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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호의 서재입니다.

로또의 미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설호(雪虎)
작품등록일 :
2010.12.30 16:20
최근연재일 :
2010.12.30 16:20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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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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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1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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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9쪽

로또의 미소 (5)

DUMMY

그 노인은 다름이 아닌 웅창의 돌아가신 아버지였던 것이다.

‘이런, 아버지를 몰라보다니. 내가 왜 그랬지?’

웅창은 갑자기 울컥했다. 오죽 자식이 못났으면 꿈에까지 찾아오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송구스러움과 초라하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서러움이 몰려왔다.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어 베란다로 나가 죄 없는 담배만 연신 물어댔다.

잠시 울적했던 기분이 진정되어 집안으로 들어오던 웅창은 문득 꿈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가까운 곳에서 찾으라고 하셨지? 그런데 거기가 어디야?’

거실 창을 닫은 웅창은 아내가 깨지 않게 소리를 죽여 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편의점에 들른 웅창은 마킹을 한 로또 용지를 점원에게 내밀었다.

“손님께선 늘 이렇게 해 오시는데 혹시 1등 번호 아닙니까?”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 그냥 아무거나 찍은 거야.”

집으로 돌아오면서 웅창은 새벽녘에 꾸었던 꿈을 다시 떠 올렸다.

‘어째서 직접 가르쳐 주지 않고 알 수 없는 말만 남기셨을까?’

그 의문은 집에 와서도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순간, 웅창은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 가까운 사람 중에서 찾으라고 했어. 그런데 가까운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 이래야지.’

그것이 궁금하긴 했지만 웅창의 머릿속엔 이번 주 로또에 대한 기대감뿐이었고 하루 이틀이 지나자 꿈에 대한 생각은 점점 지워지고 있었다. 목요일, 토요일이 가까워 오자 초조해진 웅창은 마침 식구들이 없는 틈을 타 컴퓨터를 겼다. 전 같으면 고스톱을 친다거나 주식현황을 열어 놓고 있었겠지만 본격적으로 로또 연구를 시작한 이후 그런 것은 옛날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파일을 열어 놓고 들여다보니 조금 전까지 초조했던 마음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번 번호는 어색하지 않아 보였고 데이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은 불안하기만 했다.

‘제발 돼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컴퓨터 앞에 두 시간 넘게 앉아있던 웅창은 아내 지화가 들어오는 소리에 컴퓨터를 끄고 일어났다.

“어디 다녀왔어? 그런데 뭐가 이렇게 무거워?”

웅창은 아내가 들고 온 비닐 백을 받아들었다.

“마트에 좀 갔다 왔어요. 집에 찬거리도 없고 휴지도 떨어지고 해서.”

“전화를 하지. 이렇게 무거운 걸 혼자 들고 왔어? 배달이라도 시키지.”

“오다가 정육점에 들러서 고기하고 사골을 좀 샀더니 무겁네요.”

“사골은 왜?”

“애들 방학하면 먹이려고요. 그리고 요즘 당신도 얼굴이 반쪽이 된 거 같아서요.”

“반쪽은 무슨. 내 걱정 말고 당신하고 애들 몸이나 잘 챙겨.”

“그런데 당신 요즘 새벽에 뭐하는 거예요? 거의 매일 그러는 거 같던데.”

“응. 그냥 뭣 좀 하는 게 있어서.”

“너무 무리하는 거 아녜요?”

“준수가 하루 종일 붙잡고 있는데 그 시간이 아니면 컴퓨터 쓸 시간이 없잖아.”

“그럼 하나 들여놓지 그래요?”

“집에 컴퓨터가 두 대나 있는데 뭣 하러. 그리고 새벽에 하는 게 집중도 되고 일하기는 더 좋아.”

사실 웅창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 함부로 돈을 쓸 수는 없었다.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진 있는 돈으로 최대한 버텨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뚜렷한 대안도 없고 요즘 같이 꽁꽁 얼어붙은 부동산 경기는 그전까지 집이 팔린다는 보장도 없다. 물론 남편 잘 만나 수십억 재산을 갖고 있는 여동생이 있긴 하지만 딸아이 등록금 때문에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부탁하는 오빠에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거절한지 오래다. 다행히 딸아이가 장학금을 받게 되어 해결은 되었지만 그 일은 오랫동안 웅창의 가슴에 남아있었다. 여동생뿐만 아니라 동창들한테도 그런 수모를 겪었다. 더럽고 치사해서 그 자리에서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반드시 그날이 온다고 믿고 그때까지 이를 악물고 참기로 했던 것이다. 결국 길은 오직 하나, 로또에 숨겨진 비밀을 남들이 알아내기 전에 먼저 파헤치는 것뿐이었다.

‘천기를 훔치는 거라구?’

