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트뤼멜가 저택
하이엔이 증언서 작성을 끝마치고 나왔을 때, 맞이해 준 것은 페히스티아였다.
“다녀오셨어요? 두 분이라면 환금을 끝내고 이미 밖에 나갔답니다. 이건 마법사님이 가지고 계시던 물건을 환금한 은화예요.”
페히스티아가 그렇게 말하며 아담한 상자를 내밀었다. 하이엔이 받아들며 말했다.
“이것을 전달하기 위해 기다리셨던 겁니까. 고맙습니다.”
열어보니 은화가 단위별로 놓여있었다. 2300에르 정도 되나.
제치 행정관이 쩔쩔 매던 것 치고는 별 것 아닌 금액. 참으로 엄살이 심한 자가 아니던가.
“이건 수레에 들어있던 몫이예요. 길로테 씨가 가져온 물건은 따로 정산해 드렸죠. 부피에 비해 값어치가 크던데, 덕분에 기분이 좋아지셔서는 왜인지 성문부터 가고싶다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크릿사 씨를 안내역으로 붙여드렸죠.”
크릿사는 페나 공방 길드의 직인 중 하나인 석인 청년을 말했다. 페히스티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짐 정리가 끝났다며 보고하려 왔었거든요. 참, 공방주님이 죄송하단 말씀을 꼭 전해달라 하셨어요. 원래 본인이 직접 안내를 해드려야 하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그에게만큼은 밖에서 있었던 사실을 어느정도 이야기 해야만 했거든요. 때문에 상황 정리를 위해 서둘러 공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죄송해요.”
“그래서 멜트베르 씨도 안보였던 거군요.”
“네, 몇 분이 자신의 몫을 받고 공방을 그만두겠다 말하기도 했고······ 상황을 알고있는 사람이 필요해서 같이 보냈어요.”
“이해했습니다.”
청은을 곧이곧대로 길드 창고에 넣을때 부터 생각하기 했지만, 꽤나 정직한 결정이었다. 자신들끼리만 나눠가져도 별 문제없을 청은의 존재를 구태여 상사에게 밝히다니.
아무래도 페나 공방 길드의 공방주와 부공방주, 일등 장인 이 셋은 단순한 직장 동료를 넘어서 원래부터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던 듯 보였다. 확실히 회의실에서 보았던 표정과 반응은, 동료라기보다는 오랜 친우를 대하듯 했으니.
이쪽이 평이하게 답했음에도 마음이 불편했는지, 페히스티아가 고개를 푹 숙여보였다.
“거듭 죄송합니다.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상대여서······ 그래도 공방주님은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예요. 이 이상은 절대 말을 옮기지 않겠다 약속드릴게요.”
“그정도 판단은 뜻대로 하셔도 상관 없습니다만.”
딱히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고 그저 조언을 준 것 뿐인데, 가끔 이렇게 기이할 정도로 눈치를 보는 자들이 생기곤 했다.
평소 무섭게 다그치는 것도 아닐진데······ 마력을 잘 갈무리 하고 다니는만큼 기세에 눌린 것은 아닐테고, 태도의 문제인가.
“그나저나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페히스티아 씨도 바쁘시겠군요. 공방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아뇨, 공방주님이 신신당부 하셨는걸요. 시간은 넘쳐나요. 혹시 제가 방해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다른 분들과 합류하면 될까요?”
하이엔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말씀해주세요.”
하이엔이 품 속에 있는 소개장을 떠올리며 말했다.
“트뤼멜가 저택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어머.”
뜬금없는 반응에 지긋이 바라보자, 페히스티아가 생긋 웃었다.
“저희 주요 고객 중 한 분이셔서요. 혹시 지금부터 그곳에 가시는 건가요?”
“그러려합니다.”
“그러시면······ 잠시 공방에 들러서 저희 물건을 가져가는건 어떨까요? 어떤 용건인지는 모르나, 고대하던 물건과 함께 방문하면 분위기가 꽤 부드러워 질거예요.”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난데없이 모르는 사람이 찾아가 부탁을 하는 것 보다는, 아는 얼굴과 함께 선물을 들고가는 것이 여러모로 그림이 나을테니까.
