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령(美靈)-8
“글쎄 그렇대.”
“누군지 고생 꽤나 하게 생겼네.”
영욱은 이들이 얘기하는 집이 자신이 사는 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문 정말이야?”
“나도 몰라.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전에 새벽이 집에 오다가 그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봤대.”
“어머나, 그럼 누가 사는 거야?”
“살기는 내내 빈집이었는데. 귀신이면 모를까 누가 거기 들어가겠어?”
영욱은 어디 귀신 나오는 집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사이 계산을 끝낸 여자는 영욱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만 오천삼백 원입니다.”
영욱은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이 동네 새로 이사 오셨어요?”
“네.”
“어쩐지 낯이 설다 했지. 어디로 오셨는데요?”
“저 앞 아파트로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앞으로 자주 이용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런, 음료수를 깜박했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전 주로 박스로 사다 먹는데 배달도 가능합니까?”
“그럼요. 동 호수만 얘기하시면 바로 배달해 드릴 게요.”
“131동 1116호 입니다.”
“네? 131동 1116호요?”
여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131동 1116호는 조금 전 자신들이 수다를 떨던 그 집이었던 것이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얼마 더 드려야죠?”
“한 박스니까 만이천원입니다,”
음료수 값을 지불하고 슈퍼에서 나오던 영욱은 갑자기 뒤통수가 따가웠다. 슬쩍 돌아보니 주인여자와 같이 수다를 떨던 여자가 뭔가 수군거리다 영욱과 눈이 마주치자 이내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영욱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여자들이 으레 그러려니 하고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 앞에 도착해 막 열쇠를 꽂으려고 하던 영욱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집안에서 TV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내가 TV를 안 껐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방에서 TV 소리가 들려왔다.
‘나 참.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건지.’
영욱은 어차피 저녁때도 다되고 하여 TV는 그대로 둔 채 저녁을 준비했다. 밥이 다 되어 갈 즈음 차임벨 소리에 영욱이 현관으로 가는데 밖에서 누군가 급히 뛰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누구지?’
영욱이 현관으로 나가는 사이 밖에서는 누군가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본 영욱은 뜻하지 않은 광경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문 앞엔 음료수 박스만 놓여 있고 배달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박스를 다용도 실로 옮긴 뒤 그중 한 병을 꺼내 냉장고에 넣었다. 마침 밥이 다 되어 저녁을 먹기 시작한 영욱은 식구들 생각을 했다.
‘그것들도 지금쯤 저녁 먹고 있겠군. 괘씸한 것들.’
처음엔 혼자 먹는 밥이 맛이 없어 대충 몇 숟갈 뜨고 말던 것이 이제는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네까짓 것들 없어도 나 이렇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
홧김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맛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영욱은 게 눈 감추듯 그릇을 비우고 설거지를 끝냈다. 생전 해본 적 없는 설거지였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전에 집에 있던 파출부를 능가할 정도 속도가 붙어있었다. 그릇들을 건조대에 담고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켠 영욱은 TV를 보며 앞으로 살아갈 생각을 했다. 환급받은 보험금을 합해 통장에 6억이 있긴 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놀고먹을 수는 없었다. 지난 한 달간 생활비를 따져보니 관리비를 합쳐도 50만원이 채 안 되었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붙을 이자를 감안하면 10년 이상은 족히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남은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물론 살아온 날들에 비해 남아있는 날들이 많은 건 아니지만 영욱의 성격에 그 남은 날들을 무의미하게 보내긴 싫었다. 그보다는 자신을 배신한 그것들에게 번듯하게 성공한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고 특히 경미가 가슴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뭘 하지?’
침대에 누워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지만 영욱의 나이에 딱히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기술이나 든든한 인맥도 없고 평생 봉급쟁이만 했던 데다 든든한 처가가 사라졌으니 개인 사업을 할 자신도 없었다. 더구나 요즘 같은 불경기에 어디 투자라도 했다가 몽땅 날릴 것이 뻔해 그것 또한 마땅치 않았다. 한때는 아파트 경비 자리를 알아본 적도 있지만 그것도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고 하다못해 막노동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평생 운동하고는 담을 쌓았던 터라 지금의 체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영욱은 요즘 체력이 떨어진 탓인지 또 다시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에 빠져 있던 영욱은 욕실에서 나는 소리에 문을 열었다.
“이봐요. 아직도 있었어요?”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말 안 들려요?”
영욱이 화가 나서 채근했지만 여자는 등을 돌리고 앉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이거야 원. 말했잖아요. 이 집은 내가 샀다고. 어서 나가요.”
답답한 마음에 여자의 등을 찌르자 여자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등기부등본 다시 봐요. 여긴 내 집이라니까요.”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는 영욱에 비해 여자는 전혀 감정의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갱신이 안돼서 그런 가 본데. 어쨌든 내 집이니 당장 나가 주세요.”
“글쎄 확인해 보라니까요.”
영욱은 등기부등본을 꺼내 소유권자를 확인했다.
“자 봐요. 내 이름으로 되어 있지 않소?”
영욱이 건네준 서류를 한장 한장 넘기던 여자는 손을 멈추고 서류를 돌려주며 비웃으며 말했다.
“다시 잘 봐요.”
“맞죠? 내 집인 거.”
“잘 보라니까요. 당신 이름만 있는 게 아니라 내 이름도 있어요.”
“뭐요?”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라 다시 서류를 본 영욱은 기가 막혔다. 거기엔 영욱의 이름 밑에 처음 보는 이름이 공동소유자로 적혀 있었다, 화가 난 영욱은 부동산 중개소에 전화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는 해서 뭐해요? 다 끝난 일인데.”
“상관하지 말아요.”
영욱이 키패드의 숫자를 누르려고 하자 언제 일어났는지 여자가 핸드폰을 낚아채는 것이다.
“지금 뭐하는 거요? 당장 이리 내요.”
여자와 옥신각신하다가 눈을 뜬 영욱은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았다. 잠에서 깨어난 영욱이 생각해 보니 꿈에서 본 여자는 한 달 전 꿈에 나왔던 그 여자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머리가 상당히 길었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전혀 생각나질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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