언젠가 천기를 누설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얘기가 어렴풋이 떠오른 웅창은 그제야 아버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대통령이란 하늘이 내는 사람이라고 했던 것처럼 로또 당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상사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가 있고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이 꾸었다는 꿈도 돈을 좋아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간절히 바랬기 때문에 그것이 꿈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꿈에 조상이 나타나 가르쳐 주었다느니 황금돼지가 집안으로 들어왔다느니 하는 것들 역시 애써 부정하는 자신들의 탐욕이 낳은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웅창은 그런 것들에 의존하기 보다는 남들이 말하는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 지금의 운명을 업데이트할 게이트를 열지 못했을 뿐이다. 스타게이트 같은 게 있다면 미래에 잠시 다녀오면 됐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점점 조급해지는 웅창에게 일주일이란 시간은 한 달처럼 여겨졌고 그러한 초조함은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라는 단어는 무의미한 것으로 변질시키고 있었다. 그런 웅창을 바라보는 가족들 역시 자심들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그렇게 변해갔고 웅창과 그런 가족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준수는 그것이 아버지 때문이었고 혼자 모든 짐을 지고 있는 아버지의 고뇌를 알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럭저럭 주말은 다가왔고 방송을 기다리는 웅창의 속은 좋지 않은 예감으로 가득했다.

‘왜 이렇게 예감이 안 좋은 거지? 이번 번호는 모양새가 괜찮은데.’

그러나 그러한 예감은 여지없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이번 주 로또 1등 번호는 22번 37번 23번 10번 19번 25번 그리고 보너스 볼은 39번입니다.”

‘이번엔 정말 괜찮았는데.’

어째서 나쁜 예감은 이렇게 잘 들어맞는지, 웅창은 온 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8 15 17 25 31 34.

8 15 17 25 31 42.

11 23 33 36 40 41.

6 21 29 37 44 45.

3 18 20 24 38 43.

그래도 혹시 하는 심정으로 자동 선택된 번호들을 살폈지만 하나도 당첨 된 것이 없었다.

‘빌어먹을 무슨 번호가 이따위로 나오는 거야? 개 같이.’

웅창은 마치 그것을 누가 조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실존하지도 않는 상대를 향해 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꿈에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있어서였을 것이다. 속으로 화가 치밀었지만 그래도 번호 한 개는 맞췄다는 사실이 웅창의 화를 조금은 가라앉게 해 주었다. 다시 마음이 진정된 웅창은 가족들이 모두 잠이 들자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았다.


209회..18.........24.........33.........20...........2...........7.........37.

.........19.........17...........1.........32..........37.........26.........16.

.........16...-3...45...28...36...35...14..-18...25..-12...37...11...37...21

.........18....2...33..-12...43....7....31...17....8..-17...44.....7..

..........3..-15...45...12...23..-20...11..-20...22...14...17..-27..

.........19...16...37...-8................10...-1....4..-18...27....10..

.........22....3...18..-19................18....8.....2...-2...25....-2..

..........4..-18............................30...12.....5....3....

..............................................41...11....20...15....

..............................................19...-1....

평균값.14...-3...33..0.2...26..7.3....23..1.3....16..-2...29.....0...27...21

209+평균+증감

.........29........57.2.......66.3.......44.3.........16........36..........85

합/2...14.5......28.6.......28.6.......33.1........22.1........8.........32.5

210회..22........37..........23..........10..........19.........25.........39.


‘대체 뭐가 잘 못된 거지? 이번엔 아예 근처에도 못 갔잖아? 그리고 이건 뭐야? 20번 대가 세 개나 되네? 진짜 번호 더럽다.’

그런데 시트를 보고 있던 웅창의 머리에 뭔가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208회 번호를 추출할 때 나왔던 조합이었다.

‘맞아. 그때 20번 대가 세 개 나왔어.’

웅창은 208회용 파일을 열었다.

Sort210 10 19 22 23 25 37

208조합 14 23 24 25 31 40


‘22 23 25 그리고 23 24 45?’

똑같지는 않았지만 20번대 번호는 매우 흡사했다.

‘이것이 210회 번호 형태라면?’

엉뚱한 발상이었지만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209회 조합을 211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웅창은 209회용 파일을 열었다.

잘사 25 28 26 31 14 29

절상 26 28 27 32 15 29


‘211회도 20번 대가 세 개라는 얘긴데. 그건 좀 이상하네.’

어딘지 20번대 세 개가 들어있는 번호가 연속해서 나온다는 것은 웅창이 보아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웅창은 일단 지금까지 해왔던 룰대로 211회 시트를 만들었다.


