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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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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설호(雪虎)
작품등록일 :
2011.04.03 23:48
최근연재일 :
2011.04.03 23:48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13,166
추천수 :
1,192
글자수 :
98,359

작성
11.02.24 16:11
조회
3,054
추천
20
글자
7쪽

미령(美靈)-7

DUMMY

“사장님 끝났습니다. TV도 잘 나오고 세탁기 냉장고도 이상 없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잔금은 아까 송금했으니까 점장님께 확인해 보라고 하세요.”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저희가 사은품으로 드리는 겁니다.”

직원은 작은 박스 한 개를 영욱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최신형 디지털시계입니다.”

“마침 잘 됐군요. 안 그래도 시계가 필요했는데.”

벽시계가 있었지만 알람기능이 없어 그렇지 않아도 하나 사려고 했었다. 작업을 끝낸 직원들이 돌아가려고 하자 영욱은 대리점 직원에게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내가 부자가 아니라서 조금만 넣었어요.”

물론 그럴 것까지야 없었지만 초라한 자신을 스스로 감추고 싶은 마음에 일종의 만용을 부린 것이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럼 저희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직원들이 돌아가자 영욱은 청소기로 바닥에 떨어진 스티로폼 가루들을 치우고 TV를 켰다. PDP의 선명한 화면은 보는 눈까지 시원하게 만들었다. 영욱은 침대에 누워 프로야구 중계를 보며 조금 있다가 마트에 찬거리를 사러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최근 너무 갑작스런 변화가 버거웠을까? 전에는 거의 자 본적이 없는 낮잠에 빠져 있던 영욱은 어디선가 새어들어 온 야릇한 냄새에 눈을 떴다.

‘이게 무슨 냄새지?’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아직까지 켜져 있던 TV를 끄고 방에서 나오자 거실엔 뭔가 타는 냄새로 가득했다. 걱정스럽게 집안을 둘러보던 영욱은 깜짝 놀라 주방으로 달려갔다. 거기엔 불이 켜진 레인지 위에 플라스틱 손잡이가 질질 녹아 흘러내린 양은냄비가 벌겋게 달아 있었던 것이다. 급히 가스 불을 끄고 냄비를 싱크대로 옮기자 바닥에 묻어 있던 물이 닿으면서 치직거리기 시작했다. 수도를 틀어 냄비를 식히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싱크대에 있는 냄비를 살펴보니 점심 때 라면을 끓여먹던 양은냄비였다. 얼마나 달았었는지 표면에 있던 코팅까지 벗겨져 노랬던 냄비는 하얀 냄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냄비를 올려놓았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라면을 끓여먹고 분명 가스 불을 껐다.

게다가 불도 끄지 않고 냄비를 내려놓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냄비는 대리점 직원들이 볼까봐 싱크대에 물을 부어 놓았었다. 지난 시간을 몇 번을 되돌려 보았지만 잘못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영욱의 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혹시 꿈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분명 현실이었고 집안에 사람이라곤 자신 밖에 없는 상황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깊이 잠들었었더라면 이사 오자마자 동네의 이슈가 될 뻔했다. 그날 이후 영욱은 가스를 쓰고 나면 반드시 밸브를 잠갔고 자기 전에 또 한 번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사 온지 거의 한 달이 되어 가면서 이제는 마음도 안정되고 있었다. 매 끼니도 라면이 아닌 밥을 먹고 있었고 반찬은 주로 마트에서 사다가 먹었다. 거기다 운이 좋았는지 우연히 음료회사 경품 행사에 응모한 것이 LCD TV가 당첨되어 거실에도 TV를 놓게 되었다.

‘혼자 사는 게 더 편하네.’

어느새 혼자 사는 것이 친숙해진 영욱은 왜 진작 이런 삶을 택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경미의 허영기에 그만큼 넌덜머리가 났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불만이 영욱으로 하여금 지금의 삶에 쉽게 빠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가끔 아이들 생각이 날 때도 없지 않았으나 제 엄마 좋다고 따라간 녀석들이라는 생각만 하면 이내 정나미가 떨어졌다. 점심을 먹고 콧노래를 부르며 세탁기를 돌리던 영욱은 문득 지은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연락이 끊겨 전화번호도 없어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열었더니 부재중 전화가 기록돼 있었다.

‘010 5683 1574 ? 이게 누구지?’

아마 자는 동안 걸려왔던 모양이다. 영욱은 발신버튼을 눌렀다.

“네.”

“여보세요? 제 핸드폰에 번호가 찍혀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그래요? 제가 전화를 잘못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네.”

전화를 끊은 영욱은 허탈했다.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 보니 누군가 대화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전 같으면 다시 걸려오겠지 하고 무시했던 영욱은 그동안 애써 부정했던 외로움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에 지은이가 전화했을 때 미처 번호를 저장해 놓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됐다. 결국 그동안 걸려온 전화번호 중 하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가장 오래된 것부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네.”

일단 걸어봐서 지은이 목소리가 아니면 무조건 끊고 하기를 수차례 마지막 하나 남은 번호를 누르자 드디어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네. 전무님.”

하마터면 탄성을 지를 뻔했지만 백수에 이혼까지 당한 주제에 자존심은 남았는지 제법 차분하게 말을 했다.

“아직도 힘들지?”

“네. 조금요.”

“몸은 어때?”

“사고 후유증 때문에 아직은 완전치가 못해요.”

“후유증?”

“대형 사고를 당했는데 온존할 리가 없죠. 전무님은 어떠세요?”

“나도 그동안 변화가 좀 있었어.”

“어머! 어디 취직하셨어요?”

“취직? 에이, 나 같은 노인네를 어디서 받아줘. 그건 아니고 아무튼 좀 그랬어.”

“어디 아프셨던 건 아니죠?”

“그럼. 나야 늘 건강하잖아.”

“참, 사모님은 안녕하시죠?”

“응? 으응. 그렇지 뭐.”

“전무님 죄송한데요. 제가 지금 병원에 가야하거든요. 나중에 제가 다시 전화 드릴 게요.”

“이런 내가 주책없게 바쁜 사람 붙잡았네. 얼른 다녀와.”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또 연락드릴 게요.”

영욱은 얼마나 다쳤었기에 후유증이 남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독한 마음을 달랠까 하고 전화했는데 오래 통화하지 못해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텅 빈 가슴을 대신 채울 것을 찾던 영욱은 허전해진 마음도 달래고 뒷동네 분위기도 파악 할 겸 옷을 입고 뒷길로 향했다. 그런데 화려하게 개발된 정문 쪽에 비해 단지 뒷동네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골목길 수준의 도로엔 철물점을 비롯해 서민의 정이 물씬 풍기는 분식집, 문방구 등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중 눈에 띠는 슈퍼로 들어간 영욱은 바구니를 들고 과자와 스낵 몇 개를 골라 계산대 앞으로 갔다. 주인인 듯한 여자는 영욱의 바구니에 담긴 물건들을 계산하며 옆에 앉아 있는 어떤 여자와 연신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 집 나갔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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