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호의 서재입니다.

미령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설호(雪虎)
작품등록일 :
2011.04.03 23:48
최근연재일 :
2011.04.03 23:48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13,796
추천수 :
1,256
글자수 :
98,359

작성
11.03.09 17:40
조회
2,319
추천
25
글자
7쪽

미령(美靈)-24

DUMMY

머리는 허리를 덮을 정도로 자라 있었고 얼굴도 전보다 파리해진 모습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요?”

“그렇게 보여요?”

“네.”

미령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차분하게 털어 놓았다. 살면서 하늘이 준 삶과 육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오직 돈 버는 데만 이용했던 업보 때문에 저승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업보를 떼어 내지 못하는 한 오직 어둠 속에서만 존재해야 했고 햇빛은 물론 어떤 빛에도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존재할 수 있는 하나는 남아있었다. 그것은 달빛이었다. 달빛은 음기를 담고 있어 그녀가 가끔 일광욕 하듯 쬐기도 하는 빛이었다. 그런데 지난번처럼 빛에 노출되고 나면 그녀 몸 속에 있던 음기를 빼앗겨 회복될 때까지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랬군요. 미안해요.”

“제 잘못이죠. 미리 말했어야 하는 건데.”

또 다시 그녀의 노예가 된 영욱은 이것도 팔자려니 하는 체념 속에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부터 푹푹 찌던 날씨는 오후가 되면서 구름이 끼더니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비룰 쏟기 시작했다. 시원해진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던 영욱은 그 옛날 지은과 데이트 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경미를 만나기 전까지 영욱에겐 지은이 유일한 여자였다. 물론 그것은 그녀의 배경을 알기 전까지였고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빗속을 걸으며 장래를 약속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녀의 배경을 알고 난 뒤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고 집에서도 탐탁지 않게 생각해 마음을 바꿨던 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은과 결혼했다간 평생 전세방을 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지만 세월 속에 떠나버린 버스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후회막급이었다. 그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지은과 결혼했더라면 인생 속에 이혼이란 단어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귀신과 동거해야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뒤늦은 후회를 하며 상면에 젖어 있던 영욱은 진동음을 듣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무님. 안녕하세요?”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지은이었다.

“잘 지냈어?”

“네. 전무님은요?”

“나야 늘 그렇지 뭐.”

“사모님도 안녕하시죠?”

“집사람?”

지은이 경미의 안부를 묻자 언젠가는 결국 알게 될 것이었고 마침 홀로된 지은은 붙잡고 싶은 마음에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경미에게 평생 이용만 당한 자신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지금의 영욱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지은은 듣기만 했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 이혼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 지은이 오해할까 하는 마음에 스스로를 변호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경미와의 이혼 얘기를 끝낸 영욱은 그 옛날 지은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을 사과했다.

“다 지난 일인데요 뭐.”

“아무튼 지금은 너무 후회스럽네. 그건 그렇고 몸은 좀 어때?”

“이젠 괜찮아요.”

“전에 후유증 있다더니?”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죠.”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현대 의학으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욱은 지은이 신체 일부분에 장애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이 궁금해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조만간에 우리 한번 만나지.”

“네. 저도 그러고 싶어요.”

“언제쯤이 좋을까?”

“요즘은 더워서 좀 그렇죠?”

“다음 주면 더위 간다고 하니까 지은이 편할 때 언제든 전화해.”

“네. 그럼 전화 드릴게요.”

드디어 지은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영욱은 그녀가 어떤 모습이든 이번만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직 밖엔 비가 오고 있었다. 지은을 보기로 한 것은 다음 주였지만 공연히 조급해진 영욱은 옷장을 열어 지은을 만나러 갈 때 입을 옷을 골랐다. 그러나 평생 직장생활만 했던 탓에 입을 만한 것이라곤 양복뿐이었다. 자신에 비해 9살이나 어린 지은을 만나러 가는데 양복을 입기는 어딘지 어색했다. 그렇지 않아도 희끗희끗해진 머리에 양복만 입으면 서너 살은 더 들어 보인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 자칫하면 부녀간으로 오인 받을 수도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서랍 속까지 뒤졌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애들 마냥 청바지 데기를 걸치고 갈 수는 없어 생각 끝에 집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는 백화점을 찾았다. 최대한 젊어 보일 수 있도록 캐주얼 한 것으로 여름 점퍼와 셔츠 그리고 바지 몇 벌을 골랐는데 영욱이 고른 바지는 모두 허리가 남고 있었다. 집에 있는 바지를 기준으로 고른 것인데 막상 입어보니 주먹하나는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였다.

‘언제 이렇게 됐지?’

