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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태 님의 서재입니다.

창궁귀환(蒼穹歸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고이태
작품등록일 :
2021.05.12 13:13
최근연재일 :
2021.06.03 17:17
연재수 :
22 회
조회수 :
20,021
추천수 :
381
글자수 :
92,643

작성
21.05.18 17:09
조회
909
추천
18
글자
11쪽

명경지수(明鏡止水)

DUMMY

“저에게 검을 알려주세요.”


‘이게 무슨 말일까? 항상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사저가 왜 이러는 거지?’


“저기, 사저? 일단 진정하시고 말투부터 좀 바꿔주실래요? 갑자기 부담스럽게 왜 이러는 거예요?”


그저 검을 팔에 꼭 쥔 채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저는 강해져야 해요. 이전의 일은 용서를 구할게요. 당신은 절 이겼잖아요. 저보다 경지도 낮으면서 말이죠. 당신은 강해요. 그러니 저에게 검을 알려주세요. 부탁드려요.”


나는 그녀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전생에 내가 알던 모습도 현생에 내가 알던 모습도 아니었다. 왜 이리 그녀가 강함에 집착하는지 무엇이 자존심도 굽히고 이리 절박하게 만들었는지 또한 알 수 없었다.


“사저, 왜 이러는 거예요? 네. 알려드릴게요. 알려드릴 테니까 평소처럼 대해주세요.”


“그래, 알았어.”


그녀의 얼굴은 조금이나마 풀려있었다. 딱딱하던 경어도 그만두고 평소의 말투로 돌아왔다.


“사저는 그렇게 강해지고 싶은 이유가 뭐예요?”


사저는 하늘을 잠시 쳐다보고는 등을 돌렸다. 떨어지는 폭포가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강렬한 물줄기는 그녀의 얼굴을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다.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가 말했던가? 너에겐 가족이 집이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아무도 없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스승님만이 유일한 내 가족. 이 무당이 내 집. 그런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검 한 자루밖에 없어.”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뭐라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그러니 난 강해져야 해. 가진 거라곤 무공밖에 없는 내가 약하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대체 뭘까?”


사람은 흐르는 물에서는 자신을 비춰볼 수 없고 잔잔한 물에서 자신을 온전히 비춰볼 수 있는 법이다. 맞는 말이다. 깨진 거울을 들여다봤자 그저 조각난 형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는 정반대였다. 떨어지는 폭포에 비치는 흐릿한 사저의 얼굴, 이것이 만약 선명히 보였다면 그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의 가슴속을 조금씩 죄어오는 알 수 없는 이 느낌을 참을 수 없었을 테니까.


“만약 강해진다면 사저에게는 무엇이 남나요?”


“그러게.”


사저는 고개만 살짝 돌리고서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옅은 미소를 띤 채로.


짙은 달빛 아래 물소리만이 주위를 채우고 있었다.


*


늦은 시각이었기에 사저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밤은 지나 아침이 되었다. 밤사이에 돌아온 스승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옆에서 스승을 거들며 준비를 도왔다.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구나.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많은 일이 있었죠. 그런데 이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치우는 와중이었다. 멀리서 진령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한 명이 더 있었다. 청호 사숙이었다.


“무슨 일이냐, 옆에 그 아이까지 데리고?”


“사형의 제자, 그러니까 저한텐 사질이죠. 줄 게 있어서 왔습니다. 가는 길에 진령이를 만났죠. 진령이한테도 마찬가지로 줄 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대체 뭐길래?”


사숙은 품 안에서 꺼내 손 위에 올렸다.


“이건 내가 준 자소단 아니냐? 그것도 두 알이나.”


“맞습니다. 하나는 진규가 진령이에게 양보한 겁니다. 자기는 딱히 필요 없다면서요.”


“진규 사형이요?”


사저는 의아하단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청명 사형이 주는 겁니다. 사질이 워낙 좋은 모습을 보여준 의미에서 말이죠. 거기다 사형이 가져온 물건이니 이 아이가 받는 게 도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스승은 무언가 신경이 쓰이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았다. 청호, 네가 저 아이들을 좀 도와다오. 약에 관해서라면 너를 따라갈 녀석이 없으니까. 나는 청명에게 인사나 하러 가야겠다.”


