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세계를 향한 포용
“기시단에게 대항할 방법을 찾았다고요?”
“응, 그러니 미안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을까? 마창이 급하긴 하지만 어쩌면 이걸로 인해 단서를 찾아낼지도 몰라.”
“도대체 무슨 일이오?”
갑작스런 변화에 노바와 반더람은 의문을 표했지만 일단 우선순위를 확실히 하였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나는 떠올렸다.
세계로 직접 뛰어들어 날 죽이려 들었던 기시단을 마주한 적이 있었지 않은가.
“기시단은 움직이기 시작했어, 지금의 내 힘은 녀석을 당해낼 수 없어. 하지만 지금부터 받아들일 힘은 가능하게 만들어줘.”
“노바양?”
금제로 처리된 영역 때문에 이해가 가지 않는 반더람은 자연스럽게 노바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노바는 다소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이내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알겠어요, 이 모든 것은 구원을 향한 일이니까요.”
“고마워, 그리고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올 테니까.”
“뭔지는 모르겠소만, 아무튼 기다리고 있겠소.”
- 그동안 이 둘이랑 놀고 있을게!
미니엄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급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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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땐, 작은 섬 위에 서있었다.
매우 익숙한 풍경, 바로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지금부턴 이 몸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마.]
‘웬일이레? 알아서 조용히 해주겠다고 하고?’
[지금까지 깨우쳐주기 위해 발악했다만 깨달음을 얻은 네 녀석에겐 더 이상의 조언은 불필요하니 말이다. 용케도 성장했구나.]
‘또 이런다. 하지만 네가 말한 성장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 수 있게 되었어. 처음부터 알려주지 않은 건 이유가 있어서겠지?’
내 말에 심연의 목소리는 웃음을 머금은 톤으로 대답해 주었다.
[유하의 자질을 지니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정신이다, 진정으로 깨우쳐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그 힘이야 말로 유하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 심연의 목소리가 말한 대로 이것은 누가 알려준다고 해서 될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왜 몰랐을까?
지금까지 힌트는 수도 없이 많이 주어졌을 텐데 나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이나가 어떠냐. 노바는 또 어떠냐. 이것도 왜 그랬는지 알겠다.’
[그건 온전히 미리나델이 제안한 것이다.]
‘그래 알고 있어.’
정답은 항상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눈앞에 떡하니 펼쳐놓고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려 들지 않았었다.
아니, 무식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만으로는 안 된다.
틀을 깨야 한다는 말.
지금까지 유하에 대해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제 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
‘그럼, 시작한다.’
[그래, 이제부터 조용히 지켜보고 있으마.]
그 한 마디에는 나에 대한 믿음이 묻어나와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의지.
그것으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광기의 바다에 발을 내밀었다.
발바닥부터 시작해서 발목, 종아리를 따라 허벅지에서 이내 허리까지.
늪에 집어삼켜지듯 아주 천천히 전신은 광기의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하의 자질은 모든 생명의 존엄을 짊어지는 존재.
그 의미를 나는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내 전신을 파고드는 광기.
이전처럼 반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이건 생각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내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게 응답해준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말을 걸어온다.
그러면 나는 두 팔을 벌려 받아들여준다.
대통합을 이루고 하나의 정신체로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존재란 그런 것이다.
저항하려들면 안 된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의지로 묶여있다.
그것이 유하의 금제.
그런 바탕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힘의 본질에는 선과 악의 구분은 없다.
한 생명체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구분을 지어서는 안 된다.
지금 내 전신을 투과하는 광기를 느껴라.
나는 어째서 이것을 저항하면서 받아들이려 한 것일까.
잠잠한 바다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웃어보였다.
실마리가 모두 풀렸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힘을 지니고 나는 줄곧 의문을 제시하며 한 생명의 관점에서 기준을 두었다.
설령, 심연의 목소리가 알려준다고 하여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기준은 또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이건 오로지 나라는 정신이 통합을 이루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경지.
드래곤의 정신과 융합하며 카지락스타와 나를 분리시켜두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카지락스타도 인간 권영후도 내게 깃든 능력의 원래 주인들까지.
그리고 심연의 목소리와 미리나델도.
이 안에 들어온 이상 하나이다.
각자라는 틀에 가두었기 때문에 반발이 일어나는 것.
깨달음을 얻고 나는 광기를 거두어들였다.
내 응답에 대답하는 것처럼 광기는 거칠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 온순하게 다가와 빈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다음은 창공의 정원.’
밑을 내려다보았다.
깊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심연.
저 너머에 창공의 정원이 존재하고 있고, 각종 금제가 걸려있다.
심연의 목소리에게 걸린 금제부터, 미처 흡수하지 못한 미궁 포르미루의 힘까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심연을 향해 헤엄쳐나갔다.
광기를 받아들인 바다는 그저 내 의식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고, 그 결과 단 한 번 팔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쭉 나아간다.
심연에 집어삼켜지는 것이 아닌, 심연과 나는 하나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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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엔 그저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오.”
“마계에서 무방비상태로 이럴 수 있는 것은 저희들을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 나도?
“그건 글쎄요.”
역시 신념을 대가를 바친 탓에 다소 쌀쌀한 반응을 보이는 노바.
미니엄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원했던 대답을 듣지 못한 것에 대해 갈대를 휘두른다.
그때였다.
“···!!”
“고개 숙이시오! 범기골!”
노바가 요선을 꺼내 미니엄을 감싸 바닥에 밀착 시켰고, 발톱을 꺼낸 반더람의 기술이 허공을 갈랐다.
촤아아악!!!!