“그게 좋겠군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 보관소 쪽으로 다가갔다. 렐린트가 이쪽을 발견하자마자 씹던 여물을 퉤 뱉고는 달려와 얼굴을 부벼왔다.
보아하니 내내 거추장스럽게 끌고다니던 수레와 남는 마차도 처분한 모양새.
하이엔이 페히스티아를 마차에 태우려 했는데, 그녀가 한 발 앞서 마부석에 앉으며 말했다.
“제가 모시는 입장이니 여기에 앉을게요. 탑승하시지요.”
“...부탁드립니다.”
선선히 답하고는 마차에 올랐다.
잠시 후 공방에 들러서 재차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나온 페히스티아가, 직인인 메세와 함께 사람만한 상자를 하나 들고 나왔다.
“이게 생각보다 묵직하거든요.”
투시로 내용물을 들여다본 하이엔이 내심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 들어있었으니까.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것인지 궁금한데.
“자, 이제 출발할까요?”
마부석 자리에 메세가 나란히 앉고나자, 마차가 출발했다.
어느정도 이동했을 때, 문득 거리에 사람이 많아진 것을 느끼고 밖을 바라본 하이엔이 말했다.
“신전이군요.”
마침 도시에서 왕성 다음 가는 화려함과 높이를 자랑하는 건물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남부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죠. 짓는데만 20년이 걸렸다나봐요.”
“과연.”
답을 하며 가만히 신전을 응시했다.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이 도시 어딘가에 케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보는 자가 있을터.’
벨하르에서부터 그 존재감을 드러내던 잿빛 안대.
빌르딘의 말에 의하면 그 역시 계시주의자이고,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신의 사자라는 우월감에 심취해 있어 보는 자의 상징인 안대를 고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현재 그 역시 높은 확률로 안대를 착용하고 있을 확률이 높지만······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타인의 얼굴 가죽마저 뒤집어 쓰는 마당에 모종의 수작질을 위해 안대를 벗고 다니는 것 쯤이야.
하지만 글쎄, 그럴 것 같지는 않다는 예감이 드는 것은 지나치게 앞선 생각일까.
“.......”
생각하는 사이 신전이 뒤로 멀어졌다.
조금 이동한 끝에, 바퀴가 부드러운 노면에 닿으며 떨림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에 들어선 곳은 한 눈에 보기에도 부유함이 느껴지는 넓직한 거리였다.
바닥마저 지금까지처럼 흙길이 아닌 보도가 깔려있는 이곳은,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이 사는 거주지로 보였다.
얼마나 나아갔을까. 페히스티아가 말했다.
“마법사 님. 여기가 트뤼멜가 저택이예요.”
밖을 보니 중심가인만큼 외곽처럼 부지가 드넓지는 않지만, 화려한 외관을 한 저택이 보였다.
과연, 아텔라 벨하르의 친척이라 한들 그 삶의 모습까지 같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벨하르가 특유의 단아함을 지녔던 것과는 정 반대의 인상이 아니던가.
낯선 이의 방문에 저택 부지를 지키고 있던 경비 둘이 다가왔다.
"실례지만 어디에서 온 마차입니까."
"페나 공방 길드에서 온 페히스티아라고 합니다."
“아, 상당히 오랜만이로군요. 안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 이리 환대받을 줄은 몰랐는데, 감격스럽네요."
"말도 마십시오. 요즘 주인님께서 하루가 멀다하고 여러분을 찾으시는 통에 귀에 딱지가 앉은 참입니다. 바로 기별을 넣지요."
성문과는 다른 사뭇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 페히스티아가 이쪽을 소개했다.
"그런데 병사님. 상품도 상품이지만, 저희가 실은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거든요. 나으리께 전해드릴 수 있을까요?"
"귀한 손님이라면······."
동시에 하이엔이 마차의 커튼을 걷으며 소개장을 보였다.
"벨하르에서 영주님의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
"벨하르에서······!"
