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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요. 님의 서재입니다.

미래는 당신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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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하요.
작품등록일 :
2020.03.10 16:27
최근연재일 :
2020.05.07 21:30
연재수 :
4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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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9
추천수 :
69
글자수 :
2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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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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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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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프롤로그 - 결정

DUMMY

보이는 것이라면 뭐든지 벨 수 있었다.


그것이 나의 능력이었고, 내가 검을 쥐면서 깨달은 사실이었다.


베어 넘긴다.


그것은 나의 본명.


검을 베고, 상대를 베고, 내 운명을 베어 넘긴다.


그 덕분에 이 투기장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수많은 상대를 만났고, 수없이 많이 베었다.




수많은 것들을 베면서 강해졌다.


살을 베고 뼈를 베고 돌을 베고 철을 벤다.


많은 것들을 베던 검은 이윽고 목숨을 베고 승리를 벤다.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베어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던 와중 깨달았다.


보이는 것을 베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 정도로는 나의 빌어먹을 운명을 베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와 같은 노예 투사들은 물론, 일반인 투사 중에 강한 놈들은 수없이 많았다.


개중에는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녀석들도 많았다.


염동력, 저주, 원소, 그림자...


보이는 것들을 벨 수 있는 정도로는, 그것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베었다.


그래서 그다음 단계에 도달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도 베어버렸다.


상대가 누구든 능력이 무엇이든 베어버렸다.


손을 대지 않고 내 몸을 옭아매는 염동력이 다 무어냐.


그런 힘도 베어버렸다.


나에게 저주를 준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막을 수 있을까.


이미 노예라는 낙인에 매인 몸이다.


사소한 저주 따위 아무런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저주도 베어버렸다.


불과 번개를 마음껏 다루는 것 따위, 마치 어린아이 장난과도 같다.


그런 장난질에 질 정도로 여유는 없다.


그래서 불도 번개도 바람도 모두 베어버렸다.


나머지도 다 마찬가지다.


온갖 잡스러운 능력들 따위, 다 베어버렸다.


잡스럽고 하찮은 것들.


내 검이 베어버리지 못할 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투사로서 살아남았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베어 넘기면서 마지막 하나를 남기게 되었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나의 운명, 나의 미래.


그것을 베어넘거야만 했다.


납치당한 첫날, 미래인은 나에게 말했다.


미래는 당신을 버렸습니다.


이 세계는 당신에게 아무런 가치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말에 절망했다.


나를 납치해서 노예로 만든 미래인을 증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미래를 이길 수 없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이 가장 싫었다


그래서 힘을 원했다.


그리고 힘을 얻었다.


검을 쥐고, 모든 걸 벨 수 있게 되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벨 수 있게 되면서, 기대하게 되었다.


어쩌면 내 운명도 벨 수 있을지 모른다.


나를 노예로 삼은 미래를 베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가치 없다는 낙인을 찍은 세상조차도...


그리고.


이제 조금만 더 하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끝인가 보군”


용이라 불리는 사내가 나에게 고한다.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쿨럭.


재채기가 나오며 등이 들썩인다.


바닥에서 몸부림치는 몸이 마치 죽어가는 물고기 같다.


등에 끈적한 것이 느껴진다.


아아, 내 피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 바닥에 피를 흘리고 있는 모양이다.


당연하지.


배때기를 창이 뚫었는데.


누운 채로 상대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상대는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투기장에 모인 구경꾼들이 온갖 환호와 야유를 날리지만, 나에게 들리는 건 상대의 말뿐이었다.


“노예치고는 잘해왔다”


무미건조하면서도 단언하는 그 말투.


“그런 허접한 무기로 폐하가 연 토너먼트에 참가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던 거지”


“......”


부정하고 싶었다.


내 검은 허접하지 않다.


하지만 이미 모든 힘을 다 짜낸 덕분에, 반박할 기운도 남지 않았다.


멋대로 떠들라지.


“그런 주제에 결승까지 오다니... 너, 정말로 노예냐? 노예가 어떻게 이런 힘을...”


“...지랄”


겨우 한 단어를 말하는 게 다다.


그 한 마디가 상대의 말을 끊어서 만족스러웠다.


“이제 끝낼 시간이군”


용은 뚜벅뚜벅 걸어온다.


힘 그 자체라 불린 사내에게 어울리는 발걸음이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에 힘이 가득 실려있다.


그 발걸음만으로 상대방을 압도한다.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른 놈이니 내가 지는 것도 당연하지.


그런 생각이 들 뻔했다.


