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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님의 서재입니다.

칼란의 아이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depriver
작품등록일 :
2021.10.12 00:11
최근연재일 :
2021.11.08 17:00
연재수 :
4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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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
추천수 :
24
글자수 :
228,594

작성
21.10.12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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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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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2쪽

<EP. 1> 4 - 6

DUMMY

첫 페이지에 산이 등장했다.


다음 장에는 산을 오르는 샛길이 나오고 숲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이 등장했다.


페이지를 넘기자 나무가 자라지 않은 넓은 공간이 나왔다.


공간의 중앙에 몇 채의 기와집이 들어서 있었다.


기와집을 에두른 돌담이 나왔다.


기와집 마당 한쪽엔 돌로 쌓은 우물과 기이하게 뒤틀린 고목이 자리잡고 있었다.



다음 장에는 또 다른 오솔길이 나왔다.


그림을 보는 동안 강한 기시감이 나를 엄습해왔다.


그림들이 낯이 익었다.


낯이 익다니!


불가능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시감은 점점 강해졌다.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진 바닷가 그림이 나왔다.


초승달 모양의 거대한 해안 절벽 아래 무수한 암초가 솟아 있었다.


기시감은 맞았다.


언젠가 한 번 가본 장소였다.


그럴 리 없었다.


나는 이런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등골이 오싹해왔다.


이곳은 내가 가본 곳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은 장소······ 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소였다.



나는 급히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암초 사이에 뱃길이 나 있고 물 위에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다음 장을 펼쳤을 때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한 무리의 거인족이 배를 타고 떠나고 있었다.



번개처럼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둘째들도 그림을 그린다!


바트의 방은 비어 있다!



나는 바트의 방으로 갔다.


바트의 방에도 책장이 있고 책장엔 동화책과 스케치북이 꽂혀 있었다.


바트의 스케치북은 바위의 그것보다 분량이 적었다.


스케치북에는 날짜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책장 맨 아래쪽, 가장 최근에 그렸을 법한 스케치북을 꺼냈다.


책장을 넘겨 그림들을 살펴봤다.


스케치북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었다.


바위의 그림 솜씨에 못 미치긴 했지만, 나는 바트가 무엇을 묘사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죽음을 앞둔 두 거인 소년은 열아홉 살 짧은 생의 마지막 종착점에서,


수천 년 전 그들 조상이 배를 타고 떠나던 바닷길 여정의 출발점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


내가 정신없이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쪽문 밖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비상 통로를 걸어오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이곳을 어슬렁거릴 사람은 없었다.



허연 형체가 방으로 쑥 들어왔다.


백발에 치렁치렁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형체였다.


나는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다.


‘귀신이다!’


귀신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 노파였다.


김의 어머니 ‘수’였다.


나는 멀뚱히 수의 얼굴만 바라봤다.



수는 범상치 않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머리를 삼단으로 말아 올려 비녀를 꽂았는데 꼭 왕관을 쓴 것 같았다.


창백한 얼굴로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섬뜩했다.



수가 책상으로 다가왔다.


스케치북을 뒤적거리며 수가 말했다.


“안 교수라고 했죠?”


목소리가 중성적이었다.


“예. 맞습니다. 혹시······ 김 여사님 어머니 되십니까?”


수는 내 질문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스케치북을 넘기며 말했다.


“대단하지 않아요?”


“······.”


“본적도 없는 걸 그리다니.”



수가 스케치북을 덮고 의자에 앉았다.


커다란 팔걸이에 두 팔을 올려놓은 수의 모습에서 위엄이 느껴졌다.


“이미 봐서 알겠지만, 아이들 그림은 똑같아요.”


수는 내가 이 방에 들어온 이유를 아는 것 같았다.


CCTV로 나를 지켜본 것 같았다.



예의 중성적인 목소리로 수가 말했다.


“마지막 그림에는 항상 바다가 등장하죠.”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요.”


“나도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어떻게 바뀌셨습니까?”


“이 아이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수는 내게 거인들 그림에 얽힌 일화를 들려줬다.



거인들에게 그림 그리기를 권한 건 양 박사였다.


미술에 취미를 붙이면 정서적으로 안정돼 폭력성이 줄 거라는 기대에서였다.


양 박사가 예상한 것보다 아이들은 훨씬 미술을 좋아했다.


한 번 연필을 잡으면 몇 시간이고 책상에 앉아 그리기에 몰두했다.



어느 날, 아이들 그림을 살피던 양 박사는 그림이 모두 비슷한 것을 알았다.


같은 방을 쓰는 아이들 그림이 비슷한 건 수긍이 갔다.


문제는 방을 따로 쓰는, 둘째의 그림이었다.


그림 솜씨에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거인족이든 둘째든 모두 같은 그림을 그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양 박사는 그림이 같은 이유를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세대의 그림을 본 후 양 박사는 생각을 바꿨다.