210회...2.........37.........23..........10..........19.........25........39

.........43...........1.........14..........45.........10...........7........31

..........7..-36...33...32...35....21...24..-21....3...-7...35...28....7..-14

.........41...34...23..-10...21..-14...42...18.....8....5...24..-11...27...10

.........39...-2.....9..-14...13...-8...20..-22...33...25....3..-21...39...12

.........12..-27...13.....4....7...-6................13..-20....8.....5...45....6

......................25...12...15....8..................6...-7....2....-6...14..-31

..................................17.....2................15....9...11.....9...17.....3

.......................................................................41....30.....8...-9

......................................................................................4...-4

평균값.28.4.-7.8.17.3.4..8.17.4.0.5.32.8.-8.3.12.6..0.8.16.4..4.9.22.4.-3.4

.210+평균+증감

.......42.7.......59.1.......40.9........34.4........32.4.....46.2......58.1

합/2(211예상번호)

.......21.3.......29.6.......20.5........17.2........16.2......23.1......29.0


‘어디보자. 21 30 21 17 16 23 이라. 그러면 이번엔 절사를 해보자.’

그렇게 만든 조합은 21 29 20 17 16 23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20번 대가 네 개가 되었다. 20번 대가 계속 세 개씩 나온다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더구나 네 개가 나올 확률은 더욱 희박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웅창은 이번엔 절충을 하기 위해 절사와 절상이 아닌 반올림을 했다.

‘그러면 21 30 21 17 16 23인데 문제는 21이네.’

그때 웅창의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 맞아. 내가 왜 진작 그걸 생각 못했지?’

209회 18 24 33 20 2 7

210회 22 37 23 10 19 25

210-209 4 13 -10 -10 17 18


웅창이 생각한 것은 210회 당첨번호와 209회 당첨번호의 증감이었다. 번호가 나온 순서대로 각각 짝을 지어 계산하면 4 13 -10 -10 17 18 이었다.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던 웅창은 무릎을 쳤다.

‘이것들을 각각 더해주면 되겠네. 그리고 209회 조합을 감안하면 될 거야.’

합/2(211예상번호)

21.3 29.6 20.5 17.2 16.2 23.1

210-209 4 13 -10 -10 17 18

합 25.3 42.6 10.5 16.2 33.2 41.1

이번엔 정말 그럴싸해 보였다. 이미 20번대 번호가 세 개나 나온 것이 반복되었고 이제는 40번대 번호가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하고 여기에 209회 조합을 감안하여 두 개를 만들면 그만큼 확률은 높아지겠지?’

209회절사 25 28 26 31 14 29

210회절상 26 28 27 32 15 29

평균 25.5 28 26.5 31.5 14.5 29


웅창은 자신이 만들었던 209회 조합의 절사분과 절상분의 평균을 구해 그 각각의 값을 합에 더한 뒤 그 최종합의 평균을 구했다.

합/2(211예상번호)

21.3 29.6 20.5 17.2 16.2 23.1

210-209 4 13 -10 -10 17 18

합 25.3 42.6 10.5 7.2 33.2 41.1

평균 25.5 28 26.5 31.5 14.5 29

최종평균 25.4 35.3 18.5 19.4 23.8 35


‘어? 뭐야? 35가 두 개잖아?’

웅창은 현재 보이는 상태에서 절상하기로 하고 두 개의 조합을 정리했다.

‘그런데 단 자리수하고 40번 대가 없네? 에이 이건 아니다.’

아무리 봐도 조합이 마음에 들지 않은 웅창은 애써 만들어낸 것들을 포기했다.

‘그냥 처음 것으로 가자. 26 43 11 8 34 42. 그래 이거야.’

그렇게 결정을 한 웅창은 로또용지를 꺼내 제일 첫 번째 칸에는 25 42 10 7 33 41을 그리고 혹시 몰라 두 번째 칸에는 26 43 11 8 34 42를 마킹을 했다. 그것을 보는 웅창의 마음엔 만약 이러고 있는 자신을 아내가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업을 구상하는 줄로 알았던 사람이 로또에 먹칠이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실망감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모임에 가면 남편이 일하지 않고도 지금의 생활수준을 유지해 주는 것을 은근히 자랑했던 자존심 또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어쨌든 아내는 물론 아이들 모르게 해야 했다.

‘천지신명이시여. 부디 살펴주소서.’

로또용지를 정성스레 접어 점퍼 안주머니에 넣은 웅창은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덧 연말이 되었지만 아직도 로또는 웅창을 외면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로또에 빠진지 석 달이 거의 다 되어가지만 그가 원하는 1등은 늘 그를 외면했다.

‘이거 되지도 않을 걸 시작한 건가?’

문득 그런 느낌이 든 웅창은 멍해졌다.

