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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노멀! 파르나르

내 일상


[내 일상] [TOP-1장-2] 나도 반칙이다.

오오...’

 

참는다고 해놓고 내 시선은 계속 경기장에서 떠나질 못하고 있었다.

어서 상대를 죽이라는 관중들의 함성과 욕설, 광기...

무료한 탑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내게는 짜릿한 충격을 선사했다. 전란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났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저것도 인간.

달콤한 감상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왕으로서 해야 할-?

실비아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왕자님. 이걸 보자고 수업을 내팽개치신 건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

소녀는 왕자님께서 자세히 설명해주시지 않으면 모르는 우매한 계집인데요.”

 

세상에 왕자를 협박하는 시녀가 어디 있다고!

그런 불만은 실비아를 돌아보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펑퍼짐한 겉옷으로도 다 가릴 수 없는 그녀의 곡선을 본다면 누구나, 심지어 황제라도 그럴 것이다.

나는 여기에 놀러 온 게 아니다.

검투장에서 싸우는 검투사 대부분은 노예, 사형수다. 몇 번 이기면 자유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싸우는 자들.

혹은 돈과 명성을 목적으로 검투사를 자원하는 자들도 더러 있다.

 

썩 괜찮은 검투사가 있긴 한데...’

 

나는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자유를 준다고 오오! 생명의 은인이신 왕자님은 나의 주군!’이라면서 충성을 받히리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읽은 책들에 서술된 역사가 그 증거다.

카일론이 초창기 활동을 보면, 용병과 검투사, 노예 같은 비루한 자들을 도와주고 충성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 성과는 정말 대단했다.

하지만 한때뿐이었다.

데미시안 제국에서 20년 동안 발생한 수백 건의 반란은 모두 이들이 벌인 것이었다. 이유를 들자면 너무 많으니 생략.

게다가 나는 카일론이 아니다.

난폭한 싸움꾼을 감복시킬 재주가 없다.

 

실비아.”

.”

검투장의 노예들은 어째서 줄지 않는 걸까? 날마다 죽어나는 그들을 어디서 끊임없이 구해오는 걸까.”

“...노예상인이요.”

정답.”

그자들을 만나실 생각이신가요?”

. 이건 보험이랄까. 별 기대는 안 하지만, 경매장을 뒤지는 것보다는 직접 공수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실비아가 이해 못 하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찾는 자들은 엄밀히 따지면 노예상인이 아니다.

그들과 거래하는 사냥꾼.

노예는 꼭 죄를 지은 자들만 되는 게 아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기에는 멀쩡한 사람을 납치해서 노예로 만들기도 한다.

그런 만행을 저지르는 자들이 바로 사냥꾼이다.

 

놈들이 이상한 마음을 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실비아에게 흑심을 품는다면 좋지 않은 꼴을 당할 것이다.

연약하게 보여도 그녀는 정말 강하다.

제대로 함정을 파고 기다리지 않는 이상은, 사냥꾼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강자가 바로 실비아다.

우락부락해야 강자인 건 아니다.

마법사.

그래서 겉보기랑 달리 실비아는 나이가 좀 된다.

전생에는 이 내숭에 정말 완벽하게 속았었다! 그리고 자결할 때까지도 이팔청춘 소녀였던 실비아의 진짜 나이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노예를 직접 공수하신단 말씀이시죠?”

 

추궁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묻는 시녀.

일단은 두고 본다는 뉘앙스였다.

왕족과 귀족이 노예를 사는 건 그리 흠이 아니다. 그 반대급부로 노예매매를 금지한 나라도 더러 있지만, 전부 눈 가리고 아옹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프로센 왕국.

카일론 데미시안의 고향이다. 그리고 그 정책은 훗날 데미시안 제국으로 계승된다.

 

.”

“...여자인가요?”

, 아마도.”

 

식은땀이 뒷목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녀에게 쩔쩔매는 내가 한심하게 보이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왕이 된 후에야 저 노예는 앞으로 내 여자.’라고 정하면, 실비아는 어느 방에 넣을까요.’라고 자연스럽게 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왕자다!

가진 거라고는 왕족이란 허울뿐인 애송이.

왕자라고 하면 뭔가 있을 것 같지만, 변방의 남작 가문 후계자보다 별 볼 일 없는 경우도 숱하게 많다.

왕이 명하면 남작보다 쉽게 목이 날아가는 피라미가 왕자다.

그런 내게 실비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녀가 부담스러우신가요?”

그렇지 않아!”