아이들은 세대를 불문하고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3세대도, 4세대도, 노우도, 나란과 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나이가 되면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전 세대와 같은 그림을 그렸다.


양 박사는 이 현상이 자신의 ‘기억하는 유전자 이론’의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거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유전자에 담아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는 것이었다.


양 박사는 자신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세대 거인들은 열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전멸했다.


양 박사의 노력으로 2세대는 1세대보다 오래 살았다.


1년의 수명이 연장되자 2세대는 1세대의 그림에 없던 장소를 그려냈다.


1년이라는 기간 동안 2세대는 1세대보다 더 많은 정보를 유전자를 통해 전달받은 것이다.


3세대의 수명은 2세대보다 1년 더 연장됐다.


3세대인 바트와 바위의 그림에 마봉산과 뱃길이 등장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수는 양 박사의 이론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림에 등장하는 장소를 찾고 싶었다.


수는 지형을 잘 아는 전문가를 불러 그림에 등장하는 장소를 찾게 했다.


당연히 불가능했다.


스케치북을 들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 모를까, 장소를 찾아낼 순 없었다.


다만,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케치북에 등장하는 산세나 지형, 수종으로 볼 때 그림을 그린 사람은 북반구의 매우 광범위한 지형을 떠돌았을 겁니다.”



수는 그림에 등장하는 장소가 거인들 선조의 행적이라고 믿었다.


그림의 장소를 알아내면 거인들 선조가 어디서 살았는지, 또 어디로 떠났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이들 수명을 연장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했다.


아이들 수명이 길어질수록 그림에 새로운 장소가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1세대의 마지막 그림에 마봉산은 등장하지 않았다.


2세대의 그림부터 마봉산의 폐가와 해안 절벽이 등장했다.


수는 3세대의 그림에 거인들의 다음 행적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수의 예상은 맞았다.


3세대인 바트와 바위의 그림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장면이 등장했다.


암초 지대의 뱃길과 한 무리 거인족이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이었다.



수는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아이들 수명을 계속 연장하는 거야.”



여기서 문득, 나는 수 모녀가 거인들을 복원한 이유가 궁금했다.


모녀는 거인들을 성인으로 키워 뭘 하려는 걸까?


수의 말대로 거인들이 어디로 떠났는지 밝혀내려는 걸까?


밝혀내서 뭘 하려고?


그들을 따라가려고?


가서 함께 살려고?



나는 김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김은 꿈속에서 한 여자를 봤다고 했다.


여자는 거인족이 자신의 곁에 머물기를 바란다고 했다.


여자는 거인족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증오한다고 했다.


또한, 김은 어머니가 꿈에 나온 여자처럼 변해간다고 했다.


나는 수가 거인에게 집착한 나머지 정신이 약간 돈 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조용히 수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거인들이 떠난 곳을 찾고 싶으신가요.”


수가 외쳤다.


“당연하지!”



순간,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눈을 치켜뜬 수의 얼굴이 섬뜩해서가 아니었다.


짧은 순간, 수의 얼굴에 청동 갑주에 양각된 여자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 표정에서 자신의 광기를 발견했을까?


낯빛을 바꾸며 수가 말했다.


“거인을 복원한 이유는 많아.”


“······.”


“일이 잘 풀려서 그들도 살리고 또, 그들 선조도 찾게 된다면 좋은 일 아닌가?”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역사는 다시 써야 했다.


아니, 역사는 이미 다시 써야 했다.


사십 년 전, 김의 가족이 둘째와 조우한 그날부로 역사는 새로 써야 했다.


김 모녀가 마봉산 동굴에서 미지의 유골을 발견한 그날 이후, 세계 역사는 이미 다시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새로 쓰는 역사에 이미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


샤말과 보바의 이식 시기를 놓고 고민할 즈음, 기쁜 일이 생겼다.


바트의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코마에 빠진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한편으론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이 현상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면역체계가 복구되면서 나타난 명현반응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녀석의 상태를 관찰하면서 차근차근 알아봐야 했다.



바트가 코마에서 깨어나고 2주가 지났다.


녀석의 면역체계는 정상을 회복했다.


이른 감이 있지만, 나는 바트를 자신의 방으로 옮겼다.


녀석을 연구실에 오래 두면 위험하다는 김의 우려 탓이었다.


바트가 방으로 돌아온 후, 집안사람 모두 녀석을 위해 헌신했다.


덕분에 바트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어 갔다.



나는 김에게 보바와 샤말의 시술을 건의했다.


외형상 둘의 몸 상태는 양호했다.


그러나 성장은 이미 멈춘 지 오래였고 텔로미어도 한계에 와 있었다.


면역력이 떨어져 언제 병변이 찾아올지 몰랐다.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기는 했다.


정상적인 몸에 제대혈을 수혈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양 박사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기록에 남겼다.