그의 생각이 맞는 거라면 석 달이라는 세월을 그야말로 쓸데없는 일로 보낸 것이 된다. 갑자기 일확천금을 노렸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 있는 돈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은 더욱 조급해지고 있었다. 이러다 자신도 TV에서 보았던 채무자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집이 있긴 하지만 언제 팔릴지도 모르는 상황에 그렇다고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는 입장도 못되었다. 집이 팔리기까지는 최소한 1억은 있어야 하는데 개정된 법 때문에 직장이 없는 자신이 대출 받을 수 있는 것은 고작 몇 천에 불과했다. 그것으로는 기껏 몇 개월 쓰고 나면 끝이었다.

‘더러운 새끼들 집이 있어도 팔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서민 운운해? 개새끼들.’

웅창은 지난 정권에 대한 원망에 화가 치밀었고 그렇게 엉터리 법이나 만들어놓고 지금쯤 날강도 식으로 걷어 들인 세금으로 지은 호화사저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그 작자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목을 비틀어 주고 싶었다. 웅창이 로또에 빠진 사이 어느새 집안 분위기는 개인적이 되었고 식구들 간의 대화도 끊어진지 오래였다. 가끔 아내 지화와 몇 마디 주고받긴 했지만 이미 로또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웅창에게 어느 것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제 그만 둔거냐?”

“뭐를요?”

“로또.”

“아, 그거요? 잠시 쉬기로 했어요.”

“그래?”

“그런데 그건 왜요?”

“처음엔 끝장을 볼 것 같더니.”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네요.”

“당연하지 그게 쉬울 것 같으면 세상 사람들 다 대박 터졌게? 허허허.”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왜 웃으면 안 되냐?”

“지금 전 절실합니다.”

“그러지 말고 일자리를 한번 찾아보지 그러냐?”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제 나이에 취직이 되는 줄 아십니까?”

“아파트 경비나 장사라도 해보지 않구.”

“그건 다 옛날이야기예요. 지금은 시대가 변했어요. 장사도 돈이 있어야 하고 아파트 경비도 빽이 있어야 합니다.”

“20년이나 직장생활 했으면서 모아 둔 돈도 없냐?”

“글쎄 그건 다 옛날이야기라니까요. 옛날에야 집값이 지금처럼 비싸지 않았으니까 월급으로 먹고 살면서 저축도 할 수 있었죠. 하지만 요즘엔 월급만으론 먹고 살기도 빠듯해요.”

“그것 참.”

“남들이야 물려받은 재산이라도 있지만 전 뭐가 있습니까?”

“지금 아버지 원망하는 거냐?”

“그런 게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얘기죠.”

“나한텐 그런 식으로 들린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죠. 아버지가 언제 저희들한테 신경 쓰신 적 있어요? 아버지한테는 조카들이 우선이었잖아요?”

“그렇다고 조카들 일을 모른 척 하란 말이냐?”

“아버지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께서 그렇게 해주신 덕에 그 형들 지금 떵떵거리고 잘 살고 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 보답한 적 있어요? 그렇다고 큰아버지들이 아버지한테 고맙다고 한 적 있어요. 그 형들한테 쓰실 거 우리한테 쓰셨더라면 지금 이렇게 안 살아도 됐을 거예요.”

“너 그게 서운했던 게로구나?”

“네. 서운해요. 솔직히 배은망덕한 사촌형들 전부 꼴도 보기 싫어요. 지들이 누구 덕에 직장도 얻고 돈도 벌게 됐는데 그렇게 입 싹 닦는단 말입니까? 아버지께서 공부시켜 주고 취직 안 시켜줬으면 촌에서 농사나 짓고 살았을 인간들이 고마워할 줄 모르고 말야.”

“그러는 거 아니다. 어쨌든 너한테는 모두 형들 아니냐?”

“형은 무슨 형입니까? 그 형들이 아버지 제사 때 한번이라도 온 줄 아세요?”

“그거야 바쁘니까 그렇겠지.”

“바쁘다는 사람들이 아버지 제사 때 지들끼리 놀러 다닙니까? 참 아버지 딱하시네요.”

“어쨌든 너한테 형이라곤 그 애들뿐이잖니?”

“아버진 역시 저희들보다는 사촌들이 우선이시군요. 내 가족이 있고 나서 친척도 있는 겁니다. 정말이지 식구들 굶겨가며 친척들만 돌보셨던 아버지가 정말 싫었습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굶겼단 말이냐?”

“잊으셨어요? 옛날 형이 아프다고 했을 때 진작 병원에 가서 검사라도 받았으면 형 안 죽었어요. 그런데 아버지 뭐라고 하셨어요? 형이 아프다고 하니까 그러셨잖아요? 사내자식이 그 정도 갖고 낑낑거린다면서 질책하셨어요. 사촌형들은 감기만 걸려도 난리를 치셨으면서 저희들한텐 그렇게 하셨어요. 솔직히 아버지 원망스럽습니다.”