“네, 사형? 이런 벌써 가버리셨군. 볼 때마다 느끼지만 성격이 참 급하셔.”


“저기, 진령 사저야 모르겠지만 제가 이리 귀한 걸 받아도 괜찮나요?”


“응? 물론이지. 사형 덕에 제작법도 알았으니 이제 그리 귀한 물건도 아니다. 하나는 이미 예비로 빼놨고 아무도 손대지 않고 묵혀두는 것보단 네가 먹는 게 좋지 않겠니. 자, 그럼 이제 둘 다 자리에 앉아라.”


자소단을 하나씩 받아든 둘은 서로 가까이 붙어 바닥에 앉았다.


“그럼 입안에 넣고 잘 씹어서 삼켜라.”


잘게 부서진 영단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내려감과 동시에 강렬한 힘이 전신을 맴돌았다.


“영단의 기운이 느껴지지? 그걸 단전 안에 가둔다는 생각으로 내기를 다스려라.”


둘 다 가만히 눈을 감고 청호의 말에 따랐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났을 때쯤 진령은 눈을 떴다.


“어떠냐?”


“몸이 가볍습니다. 제 검이 전보다 더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좋다. 영단의 기운을 제대로 너의 것으로 만들었구나.”


시간이 더 흐르자 나 역시 눈을 뜨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너는 어떠냐?”


“으음, 잘 모르겠습니다. 영단의 기운이 가라앉긴 했는데 특별히 무언가가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잠시 손 좀 내밀어 보아라.”


사숙은 내 팔을 잡고 혈을 읽었다. 그러고는 크게 웃었다.


“이러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밖에 없지. 영단의 기운을 경지의 벽을 뚫는 데 전부 썼구나. 절정의 경지에 오른 것을 축하한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검을 써보면 바로 느껴질 거다.”


사저는 물끄러미 이 상황을 보고 있더니 혼자 작게 중얼거렸다.


“이젠 정말로 못 이기겠네.”


*


청명은 혼자 방에서 각종 문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제자인 진규도 이를 거들고 있었다.


“진규야, 자소단을 양보했더구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스승님의 제자로서 이미 많은 영약과 영단을 받았습니다. 인제 와서 하나 더 받아봤자 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할 진령이가 받는 것이 더욱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바빠서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도 해줘야지요.”


“네가 나보다 낫구나.”


“아닙니다. 그보다 이번에 온 아이, 이름이 남궁현이라 했지요. 그 녀석에게 자소단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청강 사백의 제자라 하여도 외인이지 않습니까.”


“진규야, 너도 언젠가는 나를 이어 이 자리에 앉을 거다. 그때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거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님.”


“누가 왔구나. 너는 이만 물러나거라.”


“네.”


진규는 방을 떠났다. 방앞에는 청강이 있었다.


“청강 사백, 여긴 어찌 오셨습니까?”


“네 스승은 여기 있느냐?”


“예, 방안에 계십니다.”


“고맙다.”


진규는 약간 거칠어 보이는 사백의 모습에 더 묻지 못하고 물러났다.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오신 겁니까?”


“무슨 생각으로 자소단을 넘긴 거냐?”


“아, 그 일 때문입니까. 청호한테 못 들으셨나요? 그 아이가 워낙 출중하다 보니···.”


청강은 말을 끊으며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입에 발린 말을 들으려 내 발로 직접 온 게 아니다.”


“그렇게 확신에 찬 말투를 보니 다 알고 오셨군요. 사형의 생각이 아마 맞을 겁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10년 20년이 지나면 분명 무림을 이끄는 자 중 하나로 성장하겠죠. 무당에서 배우고 무당의 영단을 받은 은혜, 그 아이는 분명 잊지 않을 겁니다. 그럼 미래에 그 아이는 무당을 어떻게 대할까요?”


“청명!”


청강은 크게 소리치며 청명의 멱살을 잡았다. 청명은 아무 감흥도 없다는 듯 청강을 똑똑히 쳐다보았다.


“네가 감히 내 제자를 이용하려 들어. 그것도 무당의 이름 들먹이며 그런단 말이더냐.”