내 임무는 양 박사의 처방대로 시술하는 것이었다.



이번 시술도 보바가 먼저였다.


팔에 수액 바늘을 찌르는 동안 보바는 고분고분했다.


유리벽이 열리고 카챠가 보바의 침대를 밀고 나왔다.


샤말의 방앞을 지날 때 보바가 힐끗 녀석을 쳐다봤다.


거의 십 년 만의 재회일 테지만, 두 거인은 서로를 응시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서로를 응시하는 녀석들의 시선에서 미세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동지애였다.


평소, 둘은 서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식을 앞둔 이 시점에서 둘은 같은 운명체였다.


보바의 이식이 성공해야 샤말도 이식을 받을 수 있다.


보바가 실패하면 샤말의 이식은 무한정 연기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거인은 눈빛을 통해 서로에게 암묵적인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보바의 이식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보바의 몸은 자신의 조혈모세포를 잘 받아들였다.


이제부터가 관건이었다.


나는 보바를 무균실로 옮겼다.


몇 시간 후 보바의 체온이 올라갔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식은땀을 흘렸다.


근육통을 호소하던 보바는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 보바는 늦은 시간에 일어났다.


내가 물었다.


“몸이 좀 어때?”


“약간 피곤한데 괜찮아요. 운동을 심하게 한 기분이에요.”


며칠 후, 나는 보바의 혈액을 채취해 검사했다.


혈장과 혈구,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다.


DNA 검사도 정상이고 텔로미어도 회복되는 기미가 보였다.


즉, 보바의 몸은 제대혈을 잘 받아들였고 단 며칠 만에 면역체계가 복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식은 성공이었다.


이식이 성공한 건 무엇보다 보바가 내 지시를 잘 따라줬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이식 전 과정에 걸쳐 내 지시를 잘 따랐다.


이식이 끝난 후에도 보바는 순한 양처럼 굴었다.


내 말을 잘 들어야 시술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전 세대들처럼 이른 나이에 황천길로 떠나지 않는다는 걸, 녀석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바의 상태가 안정되었음을 확신한 후, 나는 샤말의 이식을 준비했다.



몇 주 후, 샤말의 이식이 이뤄졌다.


샤말의 이식도 성공적이었다.


샤말의 몸도 자신의 조혈모세포를 잘 받아들였다.


보바처럼 샤말도 무균실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녀석의 상태로 봐 며칠 만에 무균실을 나가도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이제 몇 주간 샤말과 보바의 경과를 지켜보며 상태가 나빠지지 않기만 바라면 됐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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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P. 2> 2 - 7 21.11.08 41 0 11쪽
40 <EP. 2> 2 - 6 21.11.04 43 0 12쪽
39 <EP. 2> 2 - 5 21.11.01 45 0 11쪽
38 <EP. 2> 2 - 4 21.10.29 44 0 11쪽
37 <EP. 2> 2 - 3 21.10.28 50 0 12쪽
36 <EP. 2> 2 - 2 21.10.27 52 0 11쪽
35 <EP. 2> 2 - 1 21.10.26 53 0 11쪽
34 <EP. 2> 1 - 6 21.10.25 53 0 12쪽
33 <EP. 2> 1 - 5 21.10.21 51 0 13쪽
32 <EP. 2> 1 - 4 21.10.20 54 0 12쪽
31 <EP. 2> 1 - 3 +2 21.10.19 58 0 12쪽
30 <EP. 2> 1 - 2 21.10.18 53 0 11쪽
29 <EP. 2> 1 - 1 +2 21.10.15 67 0 11쪽
28 <EP. 1> 5 - 7 +2 21.10.14 79 1 12쪽
27 <EP. 1> 5 - 6 +2 21.10.14 75 1 12쪽
26 <EP. 1> 5 - 5 21.10.13 66 1 15쪽
25 <EP. 1> 5 - 4 21.10.13 67 1 15쪽
24 <EP. 1> 5 - 3 21.10.12 70 1 14쪽
23 <EP. 1> 5 - 2 21.10.12 73 1 11쪽
22 <EP. 1> 5 - 1 21.10.12 66 1 11쪽
21 <EP. 1> 4 - 7 21.10.12 64 1 13쪽
» <EP. 1> 4 - 6 21.10.12 64 1 12쪽
19 <EP. 1> 4 - 5 21.10.12 64 1 11쪽
18 <EP. 1> 4 - 4 21.10.12 68 1 12쪽
17 <EP. 1> 4 - 3 21.10.12 64 1 11쪽
16 <EP. 1> 4 - 2 21.10.12 68 1 11쪽
15 <EP. 1> 4 - 1 21.10.12 66 1 15쪽
14 <EP. 1> 3 - 6 21.10.12 65 1 16쪽
13 <EP. 1> 3 - 5 21.10.12 65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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