“알았다.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이제 제 앞에서 사촌들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마세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네 서운함이 좀 없어지겠니?”

“그건 아버지께서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내가 전에 얘기한 거 알아보았니?”

“얘기하신거요?”

“응. 가까운데서 찾아보라고 했던 거.”

“그거요? 아직요.”

“찾아봐라. 그럼 될 거다.”

“아버지 그러지 말고 그냥 얘기해 주셔도 되잖아요?”

“그건 안 된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공과 사를 망각할 수는 없다.”

“그러시겠죠. 사촌형들이 해 달라고 했으면 아마 앞뒤 안 가리고 해 주셨을 걸요?”

“너무 그러지 마라. 나도 내 자식 귀한 줄은 안다.”

“어련하시겠어요. 그런 귀한 자식한테 그거 하나 못 가르쳐 줘요?”

“거기 규율이 아주 엄격해서 내가 그것을 어기면 그 화가 모두 너희들에게 돌아가니까 그러는 거야.”

“알았어요. 그만 하세요. 저 이만 가겠습니다. 어머니께 못 뵙고 간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제발 어머니 잘해 주세요. 평생 아버지의 사촌사랑 때문에 가슴에 멍든 분이세요.”

“알았다. 그러게 하마.”

“그럼 가겠습니다.”

아버지한테 인사를 하고 돌아선 웅창은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5

‘내가 왜 이러지? 어? 그런데 여긴?’

정신을 차린 웅창이 눈을 떴을 땐 이미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일어났어요?”

“응. 지금 몇 시야?”

“6시 조금 넘었어요.”

“애들 학교 안가니까 더 자도 되는데 왜 일어났어?”

“매일 이 시간이면 일어나다 보니까 저절로 눈이 떠지네요.”

“더 자.”

“그런데 꿈꿨어요?”

“응.”

“무슨 꿈을 꿨기에.”

“왜?”

“당신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했어요. 꿈에서 누구하고 싸웠어요?”

“싸우긴. 꿈에서 아버지를 봤어.”

“아버님을요?”

“응.”

“반가우셨겠네요.”

“반갑긴. 뭐. 그렇지.”

“왜요? 안 반가웠어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버지한테 서운하게 했어.”

“뭐라고 했는데요?”

“옛날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서 좀 서운하게 하셨거든.”

“그래요?”

“당신한텐 얘기 안했는데 아버진 당신 자식들 보다 조카들이 우선이었지.”

“그럼 당신 사촌형들 말하는 거예요?”

“응. 왜 그렇게 사촌형들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셨는지. 자식들은 죽어 가는데 당신 조카들 챙기는 일에만 열중하셨지. 큰아버지들이 나 몰라라 하는데도 공부시키고 직장까지 얻어주실 정도로 조카들 사랑이 대단하셨지. 그 바람에 형만 죽게 되었지만.”

“형님이요?”

“응. 한번은 갑자기 학교에서 돌아온 형이 아프다고 누웠는데 조카들 아프다고 할 때는 열일 제쳐놓고 병원에 데려가시던 분이 막상 당신 자식이 그것도 집안의 장남이 아프다는데 그러시는 거야. 사내자식이 조금 아픈 것 같고 낑낑댄다고. 형이 워낙 몸이 약했거든. 그런데 가끔 아프다고 눕는 일이 몇 달 계속되자 그제야 병원에 데려가시더군. 하지만 이미 손쓰기엔 늦었지. 그 바람에 어머니도 화병이 났고.”

“그럼 진작 아버님께 말씀드리지 그랬어요?”

“왜 안했겠어? 어쩌다 어머니께서 뭐라고 한마디 하시면 불호령이 떨어졌지. 여자가 어디 남자 하는 일에 간섭이냐고. 아무튼 난 아버지 하는 일이 모두 마음에 안 들었어. 날 더 화나게 만드는 게 뭔지 알아?”

“당신 속에 앙금이 깊은가 보네요.”

“사촌 형들이야. 아버지 덕에 지들이 오늘날 저렇게 먹고 살게 됐는데도 입 싹 닦은 개 새끼들인데 뭐.”

“에이. 그래도 형들인데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뭐 어때? 개새끼들 보고 개새끼라는데. 저 새끼들이 사람이야? 짐승이지. 저 새끼들만 아니었으면 우리 그렇게 안 살았어. 우리한테 써도 모자랄 돈인데 조카들 공부시키는데 다 썼잖아? 은공도 모르는 개새끼들이 어쩌다 집에 오면 생색이나 내려고 하는 꼴보면 당장이라도 쥐어박고 싶어.”

“큰아버님들 계셨을 텐데 왜 아버님이 공부를 시켜요?”