“마음 같아서는 살려주고 싶지만...”


“지랄...”


살려주고 싶다는 놈이 남의 배를 창으로 뚫어버리나?


“...원로회는 네가 죽기를 바란다”


원로회? 그 잘난 영감탱이들이 나를 왜?


“노예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사람들이 불안해하거든”


내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용이 대답한다.


조금 전까지 서로 무기를 맞대고 싸운 몸이다.


전력 전심으로 상대한 사이, 마음을 읽는 거야 간단하겠지.


“역시...”


그렇게 나오는 건가.


하긴, 대놓고 미래와 세상을 베어버리겠다고 공표하고 다녔다.


원로회처럼 미래의 높으신 분들이 이런 나를 주의하는 건 당연하겠지.


다만 분하다.


용에게 진 게 분한 건 아니다.


이 녀석은 나보다 강하니깐, 강한 놈에게 지는 건 당연하다.


다만 이 자식이, 마치 쓰레기를 치우는 것처럼 간단히 말하는 게 화난다.


나를 그런 취급하는 것이 부아가 치민다.


“미래인 주제에... 노예한테... 지나치게... 예민하군...”


“......”


“...쫄았냐?”


그래서 도발한다.


시시한 도발을 유언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무런 해가 없더라도 쓰레기라면...”


상대는 내 도발에 걸리지 않은 듯, 여전히 담담하게 말한다.


“...치워야하지 않겠나”


“하!”


웃을 힘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


상대는 내 머리맡까지 와서 멈추어 선다.


내 배에 꽂힌 창을 그대로 잡는다.


이제 이 창을 뽑아서 내 심장에 꽂아버리겠지.


“마지막으로”


상대는 멈춘 채로 나에게 묻는다.


“원하는 것이 있는가?”


“...동정하냐...?”


“동정일지도 모르지”


“염병...”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다.


“경의를 표하고 싶군”


“......”


죽여라.


그렇게 말할 셈이었다.


패자에게는 죽음을.


승자에게는 패자를 마음대로 할 권리를.


그것이 이 투기장의 규칙이었다.


저 잔인한 관람객들이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죽여라, 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를 떠올려버렸다.


그녀의 마지막 조언을 생각해낸다.


‘어차피 우리의 미래가 정해져 있고, 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친다면...’


모든 과거인이 미래로 와서 처음 듣는 그 말.


우리가 ‘버림받은 자’라고 불리는 이유.


우리에게는 이제 너무나 당연한 전제.


나와 달리 그녀는 그 전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전제를 바탕으로 다음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희망을 다음으로 넘겨봐요. ‘우리’가 미래를 바꾸지 못한다면, 그리고 ‘다음’도 미래를 바꾸지 못할 거라면’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지.


‘’우리’와 ‘다음’이 함께 미래를 바꿔 봐요. 1+1은 2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봐요’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 내 검은 나의 것이다’


‘남에게 줘서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다음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잡는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말했다.


내 능력을 남에게 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비록 죽을지라도, 이 미래를 베어버리고 싶다.


그 마음만이 가득하다.


그걸 위해서라면 나 자신을 버려도 좋다.


묻어놨던 마음이 죽기 직전에 폭발하듯 피어오른다.


“없는가 보군”


상대는 그대로 창을 뽑을 준비를 한다.


“...하나만”


그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내 말에 상대의 손이 멈춘다.


“...뭐지?”


“한 여자를... 만나게 해줄 수... 있겠나...?”


죽기 직전에 나는 내 마음을 바꾸었다.


“...시시한 부탁이군”


“......”


상대의 눈동자가 바뀌었다.


경의가 담겨있는 그 눈동자에 경멸이 섞인다.


“내 생각보다 시시하군... 시시해...”


막판에 여자 보고 싶다고 그러는 거냐?


네 놈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알 게 뭐냐.


나는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이 미래인들에게 저항할 수 있다면 나를 버리겠다.


아니, 무엇이든지 버려주마.


미래인들의 비웃음을 베어 넘길 수 있다면, 나의 검이 남에게 가도 상관없다.




“야... 우냐?”


“......”


콜로세움의 한 가운데, 거친 야유 속에서 여자는 울고 있었다.


용이 내 부탁을 듣고 불러준 여자다.


그러면 빨리 할 일이나 해야지, 뭘 그리 울고 자빠진 건지.


관객의 목소리도 창을 든 용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울고 있었다.


“빌어먹을... 구경 다 해놓고는... 또 뭘 쳐 울고... 있어... 재수 없게...”


