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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TOP-1장-1] 나도 반칙이다.

[1] 나도 반칙이다.

 

 

카일론 데미시안 황제 폐하께서 자비를 베푸셨다.

샤롤 알포레인을 폐위하고 유폐를 명하노라!

딸 덕분에 죽음을 면한 그자의 뒷모습은 비참했다.

 

-데미시안 1 3-

 

 

***

 

 

! -!”

샤롤!”

“...?!”

식사 중에 소리를 지르는 건 어느 나라의 예법인지 모르겠구나. 적어도 우리, 알포레인 왕국에서 쓰이지 않는다는 건 안다만.”

 

듣기 좋은 중후한 음성에 어울리지 않는 깐깐한 말투.

내가 애용하는 화법이지만, 절대 내가 아니다.

 

‘...폐하? 정말로?’

 

사람을 제대로 물 먹인 애늙은이 대신 수려한 미남자가 그를 꾸짖고 있었다.

호언장담은 좀 선급하지만, 내가 폐하라고 부른 사람은 평생 하나뿐이었다. 일반 가정에서는 아버지 혹은 아빠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로한 알포레인.

중앙대륙 북서쪽에 위치한 알포레인 왕국에서 명군(名君)으로 통하는 현명한 통치자. 하지만 훗날 역사가들은 다르게 평가했다.

 

전쟁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순진한 왕

 

폐하는 화평정책의 선두주자였다.

그 빌어먹을 건달프에게 내 마법적 재능을 물어봤을 만큼 사람을 잘 믿고, 사귀는 부류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시기를 잘못 탔다고밖에 위로할 말이 없다.

 

덕분에 내가 왕이 되긴 했지만...’

 

알포레인은 중앙대륙의 10%를 차지한 왕국이다. 면적으로만 따지면 강대국의 반열에 충분히 들 수 있지만, 위치가 그다지 좋지 않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부족한 식량문제!

더 북쪽에 자리한 나라들보다는 덜 춥고 덜 척박해서, 더 살기 좋다는 걸 위안으로 삼는 수밖에 없는 중계무역국가다.

농사가 힘든 북방(北方)으로 식량을 팔러 가는 상단에 통행세를 걷고, 그 돈으로 식량을 구매하는 알포레인 왕국.

이래저래 미움을 많이 받는 위치라고 할까.

그걸 안다면 자국의 병력을 키워야 정상이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비싼 식량 탓에 유지비가 많이 나가는 병사는 소수로 유지하고, 영지전 등은 거의 용병으로 해결한다.

! 그렇다고 완전히 무장해제 한 건 아니다.

먹는 거 빼고는 빵빵하게 지원해줄 수 있어서 기사가 많다.

그나저나 언제 적으로 돌아온 거지?’

 

그 지긋지긋한 탑이 아니란 것만은 확실하다.

썩 유쾌하게 죽지 못한 가족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서 식사 중인 것만 봐서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나도 어지간히 감성이 메말랐군.

워낙에 많은 죽음을 봐와서 그런지 가족들도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유일하게 반가운 게 있다면 시중드는 예쁜 하녀들.

풋풋한 여자 향기 때문에 코가 자꾸 벌렁거린다.

무려 20년 동안 갇혀있었으니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꾸 눈이 폐하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걸 포함해서.

 

으아! 오랜만에 눈이 호강한다!’

 

폐하가 정략결혼을 빙자한 미인을 들이는 바람에 화가 단단히 나신 어머니는 외가인 해양제국 포쉐이크로 돌아가셨다.

그 문제의 발단이 된 두 왕비님.

무시무시한 해양제국의 항의를 외교로 돌파하고 차지한 미녀들답게, 그 미모는 왕국을 대표하는 여인으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빤히 쳐다보는 추태는 자제하자.

세상은 넓다! 그리고 그녀들보다 더 대단한 미녀의 명단쯤은 머릿속에 꿰차고 있다.

책을 완전히 신뢰할 순 없지만 전부 거짓말은 아니겠지.

샤롤. 이 형님에게 할 말이라도 있느냐?”

 

고개를 돌린다는 게 또 다른 오해를 부른 모양이다.

이걸 어쩐다?

왕이라면 능히 처세술도 뛰어나야 하는 법이다.

 

역시 잘생기셨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 참 생뚱맞은걸!”

 

장남이자 왕위계승서열 1위인 크롬 알포레인이 헛웃음을 터트린다.

배다른 형제지만, 딱히 유감은 없던 걸로 기억한다.