“큰아버지라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개 같았으니 그렇지. 형이 돼 갖고 어떻게 동생한테 자식들을 맡길 수 있어? 동생은 허리가 휘건 말건 지들은 만날 술만 처먹고 다닌 거야.”

“그래도 생활비 정도는 보냈을 거 아녜요?”

“하이고 생활비? 땡전 한 푼 없었어. 형들이면 다야? 씨발놈들. 그것도 한 새끼였으면 그나마 좀 낫지. 이 새끼 저 새끼 전부 우리 집에 보내놓고 아예 신경도 안 썼어. 그 바람에 그 많은 식구들 밥 해 먹이느라 어머닌 하루도 어깨가 성한 날이 없었지.”

“형들이 안 도와줬어요?”

“행여나? 밥을 하는데도 지금처럼 전기밥솥이 있어 압력밥솥이 있어. 일일이 불을 때서 하느라 늘 장작이 필요했는데 그것도 어머니께서 혼자 다 하신거야. 그런데 문제는 그 개새끼들 빈둥거리기만 했지 한 번도 장작 패는 걸 본 적이 없어. 장작 패는 건 학교에서 돌아온 형님 몫이었지. 밥 먹고 설거지 하는 일은 누나들 몫이었고. 그렇게 우리 식구가 지들 뒷바라지 해 줬는데 어쩜 저럴 수가 있어? 씨발놈들. 그 새끼들만 아니었으면 형 안 죽었어. 형만 살아 있었어도.”

“하긴 형님 살아계셨으면 당신이 좀 덜 힘들었겠죠. 당신 혼자 아버님 어머님 모시느라 고생 많이 했잖아요?”

“그거야 장남이 모시면 어떻고 차남이 모시면 어때. 아무튼 앞으로 볼일도 없는 새끼들이니까 더 이상 얘기할 것도 없어. 더 자.”

그랬다. 웅창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사촌형들이 젊었을 때 큰아버지들이 무능 하거나 아니면 바람을 피우느라 등한시 하는 바람에 학교도 제대로 갈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자식들을 막내인 웅창의 아버지에게 모두 떠맡기다시피 했던 것이다. 물론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형들 말이라면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고 믿었던 웅창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시하고 사촌형들을 받아 들였고 자식들 먹여 살리기도 빠듯한 살림인데도 사촌형들 일이라면 아낌없이 투자했던 것이다. 당시 웅창은 너무 어려서 잘 모르고 살았으나 성장한 이후 집안에서 어머니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그런 사실들을 모두 알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과거사가 나올 때마다 아버지는 자리를 피하시거나 실실거리는 웃음으로 그 순간을 모면했고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웅창의 가슴엔 서운함이 쌓여왔던 것이다. 언젠가 호기심이 생긴 웅창이 대충 계산해 보니 만약 아버지가 사촌형들을 위해 섰던 돈을 다른 데 투자했더라면 현재의 화폐가치로 수십억이 넘었을 수도 있는 돈 이었다. 그 돈들을 저축만 했어도 최소한 십억은 모을 수 있었다.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생활고로 고민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자식들까지 희생시키면서 아버지가 뒷바라지를 했는데도 지들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사촌형들만 생각하면 속에서 울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다시 잠이 들었던 웅창이 눈을 뜬 것은 거실에서 아이들이 도란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식구들은 주방에서 늦은 아침을 먹는 중이었다.

“일어나셨어요?”

“응. 뭐 먹니?”

“토스트하고 스프요. 아버지도 드세요.”

“나도 그럴까?”

웅창이 자리에 앉자 지화는 스프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고 곧바로 토스트를 만들었다.

“준수 너 이제 삼학년 되지?”

“네.”

“학점은 잘 따고 있어?”

“네. 뭐.”

“너 요즘 매일 게임만 하던데. 삼학년 때 학점 잘 따놔야 나중에 취직하기 쉬워. 학점 나쁘면 요즘같이 어려운 때 취직하기 힘들다.”

준수는 말없이 토스트와 스프만 먹고 있었다.

“내말 듣고 있는 거니?”

“네.”

“그리고 은진인 대학원 진학은 어떻게 돼가니?”

“며칠 전 교수님한테 물어봤는데 거의 90프로 확정적이래요.”

“잘했다. 준수 너도 누나처럼 나중에 대학원 진학해.”

하지만 준수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겉으로는 여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속으론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아침을 먹은 웅창은 거실 소파에 앉아 간밤의 꿈을 생각했다.

‘도대체 뭘 찾으라는 건지. 아버지도 참. 에이 낮잠이나 한숨 더 자야겠다.’

웅창이 한숨을 내쉬며 일어서는데 핸드폰에서 진동음이 울리고 있었다.

“네.”

“팀장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박재학이었다.