남들은 뱃살 빼기 위해 돈까지 들이는 마당에 영욱은 힘들이지 않고도 다이어트가 된 것이다. 사실 이혼한 뒤 속상한 마음을 애써 부정해왔다. 그들을 위해 평생을 받쳤으면서도 가족들에게 등 돌림을 당했는데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었겠는가? 그제야 영욱은 그동안 많이 수척해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매장에 설치된 전신 거울에 비쳐보니 전보다 훨씬 말라보였다.

‘오히려 잘됐어. 살 빠지면 젊어 보인다고 하잖아.’

서글퍼진 마음을 그렇게 달래며 집으로 돌아 온 영욱은 새로 산 옷들을 정성스레 정리했다. 집에 들어올 때만 해도 주르륵거리던 비는 어느 새 장대가 되어 건너편 아파트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퍼붓고 있었고 베란다 바닥은 이미 들이친 빗물로 흥건했다. 걸레로 의자에 고인 빗물을 닦아내던 영욱은 안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베란다에서 보는 안방은 아주 색 달랐다. 특별히 인테리어를 한 것도 아닌데 커튼 사이로 보이는 침대는 상당히 아늑해 보였고 거기에 조명만 갖춘다면 분위기 있는 침실로 변할 것 같았다. 영욱은 만약 지은과 결혼하면 그런 분위기에서 살고 싶었다. 점심을 변변치 않게 먹어서인지 저녁때도 되기 전에 시장기를 느낀 영욱은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 비빔밥으로 저녁을 때웠다. 게걸스럽게 저녁을 먹어치운 영욱은 끈끈해진 몸을 샤워로 씻어내고 침대에 누웠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었지만 어젯밤 갑자기 돌아 온 미령 때문에 잠을 설친데다 백화점에 다녀오느라 좀처럼 하지 않던 외출로 노곤해진 것이다. 지은과 만날 일을 생각하며 막 눈을 감으려던 영욱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은과 잘되어 결혼을 한다고 해도 미령이 찾아오면 어찌해야 하는가?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한 집에서 여자 둘과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거래를 시작했으니 지은과 결혼하다고 하면 자신을 놓아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잠은 달아나버렸고 애꿎은 담배만 축내는 사이 자정이 되자 방안엔 서늘한 기운이 돌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미령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2 미령(美靈)-독자 여러분께 올림 +18 11.04.03 1,367 17 2쪽
31 미령(美靈)-31 +3 11.03.13 1,840 30 8쪽
30 미령(美靈)-30 +5 11.03.13 1,920 25 7쪽
29 미령(美靈)-29 +4 11.03.12 1,851 28 7쪽
28 미령(美靈)-28 +1 11.03.11 2,030 28 8쪽
27 미령(美靈)-27 +4 11.03.11 2,023 25 8쪽
26 미령(美靈)-26 +5 11.03.10 2,018 22 9쪽
25 미령(美靈)-25 +5 11.03.10 2,189 27 7쪽
» 미령(美靈)-24 +6 11.03.09 2,320 25 7쪽
23 미령(美靈)-23 +6 11.03.09 2,247 26 7쪽
22 미령(美靈)-22 +7 11.03.08 2,500 28 7쪽
21 미령(美靈)-21 +8 11.03.08 2,601 27 7쪽
20 미령(美靈)-20 +5 11.03.07 2,595 30 7쪽
19 미령(美靈)-19 11.03.06 2,438 23 7쪽
18 미령(美靈)-18 +2 11.03.06 2,579 27 7쪽
17 미령(美靈)-17 +2 11.03.05 2,609 39 7쪽
16 미령(美靈)-16 +2 11.03.04 2,620 24 7쪽
15 미령(美靈)-15 +2 11.03.03 2,569 24 7쪽
14 미령(美靈)-14 11.03.02 2,738 23 7쪽
13 미령(美靈)-13 11.03.01 2,766 24 7쪽
12 미령(美靈)-12 +1 11.02.28 2,867 24 7쪽
11 미령(美靈)-11 11.02.27 2,689 22 7쪽
10 미령(美靈)-10 11.02.27 2,861 23 7쪽
9 미령(美靈)-9 +1 11.02.26 3,034 22 7쪽
8 미령(美靈)-8 11.02.25 2,945 24 7쪽
7 미령(美靈)-7 11.02.24 3,072 22 7쪽
6 미령(美靈)-6 +5 11.02.23 2,991 23 7쪽
5 미령(美靈)-5 +2 11.02.23 3,058 25 7쪽
4 미령(美靈)-4 +2 11.02.23 3,261 27 7쪽
3 미령(美靈)-3 +4 11.02.22 3,393 29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