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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마엘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비평 - 중요부분


이 작품의 전개에서 나타나는 뼈대, 주요 갈등은 다음과 같습니다.

"변학도는 과연 변사또로서 남원 고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원작의 전개에서 벗어나 처벌받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갈등이 심화되고 폭발해야 하는 장면은 작중의 "절정" 에 해당하는 이몽룡의 재판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주인공의 최대 위기인 이몽룡은 단 1편, 몇 문단 만에 변학도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패배합니다.


그 순간 인물들에 내재된 현실성이 팍 사그라들어요.
갈등상황이나 긴장도 팍 사그라들면서 결말이 납니다.

작가님의 서재에서 "머니 게임" 이라는 다른 소설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 느낌을 받았습니다. (리메이크 하시는 거 보고 감격했습니다. 훨씬 나아져서요...... ㅠㅠ)


여기까지 생각하고, 전에 사평님께 비평 받으신 적이 있던 것이 생각나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비평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사평님이 해주셨던 역혼술사 비평에서 나온 이야기들과,
제가 변사또전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들이 상당수 일치하고 있었거든요.


1. 주인공들의 대사를 듣는 것이 즐겁다. 목소리가 귀로 전달되는 느낌이 난다.
2. 캐릭터를 따라 술술 읽힌다. 흐름이 자연스럽고 전개가 빠르다.
3. 사건의 깊이가 떨어진다. 인상깊은 사건이 없고 기승전결에서 전이 빠진 느낌이다.

사평님의 비평을 읽으신 작가님은 주인공의 색깔이 없어 그런 것 같다, 다음 소설을 쓸 때에는 뼈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먼저 캐릭터를 보겠습니다.

변학도는 약간의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자신의 도시를 잘살게 만들겠다고 결심한, 젊고 정의감 넘치는 관료입니다. 부패했다고는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한 행동이고, 그것은 오히려 비주류적 성향이라고 분류해야 합니다.

이 글의 뼈대, 즉 주요 갈등은 다음과 같습니다.

"변학도는 과연 변사또로서 남원 고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원작의 전개에서 벗어나 처벌받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작품의 절정은 여전히 약합니다.
왜 이렇게 됐지? 하고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첫째로, "변사또전" 의 구조 자체상 두 번의 반전을 견뎌낼 만큼의 위기가 쌓이지를 못하는데, 작품의 위기와 절정 부분에서는 두 번의 반전이 거듭됩니다.

두 번의 반전을 견디려면 작품 내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해줄 만큼의 위기가 쌓여야 합니다. 그런데 "변사또전" 의 구조는 그렇지 않습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보자면요. 7편 완결인데 벌써 4편에서 볼드모트가 귀환하고 5편에서 해리 포터의 사춘기 같은 개인적인 상황까지 합쳐져서 본격적으로 암울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5편에서는 해리 포터의 대부인 시리우스 블랙이 죽고 6편에서는 덤블도어 교장이 죽지요. 그리고 해리 포터 본인조차 7편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도망치다가 결국 죽음과 부활을 거칩니다.

4편에서 볼드모트가 돌아오는 그 시점에서 이미 "해리 포터" 시리즈의 위기가 시작됩니다. 그 이전의 1-3편에서도 이미 소소한 위기와 해결이 있었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주인공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가 생기는 거지요. 4/7이면 작품의 중후반대에서부터 이미 위기가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됩니다.

그래서 "해리 포터" 의 독자들은 천천히 긴장감을 적립해나가게 돼요.

반면, "변사또전" 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은연적으로 안심을 하게 돼요. 변사또전의 전개를 보면서 독자들이 계속 보는 것은 변학도의 선정입니다. 악정이나 무슨 위기가 아니라요. 그래서 양반들이 술수를 부리고 이방이 어사를 보내달라고 청하고 이몽룡이 온다고 해도 아 뭐 잘 되겠지! 하는 은근한 배짱이 생겨요. 해리 포터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아...... 뭐...... 자자자잘되겠지......? 덜덜덜덜...... 인데 변사또전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변학도는 이미 여러 번의 위기를 잘 넘겼고 그때마다 일은 술술 좋은 쪽으로 풀립니다. 독자들은 이미 여러 번 변학도가 상황을 해결하는 걸 보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쳐와도 크게 걱정되지 않습니다.