“아, 박과장. 오랜만이다.”

“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나야 뭐 그럭저럭 지내고 있지. 참 뭐 시작한다더니 어떻게 됐어?”

“아직요. 팀장님 말씀대로 선뜻 시작하기가 겁이 나더군요.”

“그럴 거야. 요즘 뭐하나 쉽게 시작할 만한 게 있어야지.”

“팀장님께선 요즘 뭐하시는 거 있으십니까?”

“나도 마찬가지지 뭐. 그냥 백수야.”

“사실 좀 걱정입니다. 세월은 자꾸 가는데 여태껏 수입 한 푼 없으니 말이죠.”

“그렇겠지.”

“팀장님께선 큰 문젠 없으시죠?”

“문제가 없긴. 다만 겉으로 드러내질 않아서 그런 거지. 박과장 나이라면 어디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

“아닌 게 아니라 그동안 여기저기 알아보긴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뭔가 빨리 시작하긴 해야지.”

“그렇죠. 그래서 한 가지 하고 있긴 한데 그게 영 쉽지가 않습니다.”

“뭔데?”

“뭐라고 딱히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합니다. 일단 제 전공을 살려서 시작하긴 했는데 잘 안됩니다.”

“뭔데 그래?”

“저, 그런데 들으시면 황당하다고 하실 겁니다.”

“황당?”

“네.”

“뭔지는 모르지만 남들이 하지 않는 걸 하는 게 중요하지.”

“하지만 듣고 나면 어이가 없으실 겁니다. 나중에 잘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말하기가 곤란한가?”

“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우리 언제 한번 만나자.”

“네. 설 지나고 나서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때 만나서 저녁이나 같이 하지.”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잊지 않고 전화해 줘서 고마워.”

“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웅창은 은근히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얘길 못했을까? 여자 장사하나?’

황당하기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이 들으면 무모하고 한심하다는 소릴 들을 게 뻔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세상사 중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믿어왔던 웅창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냐. 절대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아. 분명 내가 모르는 공식이 있어. 반드시 밝혀내고 만다.’

한때 자꾸만 자신을 외면했던 로또에 회의를 품었던 웅창은 또 다시 로또에 대한 열정을 불 지르고 있었다. 새해가 밝았다. 지난 3년 동안 힘든 시간들을 보낸 웅창은 밝아 온 새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다. 그때, 문득 자신의 사주가 생각난 웅창은 컴퓨터에 저장해 놓았던 사주풀이를 열었다. 지난해까지 삼재에 걸려 있다가 2007년부터는 삼재에서 벗어난다는 풀이가 눈에 띠었다.

‘이제 좀 풀리려나?’

돌이켜 보니 지난 삼년 동안 실제로 좋지 않은 일들이 많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얼마 후 실직까지 했다. 게다가 자동차 사고로 평생 처음으로 병원 신세를 지지 않나 투자했던 펀드도 겨우 본전을 건졌을 뿐이고 최후의 보루였던 집마저 팔리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차량이 전파되었는데도 불구가 되지 않았다는 것과 가해자 측으로부터 병원비와 전파된 차량의 보상비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돈도 모두 생활비를 충당하는데 써야 했다. 생각해보니 그만큼 힘든 세월을 겪었으니 이제 더 이상 나쁠 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됐다.

‘그런데 도대체 뭘 찾으라는 건지 모르겠네.’

간밤 꿈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다. 웅창은 잠시 손을 놓았던 로또 파일이나 다시 볼까 했으나 새해벽두부터 매달리기는 어딘지 모르게 방정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로또 구입 자금이 남아있어 매주 자동으로 구입했지만 오천 원짜리 한번 당첨된 적이 없었다.

‘역시 난 자동하고는 인연이 없어.’

웅창은 또 다시 머릿속으로 로또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가 뭔가 놓친 것이 분명해. 그게 뭘까?’

설이었지만 이번 설은 전과는 아주 달랐다. 음력설을 지내던 집안의 전통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웅창의 실직이 누님과 여동생의 발길을 끊게 만든 것이다. 누님이야 손위 어른이니 웅창이 전화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결혼 전엔 그토록 착하기만 했던 여동생은 어쩌다 투자한 펀드가 대박이 나면서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제사 때가 아니면 얼굴 비치는 것은 물론 일체 전화 연락도 하지 않았다. 전에는 부모님 봉양 잘하는 동생이 기특하다며 종종 다니러 오셨던 누님은 웅창이 실직한 뒤 혹시라도 수입 없는 동생에게 부담이라도 줄까 하는 생각에 가끔 전화로만 안부를 물었다. 웅창은 갑자기 휑한 느낌이 들자 누님께 전화를 했다.

“저예요 누님.”

“웅창구나. 그래 어떻게 사니?”