“...그럼, ()내의 하녀 중에 마음에 드는 아이가 없었는지요. 저를 포함해서.”

 

뒷말을 특히 꾹 눌러 담듯 묻는 실비아.

대마법사 건달프가 나의 군대를 학살할 때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나지만, 눈앞의 시녀는 너무너무 무서웠다!

그 뒤에 환영처럼 어른거리는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맞아! 장차 황제가 될 이 몸이 시녀 따위에게 움찔했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서둘러 변명했다.

 

실비아가 최고지!”

“...처세술이 많이 느셨네요, 왕자님.”

고마워. 그거야말로 왕의 덕목... 정말이야!”

. 어서 앞장서세요.”

 

심통이 제대로 난 실비아가 재촉했다.

일기장에 왕자님이 드디어 여자를 알게 됐어요. 하지만 섭섭하게도...’라고 신경질적으로 휘갈겨 쓰는 시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오해를 산만큼 성과가 있기를!’

 

검투장에서 벌어들이는 모든 돈이 모이는 장소.

그곳에 드디어 발을 들여놨다.

물론, 내 안전을 위해 샤롤 알포레인 왕자라는 것을 사방에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를 납치한다는 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도록.

어린 왕자가 검투장을 들락날락하는 건 대단한 흠이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나에게는 어차피 왕위계승권이 없다.

게다가 아직 성인식도 안 치른 왕자의 평판 따위는 !’ 불면 날아갈 만큼 가볍고 하찮은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샤롤 왕자 저하께서 이런 피비린내 나는 도살장에 무슨 일이십니까?”

 

알포레인 왕국 검투장의 총책임자인 바루만이다.

덥수룩한 수염은 어리다고 남들이 얕잡아 보지 못하도록 기른 것뿐이다. 실제로는 젊은 청년으로 검투사에 지원해서 명성을 쌓고 총책임자까지 오른 실력자다.

정중하지만, 착하다고는 절대 말 못한다.

밤새 검투사들에게 범해진 여자들을 알몸으로 검투장에 내보내는 미친 짓을 저지를 만큼 대단한 악취미다.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검투장의 총책임자이긴 해도 지지기반이 약해서 마음대로 날뛰지 못한다.

 

상인들을 좀 만나고 싶어서.”

“...너무 뜻밖의 말씀이라 당혹스럽군요.”

 

겨우 13살짜리 왕자다.

아직은 순종적인 궁녀(宮女)들의 다리 사이를 돌아다닐 나이다. 이상한 성벽에 눈을 뜨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런, 바루만의 생각이 빤히 읽혔다.

 

대답은?”

왕자님의 명을 어찌 소인이 거절하겠습니까. 하지만 상인에도 여러 부류가 있나이다. 취급하는 노예가 제각각이지요.”

 

검투사 출신답게 당당히 설명한다.

하지만 애를 가르치는 말투가 거슬리고, 내 뒤에 선 실비아를 힐끔거리는 눈빛도 마음에 안 들어서 만류했다.

왕이라면 능히 대범해야 한다.

찔끔찔끔 움직이는 방식은 카일론 같은 기사 나부랭이나 하는 것이다.

...라고 느긋하게 생각할 틈이 없다.

지금은 시간 싸움.

누가 먼저 통수를 치느냐에 승패가 달렸다.

 

전부 불러주게. 제법 큰 건수라서.”

“...알겠습니다.”

 

고집스럽고 성가신 왕자라고 투덜대려는 표정을 간신히 수습한 바루만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본인도 표정관리에 서툴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검투사가 어울리지 않은 관리직을 맡아서 그런 거다. 하지만 그 어울리지 않는 총책임자를 맡은 이유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악취미 때문이다.

본색을 드러내려면 앞으로 몇 년 남았지?

내가 별것도 아닌 인물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노예상인들이 호출을 받고 경쟁하듯 몰려왔다.

그들에게 왕자는 돈 뿌리는 이다.

나도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리고 뿌릴 예정이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 가지고 싶은 여자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해도 용서되는 어린애라서 참 다행이다. 아니었다면 실비아의 무표정이 지금보다 더 무섭고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머니가 마법 통신으로 잔소리하시거나?

실비아가 철벽 방어에 들어간다거나!

그 어떤 보복이 기다리고 있든 어린 내게는 가혹하다.

 

어떤 여자인지 말씀해주시면 구해오겠습니다.”

플래티넘.”

...?”

다시 말해줄 테니 똑바로 들어. 플래티넘.”

“......”

구해올 수 있겠어?”