경비병이 대번에 놀란 얼굴을 하더니, 소개장에 새겨져있는 문장을 보았다. 그가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잠시 기다리라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려온 경비가 문을 열며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마차가 내부로 들어서고, 가로수를 지나 건물 앞에 멈춰섰다. 사람 하나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이엔이 마차에서 내리자 정중히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십니까. 손님을 환영합니다. 저택의 집사 할스만입니다."
"반갑습니다. 할스만씨. 하이엔 아인테르라 합니다."
"예, 하이엔 님. 소개장을 가지고 오셨다고 들었는데, 제가 살펴봐도 될런지요."
"물론입니다."
대답하며 소개장을 건네자 꼼꼼히 살펴본 할스만이 정중히 돌려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저희 주인님께서 준비를 마치시는데로 내려오실 겁니다."
그렇게 말한 할스만이 잠시 페히스티아와 인사를 주고 받고는 앞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하고, 하이엔이 서둘러 렐린트의 목을 긁어 진정시켜 준 후 뒤따랐다.
저택 안은 바깥보다 훨씬 화려했다. 특히 천장에까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은 썩 인상적인 광경이라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조각과 그림들이 훌륭하군요."
"예, 아시겠지만 트뤼멜가는 예술가와 길드들을 후원하는 가문이니까요."
몰랐던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에 조예가 있다더니 후원까지 하는 것인가.
얼마 안가 응접실에 다다르자 할스만이 곧바로 의자를 권하고, 그와 동시에 사용인이 다가와 눈 앞에 차와 쿠키를 내려놓았다.
할스만이 잠시만 기다리면 자신의 주인이 올 것이라 말한 후 인사하고는 문을 나섰는데, 그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멋들어졌다.
바로 얼마 전에 다녀왔던 제치를 떠올려보니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지조차 없는 귀족 가문의 수준이 이렇게 높은데 그곳은······
아니다, 생각하지 말자.
덜덜덜덜.
이상한 소리에 맞은편을 보니 메세가 다리를 떨고 있었다. 페히스티아가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메세 씨, 슬슬 적응해야죠. 어쩜 올 때마다 이래요?”
“그게 적응이 쉽지가 않네요. 귀족 분들을 뵙는건 매번 긴장되는 일이라······”
메세가 심호흡을 하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타타타타탁!
또 다시 들려오는 소음. 그러나 메세는 다리를 떨고있지 않다. 아니, 그보다 이것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복도에서부터 웬 사람 하나가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달린다니? 귀족이?
다음 순간 문이 부서질듯 벌컥 열렸다.
"어서오니라! 나의 귀염둥이!"
충격적인 언사와 함께 등장한 붉은 머리의 남자는 당장 연회에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치장한 상태였다.
뒤에서 할스만이 할딱거리며 소리쳤다.
"주인님! 손님도 같이! 벨하르에서 오신 손님도 같이 계시다니까요! 제발 체통을······!"
그와 동시에 기묘한 공명음과 함께 방으로 들어오는 무언가.
우우웅!
그것은 페히스티아가 가져온 상자 안에 있던 것과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인간을 닮았으나 지극히 단순화된 유선형에 가까운 몸체. 새하얗고 얇은 골격과 겉표면을 가득 메운 마세공.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에 얼굴 대신 십자모양의 원석을 달아놓은 인형이, 허공에 둥실 뜬 채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거의 사람의 절반만한 크기의 인형이, 물고기라도 되는 것 마냥 허공을 유영하며 주변을 맴돈다.
눈코입조차 달려있지 않은 얼굴이 감정을 표현하듯 갸웃하고 움직이는 모습.
특이한 것은 이토록 확실한 이적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에도, 주변에서 어떤 마력의 유동조차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핫핫하! 이거이거 미안하네. 우리 쟌니아가 호기심이 많아서. 벨하르에서 온 손님이라 하셨나?”
남자가 통쾌하게 웃으며 차림새 만큼이나 화려한 동작으로 인사를 했다.
"반갑네. 나는 르파벨 트뤼멜가. 예술과 인형을 사랑하는, 피할테헤에서 알아주는 괴짜라네."
- 작가의말
안녕하십니까 상쾌한 월요일입니다.
모두들 좋은 하루, 좋은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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