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긴 꿈이 끝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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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꿈이 끝나고...**
박살이 새로운 힘을 받아들이려다가 순간 어긋나면서 그의 염이 육신에서 튕겨 나간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염 상태로 변한 그였는데, 염으로 변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어둠님...-
온 세상이 회색으로 보이는 곳에서 어둠이라는 단어가 들리자, 이 황당한 상황에 잠시 멍했던 박살의 염이 그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한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된다.
‘장동준!’
자신이 재판정에서 머리를 찍어 죽인 그자가 어둠이라는 사실에 그의 염이 흐려졌는데, 마침 눈이 마주친 어둠이 눈이 동그래지는 순간, 그의 몸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 뒤로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다시 스쳐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를 붙잡은 건 몇몇 사람들의 말들 때문이었다.
“박살님이 있었다면 이러지 않았어.”
“흑흑. 그분 말을 따랐어야 했는데.”
정신이 번쩍 든 그는 다시 주변을 떠돌았고, 죽어 나가는 사람들과 소멸되는 염들을 보며 슬퍼했다.
관여할 수 없게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보던 중 그는 어느새 어둠의 뒤를 따라 다니고 있었다.
어둠은 그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다.
쉬지 않고 사람과 염 사이를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그들을 위해 일했다. 단 한 번의 죄도 저지르지 않고 철저하게 남을 위해 사는 그의 모습에 박살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어둠이 자신의 옛 지인들, 나상훈과 이병악, 등과 만났을 때 장동준이라 부르며 저주하는 걸 보고는 그라는 걸 알고 다시 허탈감에 휩싸였다.
이번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박살은 그를 계속 관찰했다.
예전 변태적인 성욕과 살인을 일삼던 그라는 걸 전혀 모를 정도로 너무 모범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사는 어둠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고서야 박살은 그가 정말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강이슬을 설득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이끈 이후부터는 그를 좋게 바라보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당황하는 경우가 조금씩 늘어났다.
그게 어느 순간부터 호감으로 바뀌었고, 마음속 응어리가 사라져갔다.
세상이 자신 없이도 잘 돌아간다는 사실에 불안했던 마음마저도 사라지는 순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살...-
‘응?’
여성 목소리였는데,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염이 짙어졌다.
-박살내...-
‘뭐지?’
무언가 자신이 잊고 있었던 그리운 목소리라는 걸 떠올린 그가 집중하는 순간 그의 염이, 미소 지으며 앉아있던 박살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대갈통 박살내버리기 전에 안 일어나!-
걸걸한 여자 목소리와 함께 박살의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음...”
한 사람이 회색 소파 위에서 뒤척였다.
너 자신을 알라.
소파 뒷면에 유명한 철학자의 문구가 적힌 검은 바탕에 은빛 글자로 된 액자가 비스듬하게 걸려 있었는데, 은빛에 햇빛이 걸칠 때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붉은 고무장갑이 허공을 스치고 지나간다.
뻑.
“악!”
비명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부리부리한 눈썹을 한 이십 대 남성에게 그와 비슷하게 또래의 긴 머리 여성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소리쳤다.
“속상한 일 있으면 같이 먹던 가. 맨날 혼자서 동아리실에서 먹다 잠들면 어떡하라는 거야! 걱정했잖아!”
“이다인?”
“그래 다인이다! 네 여자 친구 이다인!”
뻑.
이다인이 휘두른 고무장갑에 머리를 다시 맞은 그가, 맞은 부위를 매만지며 입을 삐죽인다.
“말로 하면 돼지 그거로 왜 때려.”
“아까도 와서 불렀고, 나간 다음 다시 전화도 했는데 말도 없는데 내가 성질이 안 나!”
“그랬어? 미안. 내가 으으... 어제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나네...”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부여잡자. 이다인은 성난 표정을 누그러뜨리고는 탁자 위에 있는 컵을 내밀었다.
“자. 여기 꿀 물.”
“꿀 물 마시면 머리 더 아픈데...”
“대신 더 빨리 정신 차려서 나한테 덜 맞죠. 그러니 팔 떨어지기 전에 받아서 마셔요.”
“네...”
순한 강아지 마냥 꿀물이 담긴 컵을 받아 마시는 그를 보며 한 숨을 내쉰 이다인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학식 메뉴에 콩나물국 있으니까 식당에 가서 먹어. 그럼 속 좀 풀릴 거야.”
“다인이 너는?”
“알바 가야 해. 이따가 편의점에서 봐.”
“어.”
이다인이 나가고, 다시 혼자가 된 그는 꿀물을 다 마신다음 컵을 내려놓았다.
“으... 벌써부터 머리가 아픈 거 같네.”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주변을 살펴보던 박살은 소파 앞 긴 탁자 옆에 가지런히 놓인 신문 윗면을 바라본다.
-장동준 재벌 일가의 충격적인 사생활! 조폭보다 더 무서운 재벌과 경찰의 유착관계에 대해서 파헤치다.-
“으... 장동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더니만...”
그의 시선은 자신 앞에 있는 노트북 화면으로 이동했다.
-세상이 조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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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꿈이 끝나고...**
....
“아우... 내 대갈통이 조각나게 생겼네.”
다시 관자놀이를 주무르던 그는 계속 중얼거렸다.
“어쩐지 내가 꿈꿨던 세상대로 되더라... 에이 괜히 이딴 삼류 소설이나 읽어... 에휴... 술 마신 내 잘못이지, 글 싸지른 작가가 잘못은 아니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는 글 마지막 부분에 있는 한 줄을 읽고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끝이라고? 시간 때울 무료 글 하나 사라지네. 그래도...”
드르륵.
끝까지 아래로 내린 그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재미있었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작품 봤으면... 이라고 적는 건 낯간지러우니깐, 그냥 재미있다고만 하자.”
탁.
엔터를 누르고 기지개를 켠 그는 하품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빨리 밥 먹고 다인이 일이나 도와주러 가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비틀거리며 걸어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쿵.
문이 닫히면서 생긴 충격에, 입구 옆 벽면에 붙어있던 포스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장춘몽 철학 주점으로 와!
가격 박살! 서비스 작살!
우리 모두 술안주 지옥에 빠져보자!
*끝*
- 작가의말
제 모자란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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