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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호의 서재입니다.

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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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설호(雪虎)
작품등록일 :
2011.04.03 23:48
최근연재일 :
2011.04.03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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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8,359

작성
11.03.1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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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미령(美靈)-26

DUMMY

찌개가 차갑게 식은 것을 보니 차린 지 몇 시간은 된 것 같았다. 찌개를 데워 늦은 아침을 끝낸 영욱은 설거지를 하며 미령이 밥상 차려준 것을 갖고 거래가 성립됐다고 주장할 것 같아 꺼림칙했다. 하지만 이것은 요구한 적이 없으니 만약 그렇게 하면 끝까지 우기겠다고 다짐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소설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웬일인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늦잠을 자긴 했지만 그 보다는 푹푹 찌는 더위가 문제였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영욱은 한두 시간 눈을 붙일 생각에 그늘이 진 안방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영욱은 두 시간이 지나도 꼼짝하지 않았고 어느새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영욱이 일어난 것은 서늘한 바람을 느끼고서였다. 그런데 기온이 떨어지면서 시원함을 느낀 영욱이 저녁 먹을 생각에 눈을 떴을 때였다.

“웬일로 이 시간에 자고 있어요?”

미령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영욱이 시계를 바라보니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다. 잠깐 한눈 붙인다는 것이 그만 하루 종일 누워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잠이 덜 깬 몽롱함에서 벗어난 영욱은 자신이 생각해둔 조건을 하나둘 되새겼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토록 굳게 다짐했는데 막상 미령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속내는 영욱의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영욱은 옳거니 잘됐다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하고 고민 중이었는데 미령이 도움을 준 것이다.

“할 얘기가 있어요.”

“뭐 부탁하시게요?”

“아뇨. 우리 거래에 대해 다시 얘기했으면 해요.”

“하세요.”

그때까지 미령의 눈치를 보던 영욱은 계획대로 돼가는 것에 더욱 차분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난 지금까지 주기만 했지 받은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난 아직 거래가 성립된 것은 아니라고 봐요. 미령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렇긴 하죠.”

“그렇다면 약속을 깼다고 볼 수는 없는 거죠?”

미령은 대답이 없었다, 그것을 할 말이 없어 그런 것으로 받아들인 영욱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조건을 구체적으로 정하려고 해요.”

“구체적이라면?”

“이 거래는 내가 재혼하기 전 까지만 유효한 걸로 해요.”

재혼이라는 말에 미령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조금 전까지 내리깔고 있던 눈엔 차가운 기운이 돌았다. 영욱도 그것을 보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계약을 위반한 것도 아닌데 어제 그런 폭력을 썼으니 그 대가로 내 제안을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여기서 끝내던지 해요.”

그 이후 안방엔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영욱의 담배연기만 어수룩한 달빛에 흩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미령은 결심을 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대신 이집에서 나가주셔야 해요.”

미령이 내세운 조건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지만 상대가 지은이 됐든 누가 됐든 이런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할 거예요. 단, 이집은 분명 내 소유이니 다른 사람한테 팔릴 수 있도록 협조해 준다면 그렇게 할 게요. 새로 이사 온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먼저 주인처럼 내쫓으면 되니까 미령씬 손해 볼 것이 없죠. 대신 재혼하기 전까지 나 역시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럼 됐죠?”

그렇게 해서 평생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평생이라는 단어가 재혼 전까지로 바뀐 이후 영욱은 전보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미령을 받아들였다. 미령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평생 귀신과 살아야 하는 것은 짐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생각했던 대로 되었으니 이제는 하루 빨리 재혼을 서두르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간밤에 미령과의 거래를 끝낸 영욱은 외출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하얀 옆머리가 염색되는 동안 지난번 백화점에서 사온 옷들을 모두 꺼내 놓고 하나씩 입었다 벗었다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약속시간을 한 시간 앞두고 셀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 영욱은 자신이 서두르고 있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혹시 길이라도 막히면 어쩌나 하여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로 향한 것이다. 십년이 넘은 지금 지은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느라 어쩌다 신호 대기시간이 길어질라치면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약속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아직 시간이 30분이나 남아 있었지만 창가 쪽에 자리를 잡은 영욱은 드나드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느덧 약속시간이 가까워오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한 여자가 얌전하게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영욱은 직감적으로 지은을 알아보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큰 사고를 겪어서인지 한눈에도 수척해 보이는 지은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한 번에 영욱을 알아보았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나 많이 늙었지?”