 

당당했던 상인들이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말한 플래티넘은 납치해서 노예로 부리기 쉬운 인종(人種)’이 아닌 까닭이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족이 있고, 그 특성에 따라 광물 이름을 붙였다.

위에서부터,

 

다이아(diamond)

플래티넘(platinum)

골드(gold)

실버(silver)

브론즈(bronze)

 

아래로 갈수록 수명과 능력이 변변찮은 대신 인구밀도가 높다.

왕족과 천재, 영웅이라고 불리는 족속 대부분이 [골드]에 속하고, 하위귀족과 평민이 [실버] [브론즈]에 해당한다.

셋째이긴 하지만, 알포레인 왕국의 정실이며 포쉐이크 제국의 황녀인 어머니를 둔 나에게 왕위계승권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다.

나는 [실버].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족.

어머니를 닮았다면 못해도 [플래티넘]이었겠지만, 희박한 출산율은 배신하지 않고 나를 [실버]로 태어나게 했다.

그렇다고 폐하가 [실버]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왕족답게 [골드]. 그 증거로 내 형제들은 전부 [골드].

그렇다고 내 운이 나빴던 게 아니다.

[플래티넘]끼리 결혼해도 높은 확률로 태어나는 [실버]에 걸렸을 뿐이다.

그 밑으로?

 

트롤(troll)

 

같은 인간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 멍청한 종족이다.

번식력은 다른 모든 종족을 합친 것보다 뛰어나고, 어떤 종족이든 [트롤]과 맺어지면 무조건 [트롤]만 태어난다.

무시무시한 전염병이라고 보면 된다.

가축보다 덜떨어진 지능은 공존이 아예 불가능한 수준이다.

 

왕자 저하.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상인들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다가 물었다.

당연한 질문이다.

정말 철부지 왕자라면 [플래티넘]이 아니라 [다이아]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건 대마법사를 납치해오라고 생떼 부리는 거나 다름없다.

나라 말아먹기 좋은 억지다.

그렇다고 [플래티넘]이 쉬우냐고 묻는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

실비아가 좋은 예다.

끝까지 저항하는 그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면 대마법사쯤 되어야 한다. 함정을 파둔다면 의외로 쉽게 쓰러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나는 함정에 빠진 [플래티넘] 여인을 잘 알지.’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 [플래티넘]은 곧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전생에서도 그녀는 어이없는 함정에 빠졌었다. 그리고 노예로 경매장에 올라갔을 때, 카일론 데미시안이 거금을 들여 구해준다.

아직 8살인 카일론이 무슨 돈으로?

당연히 아니다.

이건 앞으로 10년 뒤에 벌어질 미래다.

[플래티넘] 여인은 은인 곁에 남아서 헌신적으로 돕는다. 그리고 사랑을 키워서 마침내 데미시안 제국의 황후까지 오른다.

그렇다!

나는 미래의 황후를 낚아챌 생각이다.

 

엘리시스 데미시안.’

 

지금은 그냥 엘리시스.

상인들에게 이름까지 알려주고 노골적으로 노리면 내가 회귀했다는 걸 들키고 만다. 하지만 이래서는 무관한 [플래티넘]이 걸려들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함정에 빠져 노예로 팔리는 [플래티넘]은 정말 희귀하다. 그리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종족도 아니다.

 

경매장에서 매매되는 [플래티넘] 가격의 2. 그 미모가 출중하다면 10배까지도 쳐주지.”

“10?!”

선수금으로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 물론입니다! 왕자 저하!”

 

엘리시스가 [플래티넘] 중에서도 그 미모가 으뜸이라고 해도, 전생에 팔린 가격의 2배라면 변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10년 뒤에 벌어질 미래에 설레발 치는 이유?

나만 회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댓글 6

  • 001. Lv.38 魔공자

    15.06.14 08:43

    재미있네요

  • 002. Lv.63 철관음

    15.06.14 10:32

    Good 백원 드릴테니 한편만더 부탁해요

  • 003. Lv.97 kkeithmo..

    15.06.14 11:25

    not bad

  • 004. Lv.99 세이굿바이

    15.06.14 11:39

    재밌네요 ㅋㅋㅋ

  • 005. Lv.64 락생

    15.06.15 23:23

    괜찮은데 왜 봉인 하셨을까? 확실히 매일 쓰기 힘든 소재 같기는 하네요

  • 006. Lv.71 정체무실

    15.08.14 17:24

    -_-....
    일단은 괴수처럼이 완결되는걸 기다릴 수 밖에없나,,,?
    근데 그거 끝나도 이거 연재하시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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