마계에 한층 짙은 어둠이 몰려왔다.
반더람의 범기골에 의해 여섯 갈래로 나뉜 공간을 제외하고 심연에 잠긴 것이다.
그 틈으로 세 명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넌, 그때 그 요정이네?”
“상처는 다 나았나보네요?”
헬 베스크다코와 노바가 서로를 마주보며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미니엄인가. 녀석의 편에 서서 뭐하는 짓이지?”
- 제로카로지스다! 언제 돌아왔어?
제로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칼의 모습을 확인 한 뒤, 미니엄을 향해 말했다.
미궁에 있어야 할 태초의 마족이 저들과 함께 있는 모습에 살짝 심기가 불편한 듯이.
“배고파, 당장 집어삼켜줄게.”
“나뭇잎처럼 잘려나가기에 몰랐소만, 그대의 능력이었소?”
상당히 마른 마족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상태로 배를 움켜잡은 채 반더람을 향해 적의를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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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의 정원에 들어선 나는 우선 변화한 풍경에 넋이 나갔다.
꽉 막혔던 숲에서 이제는 드넓은 창공이 훤히 보이는 공간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과 잘 가꾸어진 꽃과 식물들.
눈앞에는 하얗고 거대한 신전이 보였다.
‘이게 창공의 정원 본래의 모습이구나.’
내 정신 상태에 따라 다른 풍경을 보이는 장소.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일까.
‘어쨌든 창공의 정원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은 좋은 징조야.’
나는 우선 미궁의 힘부터 흡수하기로 정하였고, 눈을 감고 집중을 한 뒤 포르미루를 불러내었다.
- 안녕하세요.
눈을 뜨기 직전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
“빨리 왔지?”
- 예, 이곳에서 당신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당신이라면 저도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네요.
작은 덩어리.
내 얼굴 크기정도의 검은 구체는 그렇게 말했다.
“믿어줘서 나야 말로 고마워.”
- 아닙니다. 짧았지만 당신의 진심과 마주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검은 구체를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그 행위는 아주 세심하게 이루어졌으며 포르미루가 내 안의 빈 공간에 자리를 잡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
포르미루의 힘을 느끼며 눈을 감고 감사를 전달했다.
대답은 들을 수 없었지만 나와 같은 감정을 표출하는 포르미루의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심연의 목소리에게 걸려있던 금제의 가디언을 볼 수 있었다.
“너도 오랜만이다. 심연.”
양 허리춤의 단검과 입에서 코까지 가린 검은 마스크.
길게 그어진 흉터에 의해 한 쪽 눈은 감겨 있었고 등 뒤에는 얇은 검 한 자루를 메고 있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와 변함없는 모습.
그리고 여전히 별 다른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다.
작은 큐브에서 튀어나왔던 가디언을 지금 이렇게 다시 마주하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땐 그저 공략하기 위해 공격에 공격을 가하기만 하였으니, 이렇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녀석을 보고 있으니 얼굴이 살짝 달아오름을 느꼈다.
왜냐고?
저 녀석은 심연의 목소리에게 걸린 금제다.
그러니 정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지 않은가?
녀석이 가만히 날 바라만 보고 있었던 이유는 여유를 보인 것이 아니라 날 포용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땐 미안했다. 쓰러뜨려야만 하는 줄 알았거든.”
피식 웃으며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양 팔을 벌리고 녀석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닿는 것만으로도 부식시키는 능력,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아.”
가디언을 끌어안았다.
내 몸은 소멸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조금씩 따뜻해지는 체온이 전해져 온다.
“네가 날 믿어줬기에 마음을 열 수 있었어. 고맙다. 이제 내 안에서 편히 쉬어.”
그 말을 끝으로 가디언의 모습은 사라졌다.
내 안의 빈 공간에 자리 잡았음을 느낀 뒤 슬며시 눈을 떴다.
“너, 거짓말 했겠다?”
[뭘 말이냐.]
“사수, 심연의 신. 어비스. 역시 신이었잖아!”
[어차피 이 몸이 신이 아니라고 해도 네 녀석은 계속 부정했지 않느냐, 이제 와서 뭔! 혹시나 신이라고 했다 의욕을 상실할지도 몰라 그랬다 이 놈아! 괜히 더 복잡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서 좋을 것 있겠느냐!]
“티를 그렇게 내고 다니는데 모를 수가 있겠냐?! 오히려 계속 신이 아니라고 해서 더 복잡해졌거든?!”
[됐고! 서둘러 돌아가도록 해라. 유하를 진정으로 이해한 것은 기뻐해야할 일이다만 우선 마창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그 전에, 이곳에서 하나 더 확인하고 가야할게 있잖아.”
[뭣?]
“여신 아리아 말이야, 지금은 느낄 수 있어. 어비스가 내 안에 잠들어 있었듯이 저 신전 안에는 아리아가 잠들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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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를 바라보는 헬 베스크다코의 눈에는 살기가 내비쳐있다.
마기를 두른 쇠사슬을 움켜쥐며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제로카로지스에게 말했다.
“저 요정은 내가 맡겠어.”
“패배는 용납 못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턱짓으로 노바를 부른다.
“뭐해? 이번에야 말로 진짜 끝장 봐야지?”
“좋아요, 오늘로 확실히 승부를 보죠. 반더람님, 미니엄씨.”
노바는 요선을 펼치며 살짝 떠올랐다.
“우린 걱정 마시고 다녀오시오.”
- 나는?
“···칼님을 지켜주세요.”
- 응! 알았어! 다녀와~
그 말을 끝으로 노바는 헬 베스크다코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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