조금 둘러대듯 말했지만 잘생겼다.’는 칭찬 또한 진심이다. 크롬이 알포레인 최고 미남으로 손꼽힐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정말 조만간 같다.

 

크롬을 보아하니 16? 그렇다면 나는 13살이겠군.’

 

카일론 데미시안 황제의 회귀로 되감긴 기간이 대략 50년쯤 된 것 같다.

마법을 쓴 당사자는 8살 꼬맹이려나?

카일론은 알포레인 왕국이랑 인연 없는 따뜻한 남방의 프로센 왕국이 고향이다. 그 나라의 변변찮은 남작 가문의 차남.

내가 직접 가서 떡잎부터 질끈질끈 밟아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신, 용돈으로 암살자를 고용해볼 생각이지만 별 기대는 안 한다.

곁에 대마법사가 버티고 있을 테니까.

 

건달프! 그 괴물이랑 또 싸워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현기증이 돈다.

그때였다.

나를 힐끔 본 둘째 형인 베이너 알포레인, 내 접시 위에 남은 양고기 스테이크를 우아하게 포크로 콕 찍으며 말했다.

 

식욕이 없다고 음식을 남기면 쓰나, 아우님. 도축된 양이 섭섭해 한다고.”

“...역시 재치있으십니다, 베이너 형님.”

? 하핫! 나야 늘 그렇지!”

 

그 재치로 훗날 알포레인 왕국의 상권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그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거머쥔 큰형이랑 치열하게 다툰다.

지금은 그저 먹성 좋은 소년일 뿐이지만 말이다.

성격도 좋다.

추억을 반추한 거라서 미화가 많이 됐을지라도.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폐하.”

. 쉬어라, 테이너.”

 

둘째인 베이너하고 같은 배에서 태어난 테이너는 넷째다.

셋째인 나보다 조금 어린 11살로, 참가자격의 최소연령인 15살이 되자마자 검술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하고 검술의 천재로 등극한다.

바로 다음 해에 카일론 데미시안에게 완패하지만 말이다.

그때부터 애가 완전히 삐뚤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지금도 썩 좋진 않지만.’

 

능력과 인성이 별개라는 건 테이너 알포레인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두 형이 치열하게 정치 싸움을 할 때, 은밀히 기사들을 모아서 단숨에 왕성을 점령하고 왕위까지 찬탈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얍삽한 동생의 뒤통수를 쳐서 왕좌에 앉는다.

형제 중에서 살아남은 건 그렇게 나 혼자.

치열해질 뻔했던 후계다툼은 정말 자고 일어났더니 왕이 바뀌었더라.’ 수준으로 조기에 종결됐다.

과연, 이번에는 어떨지?

나처럼 반칙 쓰는 녀석들이 많아서 솔직히 모르겠다.

 

셋째 오빠. 무슨 생각 중이야?”

“...장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흐응~. 오빠가 여자에게 관심 많을 나이라는 건 잘 알았어.”

콜록!”

 

넷째인 테이너보다 한 살 어린 막내. 그리고 이 왕국의 유일한 공주님.

알포레인 왕국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반드시 이 아이만은 행복하게 해주자고, 우리 형제가 약속한 모두의 여동생이 바로 엔나 알포레인이다.

태어나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딸이 너무너무 갖고 싶어서 왕비들을 밤마다 괴롭힌 로한 알포레인 국왕 폐하의 폭주를 막아준 소중한 존재다.

여기서 왕자가 더 태어났다면 이 왕국은 갈기갈기 찢겼을 것이다.

 

. 우리 공주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폐하는 10살짜리 계집애의 통찰력을 무척 신뢰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오냐오냐 키웠는데도, 남편에게 순종적인 요조숙녀로 자라면서 한때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짙은 패배감에 젖었던 추억이 있다.

하지만 난 형제들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여동생을 정략결혼의 도구로 쓰지 않고 원하는 배필과 이어주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을 끝까지 지켜주는 데 실패했다.

 

내가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지.’

 

가족애는 이미 한물갔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반칙 쓰는 인간들끼리 벌이는 통수 싸움!

식사를 마치자마자 방으로 돌아와서 외출 준비를 했다. 내가 어릴 적에 사용하던 방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맸다는 건 비밀이다.

 

왕자님! 곧 남작이 올 시간이에요!”

실비아...?”

! 왕자님의 시녀 실비아에요! 건망증 작전은 닷새 전에 안 통한다는 걸 깨달으셨을 텐데요. 그래도 연기 실력이 많이 나아지셨네요.”

