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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풍(雲風)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한밤의 손길

<1> 사건의 발단

 

아직 5월 중순인데도 한여름의 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무더웠다.

2020년과 21년에 그토록 극성이던 코로나19도 이제 독감, 폐렴처럼 예방주사 한 방으로 대비할 수 있게 되어, 사람들의 생활도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여기는 충청북도 Y.

 

날이 어둑해지자 직장에서 막 퇴근한 이선애는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정성스럽게 화장했다. 데이트를 하러 나가기 위해서였다.

올해 스물여덟인 이선애는 나름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일찍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그럼 노처녀로 늙어 죽을 거냐?”는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두 달 전에 선을 봤고, 지금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상대방인 황선길을 만나고 있었다.

 

시내의 양식 레스토랑에서 만난 이선애와 황선길은 비프스테이크를 맛나게 먹고 나서 포도주로 입가심을 했다.

Y시는 20여 년 전부터 시청이 앞장서서 지역특산품인 포도를 이용하여 포도주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상당히 좋은 제품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게다가 올해는 날씨도 좋아서 그런지 포도나무가 유난히 잘 성장하고 포도송이도 눈에 띄게 굵었다. 포도 농장을 하는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포도와 포도주 판매를 통한 수익으로 뭘 하면 좋을까 하고 미리 계획을 세우는 농장주들도 상당했다.

 

식사를 마친 선애와 선길은 바람을 쐬러 근처의 야산으로 올라갔다.

비록 정장을 하고 산책하는 게 좀 어렵겠지만, 두 사람이 요즘 부쩍 가까워진 터라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할 생각이 간절해서였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어떤 도시나 마찬가지로 Y시도 둘레길을 잘 만들어놓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야산 중턱의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간 두 사람은 평탄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껴안고 열렬히 키스했다. 한참 동안 서로의 몸을 더듬던 그들은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대화하기 시작했다.

 

선애 씨, 우리 내년 봄에 결혼할까? , 올해 말에 승진도 하고, 연봉도 꽤 오를 것 같으니 결혼생활을 하는 건 문제 없을 것 같아.”

 

올해 서른둘인 선길은 Y시에서 6만 평에 달하는 포도농장을 운영하며 포도주 생산공장과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는 김대룡 회장의 회사인 대룡산업에서 영업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퇴근하기 전에 영업이사의 집무실로 불려가서 올해의 영업실적에 관한 전망을 보고했을 때, 이사는 이대로만 잘 되어 가면 올해 말에는 차장으로 승진할 수 있다고 넌지시 귀띔해줬던 것이다.

 

... 좀 더 있다가 결혼해도 되지 않아? 아직 아파트를 살 돈도 다 마련되지 않았고,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고...”

 

사실 선애는 서른이 넘을 때까지는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여행하고 싶은 곳도 많았고, 무엇보다도 결혼생활에 얽매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길이 잘 생긴데다가 집안도 괜찮고, 다니는 회사도 그런대로 탄탄한 것 같아 이러한 만남을 계속 유지하며 지내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2년이나 더 기다려? 나만이 아니라 우리 애들은 어떡하라고? 선애 씨 말대로 한다면, 우리 애가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취직하면 내가 환갑 된단 말이야. 그렇다고 내가 선애 씨와 맘대로 연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애는 선길의 말에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오늘 몸을 허락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두 달 넘도록 손을 잡고, 가벼운 페팅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몸만은 결혼할 때까지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사귀는 동안이라도 나쁜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항상 만일에 대비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귓가에 쟁쟁했기 때문이었다.

 

결혼 문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더라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선애의 몸을 차지하고 말겠어.’ 선길은 굳게 마음먹고 선애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그동안 산들바람이 불어와 시원했던 주변 공기가 갑자기 후끈해졌다.

선길은 내가 욕정이 들끓어 이렇게 느껴지는 건가?’ 하며 의아한 기분을 애써 가라앉혔다.

왼손으로 선애를 끌어안고 오른손을 치마 속으로 집어넣은 순간, 선애가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 이게 뭐야!!... 아아악!!”

 

갑자기 누가 잡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선애의 몸이 확 젖혀졌다.

황급히 선애의 뒤쪽을 쳐다보던 선길은 눈을 부릅뜨며 말을 더듬었다.

 

..안 돼! 넌 뭐야? 뭐냐고? 이러지 마!!”

 

하지만 선길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축 늘어진 선애의 몸이 뒤쪽으로 순식간에 끌려갔다. 가만히 살펴보니 선애의 목과 허리춤에 밧줄 같은 게 걸려있었다. 그런데 굵직한 그 밧줄이 굼실굼실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선애의 몸이 점차 쭈그러드는 것 같았다. 물에 흠뻑 젖은 수건을 짜듯 부피가 줄어들었다.

 

미라처럼 바싹 말라버린 선애의 몸뚱이를 위로 쳐든 괴물체에서 밧줄 같은 게 두 가닥 뻗어 나와 선길을 덮쳤다.

얼떨결에 바닥에 주저앉아 밧줄을 피한 선길이 희미한 달빛 아래 서서히 움직이는 물체를 노려보는 순간, 휙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에 나무 이파리 같은 게 술렁이며 피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놀랍게도 괴물체는 나무였다!!!

포도나무 같은 게 잎사귀를 펄럭이고 덩굴을 사람 손처럼 휘두르며 아주 느리지만, 정확한 몸짓으로 선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무가 정말 맞기는 한 건가?’