“전 잘 있습니다. 건강은 어떠세요?”

“난 건강해. 그보다 난 네가 걱정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으니까. 매형도 안녕하시죠?”

“매형이야 건강하시지.”

“지금 집에 계시죠?”

“아니. 나가셨어.”

“오늘도 일하세요?”

“조금 전에 설이라고 세배하러 온 직원들하고 같이 나가셨어.”

“회사는 어때요?”

“그런대로 잘 돌아가. 요즘엔 매출도 조금씩 오르고 있어서 매형 기분이 아주 그만이다.”

“매형께서 워낙 수완이 있으시잖아요.”

“참. 너 전화 잘했다. 그렇지 않아도 매형이 네 얘기 하더라.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이라고.”

“네에.”

순간 웅창은 울컥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공허한 웅창의 가슴을 메워준 매형이었다.

“살다가 힘들면 언제든 얘기하라더라. 매형이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다고 하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라.”

“네. 고마워요. 누님.”

“나한테 고마워 할 게 뭐있니? 매형께 감사드려야지. 저기. 미숙인 연락 없지?”

“그렇죠. 뭐.”

“괘씸한 것 같으니. 나하고 좀 사이가 그렇다고 전화 한번 없다. 돈 좀 있다고 형제들 앞에서 유세 떠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건지 몰라. 하는 꼬락서니 보면 아주 건방져.”

“막내라 그러려니 하세요. 뭘 그걸 갖고 서운해 하세요. 허허.”

“네 처한테 얘기 들으니까 미숙이한테 돈 얘기 했다면서?”

“네. 작년에 급히 돈이 좀 필요해서 그랬었는데 마침 교통사고 보상금이 나와서 그걸로 해결했죠.”

“그 애 머릿속엔 돈이라면 형제고 뭐고 없어. 옛날의 미숙이가 아냐. 돈 앞에선 형제도 남남으로 생각하는 애야. 전에 매형 사업자금이 필요해서 얘기했더니 뭐 여기저기 돈이 묶여있어서 빼질 못한다나? 그러면서 애들 차 뽑아준 애다. 그 년이 전화할 때까지 절대 전화하지 마라. 손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화하는 거 아니다. 알았지?”

“네. 알았어요. 그리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그만한 사정이 있었겠죠.”

누님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여동생이 그렇다는 것은 웅창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집안의 실질적인 장남인 자신까지 누님의 말에 동조하는 것은 누워 침 뱉기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건강 잘 챙기고 돈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라.”

“네. 누님. 매형 오시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래. 그럼 또 통화하자.”

“네.”

누님과 통화를 끝내고 혹시나 하고 오후 내내 기다려 봤으나 역시 여동생한테선 전화가 없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뒤 웅창은 거실에 홀로 앉아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보 안 잤어요?”

갑작스런 아내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웅창은 조금 전까지 열어 놓았던 파일을 닫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응. 뭣 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낮에 하지 그래요?”

“이제 막 자려던 참이야.”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운 웅창은 자신이 그동안 만들었던 로또공식을 되새기며 눈을 감았다.

“아직도 모르겠냐?”

“네?”

“내가 얘기 한 거 말이다.”

“그거요? 어디서 뭘 찾으시라는 건지 전 도저히 모르겠어요.”

“네가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게지.”

“그러지 말고 그냥 이번 주 로또 번호 한번만 가르쳐 주시면 되잖아요.”

“글쎄 그건 안 된다는데 그러는 구나.”

“사촌형들이 가르쳐 달라고 해도 그렇게 말씀하시겠어요?”

“갑자기 그 얘긴 또 왜 꺼내니?”

“됐습니다. 그만 두세요.”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얘기 한 거 잘 생각해봐라. 천기를 밝히는 일이 어디 너 혼자 갖고 될 일이냐?”

“글쎄 그만 하시라니까요. 저 갑니다.”

최근 들어 자주 꿈에 나타나는 아버지 때문에 가뜩이나 혼란한 웅창은 가끔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냥 가르쳐 주면 될 것을. 하긴 우리보단 사촌들을 우선으로 하셨던 분이니까.’

오랜 세월 그의 가슴속에 쌓여 온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웅창에게 있어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론 유일한 화풀이 꺼리가 되기도 했다. 새해 첫 꿈을 좋지 못한 기분으로 보내고 아침을 맞은 홧김에 애꿎은 담배만 축내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아들아이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나갔고 딸아인 오랜만에 엄마와 쇼핑을 가는 바람에 집에는 웅창 혼자 남게 되었다. TV에 나오는 설 특집 프로라는 것이 그저 그렇고 그런 것들이어서 TV 보는 것이 질력이 난 웅창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서 로또에 관한 것들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서핑을 하던 웅창은 어떤 블로크에 올라온 글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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