“대체 왜 이리 화내시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형.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20년 만에 나타나서는 대체 무슨 자격으로요.”


“너 감히.”


“냉정히 말해볼까요. 맞습니다. 사형이 아니었다면 이 무당은 무너졌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서요? 전쟁이 끝나자마자 말없이 사라지고서 지금에 와서야 무당의 이름으로 절 다그치십니까.”


청명은 멱살을 풀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사형이 제멋대로 사라진 이후 모든 일은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었습니다. 불타는 궁을 다시 세웠습니다. 땅을 파냈습니다. 그리고 제 손으로 직접 죽은 제자들을 묻었습니다. 직접 묘비에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렇게 20년을 살아왔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사형이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분노하시는 겁니까? 모든 것이 싫다고 사라진 사형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요?”


“너···.”


“제가 너무 흥분했군요. 이만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할 일이 꽤 쌓여있어서 말이죠.”


*


남궁현과 진령은 서로 검을 나누고 있었다. 그 광경을 청호가 흐뭇이 지켜보고 있었다.


“사형, 이제야 돌아오셨군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아이들은 어떠냐?”


“눈으로 직접 보시지요.”


누가 온 줄도 모른 채 둘은 즐겁다는 듯 웃으며 서로의 검을 맞대고 있었다.


“현이가 절정의 경지에 올랐군. 좋은 일이야.”


“그렇죠. 보면 볼수록 놀랍습니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아이가 하루하루 다르게 성장하는 게 말이죠.”


“청호야.”


“네?”


“내가 없는 동안 힘들지는 않았더냐?”


“솔직히 말해서 직후엔 아주 힘들었습니다. 손 봐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고 그 당시엔 모두가 힘들었으니까요.”


“나를 원망하진 않았느냐?”


“원망이요? 아무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를 넘어 사형도 사저도. 저희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가장 힘든 건 사형이라고, 그 누구보다 손에 피를 묻힌 사형이 가장 힘들다고.”


“그리 말해주니 고맙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정말 죽을 때가 다가오긴 했나 보다.”


“네, 그렇죠. 저희 모두 나이를 너무 먹었습니다. 저도 이따금 지나온 회한(悔恨)들이 생각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제자들을 봅니다. 앞으로의 시대를 이끌 우리의 자랑스러운 제자를 말이죠. 우리의 시대는 핏빛이었지만 저 아이들은 다를 겁니다. 분명 우리보다는 밝은 날이 있겠죠. 그런 생각을 하면 제 삶이 마냥 헛되지는 않았다 느낍니다.”


“그렇지. 난 변하지 못했다. 과거에 사로잡혀 과거만을 보았지. 하지만 이젠 미래를 봐야겠지? 지나온 나날이 밝든 어둡든 간에 말이야.”


청강과 청호는 제자들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거기에 지나온 자신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작가의말

人幕鑑於流水, 而鑑於止水 인막감어유수, 이감어지수 

-장자(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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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름답다 21.05.26 602 10 7쪽
17 불청객 21.05.25 647 12 8쪽
16 달이 지는 자리 21.05.23 678 13 9쪽
15 황궁 21.05.22 709 14 10쪽
14 호환(虎患) 21.05.21 746 19 10쪽
13 초대장 21.05.20 801 15 10쪽
12 전야(前夜) +1 21.05.19 897 18 11쪽
» 명경지수(明鏡止水) 21.05.18 909 18 11쪽
10 자신만의 검 21.05.17 927 17 11쪽
9 직(直), 곡(曲), 원(圓) +2 21.05.16 978 18 9쪽
8 달빛 아래서 +3 21.05.15 1,030 22 12쪽
7 무당 +4 21.05.14 1,098 23 9쪽
6 집으로 +1 21.05.14 1,115 21 8쪽
5 징조 21.05.13 1,170 20 10쪽
4 흰 고래 +1 21.05.12 1,231 22 10쪽
3 만남 +1 21.05.12 1,346 19 10쪽
2 제갈세가의 망나니 +1 21.05.12 1,454 28 11쪽
1 귀환 21.05.12 1,925 3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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