 

실비아?! 정말 실비아야? 진짜 실비아다!

내게 여체(女體)의 신비를 가르쳐주면서 미녀를 조심하세요.’라고 결혼 전날까지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경고하던 시녀다.

그랬던 소녀가 잘록한 허리에 양손을 걸친 채 문을 막고 서있었다.

감히! 왕자인 내 앞을!

...라고 훈계하는 건 꿈에서만 하자.

포쉐이크 제국에서 어머니가 보내주는 용돈을 관리하는 물주(物主)가 실비아다. 심지어 내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보고하는 업무도 겸하고 있어서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솔직히,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아, 실비아! 이번 생에도 내 시녀라서 정말 감사!’

가족들보다 훨씬 반갑다.

정말, 과거로 돌아온 보람을 느꼈다.

전쟁에서 패하고 더는 희망이 안 보이던 마지막 날, 내 발등에 입을 맞추면서 제 남자는 오직 폐하뿐이십니다.’라고 말한 후에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그런 충성과 순정은 넘어가고!

어머니가 나를 위해 엄격히 선별한 시녀답게 정말 나무랄 곳이 없다.

기사들을 줄줄이 달고 다닐 게 아니라면 실비아는 필수다.

나도 검술과 격투술은 그럭저럭 했었지만, 탑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지내면서 전부 까먹었다.

그러니 싸움은 전문가에게.

현명한 왕이라면 능히 그래야 한다.

 

실비아. 나랑 밖에 나가자!”

왕자님! 곧 남작이 올 거라고요!”

 

내게 제왕학을 가르쳤던 깐깐한 노인네가 있다.

올바른 왕이 되는 길보다는 사람을 믿지 말라고 세뇌하던 보수적인 귀족이었던 걸로 난 뚜렷하게 기억하다.

정말 우스운 일이다.

내게 믿지 말라고 가르친 사람만은 끝까지 믿었으니 말이다.

가장 경계했어야 할 인간이었다.

왕국 내에서 은밀히 능력우대사회를 선동하며 하위 귀족들의 배신을 부추겼다. 그걸 소탕한다고 빼앗긴 시간이 정말 뼈아프다.

마음 같아서는 이 노인네의 이마를 후려쳐주고 싶지만!

내가 왕이 된 후로 미뤄도 늦지 않다.

현재, 그 노인네는 둘째 형의 사람이라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대신에 애들답게 수업을 땡땡이칠 순 있다.

 

더는 배울 게 없어.”

네에?!”

태양은 뜨겁지만 아프지 않고, 날마다 보이지만 닿지 않지.”

그건...!”

왕이란 그러한 존재. 하지만 실비아의 왕은 내가 아니니 어쩔 수 없나.”

“......모시겠습니다.”

 

실비아는 옷장에서 망토를 꺼내 내 어깨에 둘러준다. 그리고는 정원에서 대기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복도를 지나갔다.

내가 그녀에게 해준 말은 별거 아니다.

변변찮은 소국을 포쉐이크 제국으로 성장시킨 챠르 포쉐이크 황제가 왕자이던 시절에 남긴 명언이다.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전생의 나였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몰랐을 것이다.

 

실비아.”

, 왕자님.”

음침한걸! 사악한 마법사 같아!”

 

시커먼 로브로 온몸을 감싸고 두건을 깊게 눌러쓴 실비아.

미색이 출중한 내 시녀란 걸 단번에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작고 갸름한 턱 위로, 자두색 입술이 벌어지며 꿍해 있는 미성(美聲)이 흘러나왔다.

 

“...황녀님께 이를 거예요.”

미안!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실비아!”

 

용돈이 줄거나 끊기면 앞으로 내 활동에 지장이 많다.

시녀에게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인생이 미끄러진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반칙까지 써놓고 왕은커녕 왕자로 생을 마감한다면 대대손손 수치다.

그러니 무조건 항복!

나의 상처 입은 체면은 밤에 앙갚음해줄 것이다.

 

왕자님. 정해둔 목적지는 있으세요?”

당연하지!”

 

나 같은 애송이가 가기에는 매우 위험한 장소.

알포레인 왕국에는 중앙대륙에서 가장 큰 검투장이 있다.

피 터지는 싸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경거리였지만, 징글징글한 전쟁 이후로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도 20년은 너무 길었나.

실비아가 어머니께 방탕한 왕자님이라고 보고할 게 뻔하니 무조건 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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