 

선길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서서 뒤쪽으로 냅다 달렸다. 뭔가가 머리카락을 붙잡고 가슴을 옭아맸지만, 거칠게 뿌리치고 그저 달리기만 했다. 그런데 흥분한 나머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 점점 산 위쪽으로, 숲이 더 깊은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지경에 이른 선길의 눈앞으로 터널의 끝 같은 불빛이 보였다.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뻗어져 나온 나무 덩굴이 선길의 발목을 휘감았다.

순간적으로 빈혈 증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어지러운 느낌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억지로 발목에 감긴 덩굴을 풀어내려고 하자 덩굴이 꿈틀거리며 오른쪽 손목까지 휘감으려는 듯 바르르 떨며 기어올랐고, 발목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선길은 진저리를 치며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 필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아뿔사!!

그런데 갑자기 엉덩이에 아무것도 닿는 느낌이 없어지며 허공에 둥실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아악!!!”

 

선길은 도로를 만들면서 깎아내어 생긴 20미터 높이의 벼랑에서 떨어졌고, 재수 없게도 바닥에 튕겼다가 튀어나온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고 길가의 배수구로 떨어졌다.

 

두 연인의 목숨을 앗아간 야산은 오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으며 무심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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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2, 월요일

 

월요일, 출근 시간이 되자 선길과 선애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자그마한 소동이 벌어졌다. 두 사람 다 그동안 지각 한번 없었던 터라 무단결근으로 인해 회사안이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선길의 회사에서는 인사과장이 직원들의 출근 여부를 확인하고 돌아다니던 중 영업과장이 결석했다는 소리를 듣고 직접 전화해 보기로 했다.

선길의 휴대폰 신호음은 계속 들렸지만, 계속 수신이 되지 않은 채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기만 했다. 할 수 없이 인사서류를 확인하여 선길이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으로 전화했다.

 

어머님, 저는 선길 씨 회사 인사과장입니다. 혹시 선길 씨가 오늘 몸이 안 좋은가요? 출근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어머, 우리 아들이 출근하질 않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금요일 밤부터 연락이 되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었는데요... 결혼할 아가씨와 데이트하고 들어온다고 했는데, 금요일부터 안 들어왔어요. 혹시 둘이서 여행을 떠났다가 월요일에 바로 출근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 알았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겨서 늦는 건지도 모르니 좀 더 기다려보겠습니다. 회사로 출근하면 집으로 연락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집으로 연락오면, 저희에게도 연락해주시고요. 안녕히 계십시오.”

 

이와 같은 통화는 선애의 집과 회사 간에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역시 서로에게 아무런 정보를 줄 수 없었다. 역시 기다리기로 하는 수밖에...

 

이틀이 지난 수요일, 선길과 선애의 집, 그리고 양쪽 회사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제출했다.

 

지역파출소에서 조사를 나간 강철호 경장은 양쪽 집을 찾아가 사정을 청취했다. 시큰둥하게 수첩에 메모해가던 강 경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젊은것들이 바람나서 가출한 거로구만. 나이는 먹을대로 먹었으니 얼른 살림을 차리면 될 걸 그걸 못 참고... ... ... ! 난 언제나 이런 조사 그만둘 수 있나?’

 

하지만 회사에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일단 선길의 지위가 영업과장인 터라 혹시라도 회사로 들어올 수입금을 갖고 튀지 않았나 하는 의심에, 장부를 대조하고 상대회사에 연락을 취하는 절차를 걸쳐야 했다. 하지만 세 시간의 조사 끝에도 아무런 의심점은 드러나지 않았다.

 

강 경장은 파출소장인 허용만 경위에게 조사사실을 보고하고, 소장의 지시에 따라 상급기관인 충북경찰서로 보고를 올렸다.

 

충북경찰서 실종자 담당 나한석 경사는 오늘 Y시에서 올라온 실종자보고서를 읽으며 이마를 찌푸렸다. 5월 들어 유난히 실종자 신고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Y시 주변에서 실종사건이 많았다.

하지만 포도 관련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유입되었던 터라, 하는 일이 고돼서 몰래 도망쳤거나 취업비자 기간이 끝나 불법체류자가 되는 바람에 몸을 피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다만 뜬소문이긴 하지만, Y시 주변에서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동물들, 그중에서도 유기견이나 유기묘가 요즘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소리도 널리 퍼지고 있었다.

 

한편, Y시 야산 옆을 지나던 자동차 한 대가 갓길에 차를 세웠고, 차 안에서 강아지를 품에 안은 여자가 내렸다. 강아지를 내려놓자 구석으로 달려가 소변을 봤다. 평상시 같으면 볼일을 마치면 바로 달려올 녀석이 귀를 쫑긋 세우며 배수로 쪽으로 달려갔다.

 

케리, 뭐 하니? 얼른 집에 가야지.”

 

주인이 불렀음에도 케리는 연신 짖어댔다. 짜증이 난 주인이 케리 곁으로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고개를 쭉 빼들어 배수로를 들여다보다가 비명을 질렀다.

 

! 저게 뭐야!?”

 

주인은 무릎에서 힘이 빠지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거의 무릎걸음으로 차 쪽으로 기어가서 휴대폰을 집어 들고 1, 1, 2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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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일상 | 한밤의 손길 21-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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