“그래도 눈빛은 여전하시네요.”

“눈빛만 그렇지. 뭐.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네.”

“혼자 지내기 적적하지 않아?”

“처음엔 좀 그랬는데 이젠 많이 적응됐어요.”

가까이서 보는 지은의 얼굴엔 작은 상처들이 화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상처들은 얼마나 큰 사고를 당했었는지를 짐작케 했다.

“지금 보니까 많이 다쳤었나 보네.”

“병원에서 그러는데 죽지 않은 게 기적이었데요.”

“전에 말했던 후유증은 뭐야?”

지은의 몸 상태는 영욱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지금은 옷으로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사고 당시 가슴과 복부가 파열되고 왼쪽 팔도 거의 절단되다시피 하여 여기저기 수술자국들이 얽혀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빠른 구조 덕에 절단될 뻔 했던 팔은 접합수술로 회복되었지만 한쪽 가슴과 자궁을 모두 들어내야 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정작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사고 당시 차체를 뚫고 들어온 파이프 하나가 그녀의 다리사이를 파고들면서 가장 중요한 부위를 손상시킨 것이다. 그 바람에 지은은 평생 약을 달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이성과의 육체적 교감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가해자로부터 받은 보상금과 보험금이 있어 경제적으로는 넉넉했지만 인간의 본능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좌절감이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이다. 눈에 이슬이 맺힌 채 이야기를 끝내는 지은을 바라보던 영욱은 지난날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 그렇게 만든 것 같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전무님 왜 그러세요?”

“지은이가 그렇게 된 것이 다 내 탓 같아서.”

“전무님 탓이라니요?”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만 않았어도.”

“제가 이렇게 된 건 사고 때문이지 전무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날 저녁 지은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면서 그녀에게 빚을 졌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지난 뒤였고 거실엔 미령이 영욱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으셨네요?”

“왔어요?”

거의 사무적인 말투에 평소와 다른 영욱을 발견한 미령은 뭔가 일이 있었음을 짐작했고 그로부터 느껴지는 여성의 기운에 표정이 굳어있었다.

“누구 만나셨어요?”

“네.”

영욱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미령의 표정은 걱정스러움으로 변해 있었다.

“여자의 기가 느껴지던데.”

“아는 여자를 만났어요.”

“좋아하시는 분인가 보죠?”

“네. 그런데. 아니 그만 둡시다.”

무슨 말을 하려던 영욱은 마음을 바꾸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새 옷 냄새가 나네. 바람이라도 피우셨나?”

가뜩이나 잔뜩 가라앉은 데다 일종의 죄책감 때문에 속이 편치 않았던 터에 미령의 조잘거림은 그의 억제된 감정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이혼한 사람인데 무슨 바람 이예요? 바람이.”

“전 그저.”

“당신하고 관계없는 일에 쓸데없이 나서지 말아요.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너무 심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죄송해요.”

“뭐야? 눈은 희멀건 해갖고.”

그런데 영욱이 홧김에 내뱉은 이 말은 미령의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온 몸에 검은 색이라곤 머리카락뿐인 미령에게 하얀 눈썹과 눈동자는 콤플렉스였다. 비록 귀신이었지만 미령도 사람 같은 용모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저승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육신이 썩어버렸으니 영원히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미령의 아픈 곳을 건드렸으니 어제 같았으면 영욱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은의 일로 속이 상해있던 영욱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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