를 보자마자 한마디 한다.
“이젠 인사를 할 때도 되지 않았니? 언니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 할 것 아냐?”
“안녕!”
“참 엎드려 절 받기네.”
“허허. 손님을 앞에 두고 면박부터 주고 그러느냐?”
“회장님이 옆에다 두고 사니까 버릇이 없잖아요. 버릇이.”
“네가 이해해라. 자, 손님께 소개부터 드리도록 해야지.”
이연후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라이아를 맞는다.
“이들의 회장으로 불리는 ‘후’라는 사람이올시다.” 본명을 모두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그라이아는 그의 이름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이연후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뭔가 이상한 것을 감지한 듯 했다.
“당신 살아있는 사람 맞아?”
“허허, 그러면 살아 있는 사람이지. 죽어 있는 사람이 당신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겠습니까?”
“이상하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얘 때문에 피 냄새는 잘 맡거든.”
그라이아가 투첼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런데요?”
“당신한테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아.”
“늙어서 그렇겠지요.”
“……그런가? 그래도 이상한데 늙은이라도 느껴지는 것은 있는데…….”
“사실 보기보다 훨씬 많이 늙었답니다.”
“그러면 당신도?”
“오시기 전에 은발의 사내를 만나셨지요?”
“그 스펠캐스터?”
“그렇습니다. 어떠시던가요?”
“그러고 보니…….”
그라이아가 느끼기에는 둘의 느낌이 약간 비슷했다. 다만 눈앞의 회장이란 자가 훨씬 더 음울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회장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웃는다. 웃음만으로는 절대 악한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얼굴은 인자한 노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라이아를 보며 회장이 말한다.
“저하고 거래 한 번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거래요?”
- 작가의말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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