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막연한 기대
긴장과 이완의 급속한 변화 속에 방을 나왔지만 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구심점이라니? 연공서열로 따지면 구심점은 선미나 미호가 돼야 한다. 더구나 이제 2년차 대리에게 무엇을 맡기려는 것일까? 하지만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무슨 일이에요?”
“자기 없는 동안 별 일 없었는지 물었어요.”
선미한테까지 감추고 싶진 않았지만 왠지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것 같은 예감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선미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아무리 내 여인이라고 해도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
‘어? 차도한씨가 언제?’
선미와 잠깐 이야기 하는 사이 차도한이 강팀장 방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자못 심각해보이기까지 하는 그들의 모습은 또 다른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문득 차도한의 배경이 생각난다. 비록 오너가 출신은 아니지만 그는 금수저 출신이다. 그것도 오너가와 아주 가까운 금수저다. 그 광경을 목격한 선미도 궁금했는지 한마디 거든다.
“오늘 팀장님 바쁘시네?”
“그러게요.”
그런데 팀장실에서 나온 차도한의 태도가 너무 놀랍다.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무표정한 얼굴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은 잘못 봤나? 하고 자문하는 것보다 더욱 강한 인상을 준다. 분명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듣고 나온 것 같은데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내가 너무 민감한가?’
그날 이후 강팀장의 얘기가 머릿속을 맴돌았고 어느새 막연한 기대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그냥 잊어버리자고 스스로 다짐했지만 막연한 가대감은 그 마저도 허용치 않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려는 것일까?
‘혹시 특진? 아냐. 이제 2년차 대리일 뿐인데 꿈도 크다. 청육에서 고속승진은 오너가 출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더구나 지난번 대리승진도 청육 역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면 대체 뭐야? 뭐기에 함구하라고 한 거야?’
지난 보름간 온갖 상상을 하는 사이 대지를 불태울 듯 했던 폭염의 기세도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창문을 닫지 않으면 제법 쌀쌀한 바람까지 분다. 그런데 그 구심점이란 것은 언제 시행하려고 여태 말이 없는 거야?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던 이야기도 이제는 옛날 얘기가 돼 버렸다.
[우리 오늘 저녁 먹어요.]
그 이상한 생각하느라 오늘이 불금인 것도 몰랐다. 그런데 문득 아지랑이 같은 것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든다. 뭐지? 중요한 일인 것만은 분명한데 그게 뭔지 생각이 안 난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없다. 이미 퇴근 시간이 301분이나 지났고 먼저 퇴근한 선미가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늦었죠?”
“저도 차가 많이 막혀서 온지 얼마 안됐어요.”
“그런데 혹시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이요?”
그것은 가을이 시작되는 다음 주에 인사이동이 있을 것 같다는 소문이다. 하지만 임시주총이라도 열린다면 모를까 인사철도 아니고 만약 있다면 외부에서 영입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어진 선미의 얘기는 뭔진 모를 사건을 예감하게 만든다.
“전사적으로 조직 개편이 있을 것 같대요.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우리도요? 그러면 그거였네요.”
“그거라니요?”
아차,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선미에게 그동안 속에 간직해왔던 이야기를 했다. 어차피 알게 될 것이고 선미 또한 입이 가볍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선미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동안 일부러 다른 얘기를 했다. 하지만 머릿속엔 월요일에 마주칠 사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정도씨한테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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