“...왜, 왜...”


이 여자는 또 시시한 질문을 던질 셈이다.


“왜 싸웠냐고... 묻지 말랬지...”


“아니에요, 왜, 왜 마지막 소원을 저따위를 만나는 일에...”


여자는 더 말을 잇지 못한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목숨을 구걸하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귀족이 살려줬을지도...”


“야... 시끄러워”


그래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네 말... 대로 해보자...”


“...네?”


“네가 그랬잖아... 1+1는... 2를 넘는 걸... 보여주자며...”


“......”


“하... 눈앞도 안 보이네...”


여자를 보면서 똑바로 말할 생각이었는데, 눈앞이 캄캄해진다.


정말 시간이 별로 안 남았구먼.


“그 말씀은...”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한 손을 내 심장에 올렸다.


심장 박동이 천천히 느려지고 있다.


죽음은 심장 박동마냥 그리고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구나.


“...넘길게”


그 말에 다른 한 손에 여자의 손이 느껴진다.


양손으로 내 한 손을 꽉 잡는다.


“이러면... 되냐...?”


“네”


“제대로... 해라...”


“......”


그 말에 여자가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혼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건, 해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없다고 했었지.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지 사소한 것도 참 잘 기억난다.


“실패하면... 안 된다...”


“알겠어요”


좋아.


자신감 없는 성격인 주제에, 지금 대답만큼은 자신 있게 하네.


조금은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의 영혼을 저에게 맡기겠습니까?”


“어...”


“당신의 영혼을 철핵에 담으시겠습니까?”


“그래...”


“당신의 영혼을 남에게 맡기겠습니까?”


“......”


죽기 직전이라지만, 역시 내 영혼을 남에게 맡기는 건 거부감이 든다.


내 망설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 여자가 내 영혼을 다루는 건 좋다.


내 영혼이 철핵에 갇히는 것도 상관없다.


하지만 내 영혼과 힘이 남에게 가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다.


“맡기긴... 싫군...”


그 말에 여자가 내 손을 꽉 잡는다.


“내 혼은 그대로... 힘만... 빌려...”


힘만 빌려줘도 되겠지.


마지막에 든 생각.


“알겠습니다”


계속 나에게 뭐라 할 줄 알았는데, 여자가 알겠다고 한다.


마지막에 와서 한 나의 고집을 들어준다.


미안하군.


이제서야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그러고 보면 이 여자는, 내 고집을 참 잘도 들어주었다.


못 할 짓도 많이 했는데 말이지.


“...미안...”


“네?”


“미안... 했다...”


영혼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사과했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봤자.


그런 불평을 하려던 모양이다.


“......”


그 불평에 한 마디 핀잔을 해줘야 하는데.


이제 그럴 힘조차 없다.


그녀에게 한 사과를 마지막 유언으로, 나는 다시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작가의말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열심히, 그리고 전작보다 더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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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39화 - 역습 (2) 20.05.04 80 1 13쪽
39 38화 - 역습 (1) 20.05.01 78 2 12쪽
38 37화 - 절멸의 끝에서 (3) 20.04.30 54 1 12쪽
37 36화 - 절멸의 끝에서 (2) +1 20.04.29 59 1 12쪽
36 35화 - 절멸의 끝에서 (1) 20.04.28 4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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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3화 - 절멸 (3) 20.04.24 60 1 12쪽
33 32화 - 절멸 (2) 20.04.23 55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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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9화 - 결승, 결판 (3) 20.04.20 51 1 12쪽
29 28화 - 결승, 결판 (2) 20.04.17 50 1 12쪽
28 27화 - 결승, 결판 (1) 20.04.16 49 1 12쪽
27 26화 - 4강 (3) 20.04.15 78 1 11쪽
26 25화 - 4강 (2) 20.04.14 42 1 11쪽
25 24화 - 4강 (1) 20.04.13 54 1 12쪽
24 23화 - 8강 (4) 20.04.10 109 1 12쪽
23 22화 - 8강 (3) 20.04.09 63 1 11쪽
22 21화 - 8강 (2) 20.04.08 57 1 12쪽
21 20화 - 8강 (1) 20.04.07 54 1 11쪽
20 19화 - 16강, 그리고 8강 20.04.06 61 1 12쪽
19 18화 - 16강 (4) 20.04.03 102 1 12쪽
18 17화 - 16강 (3) 20.04.02 90 1 12쪽
17 16화 - 16강 (2) 20.04.01 130 1 12쪽
16 15화 - 16강 (1) 20.03.31 7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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