위기 부분에서, 이몽룡이 돌아오고 춘향이가 그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이몽룡의 아버지 이한림이 춘향의 수청을 받으라고 변학도를 종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충분히 긴장감이 생길 만한 상황이죠. 그런데 그 뒤에 변학도가 "나 변학도! 숨지도 않을 것이고 피하지도 않겠다!" 하는 그 순간 안심이 됩니다. 하하하하! 별 거 아니겠네! 학도향단 행쇼! 하게 됩니다. 거기다 그 편의 마지막에는 춘향이가 엎드려 울면서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죄하기까지 하고요. 그래서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고 안심되고 느긋해집니다. 이번에도 또 변학도가 상황을 잘 해결하겠지 싶어서요.


해리 포터의 구조:
위기가 온다->해결하지만 불안감이 남는다(볼드모트 귀환)->불안감 적립
->위기가 온다->해결하지만 불안감이 남는다(시리우스 죽음)->불안감 적립
->위기가 온다->해결하지만 불안감이 남는다(덤블도어 죽음)->불안감 적립
->위기가 온다->해결할 수 없다(호그와트 쫓겨남. 데스이터들이 쫓아옴)
->비밀이 밝혀짐->적립되었던 불안감 폭발(주인공 죽음)->부활
->결전->해결(아 살았다...... 다행이야 ㅠㅠ)->끝


변사또전의 구조:
위기가 온다->해결(양반들 그까이꺼)
->위기가 온다->해결 (이방 그까이꺼)
->위기가 암시된다 (이방 때문에 암행어사가 올 거 같다)
->위기가 온다->해결 (장길산 그까이꺼)
->위기가 온다->해결 (이몽룡 그까이꺼)
->반전->해결(그까이꺼)
->반전->결전->해결(그까이꺼, 아 시원하다!)->끝


구조상 두 번의 반전이 충격적이려면
그동안 전개가 탄탄하고 전개를 따라 위기감 적립이 차곡차곡 되고 그러다 통수를 한번 쳐줘야 합니다.

그런데 일단 위기감 적립이 제대로 안 되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이건 변사또전이 술술 읽혀나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위기가 닥쳐와도 별 두려움 없이 스무스하게 읽게 되거든요. 그래서 어떤 상황이 닥쳐오고 위기가 생겨도 그에 맞먹는 통쾌한 해결이 나오고, 아주 신나게 술술 읽힙니다.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되는 부분인 거죠.
이 부분은 작가님의 섬세한 조율이 필요한 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전개해나갔는데 여기에서 두 번의 반전을 쳐서 절정과 결말의 퀄리티를 살리려면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이제까지 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했던 정보를 이용해서 으아아아 원기옥!!!! 있는 위기감이여 모두 나와라!!! 하고 모아서 한방 날려야 돼요.

그런데 변사또전의 클라이막스에서 위기감은
갑자기 튀어나왔다
갑자기 가버립니다.


변학도가 "나 변학도! 숨지도 않을 것이고 피하지도 않겠다!" 한 그 다음 편에 갑자기, 형방이 만들었던 변사또의 죄질 장부가 나옵니다.

작품 초반부에, 변학도는 자신이 곧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변사또의 죄를 정당하게 처벌받게 하기 위해 형방을 시켜 변사또의 죄질 장부를 만듭니다.

초반에 이미 깔려져 있던 복선이었습니다. 복선을 잘 활용하셨고 떡밥도 잘 주우셨어요.

그런데 그 순간 전개를 따라 차곡차곡 쌓여야 할 긴장감이 "죄질 장부로 인해" 갑작스럽게 생깁니다.
이 죄질 장부는 갑툭튀의 느낌을 줍니다.


소설의 전체 구조와 그 전개를 통해 쌓여가는 위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양반들은 남원 고을을 개혁해 나가고 기득권층의 힘을 약화시키는 변학도를 눈엣가시로 보고 암행어사를 내려보내게 만듭니다.
그 암행어사는 이몽룡일 것이 당연하겠고,
이몽룡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문제는 성춘향이고,
춘향이와 학도의 관계에서 긴장감과 위기감이 생깁니다.

독자들은 이 전개에 초점을 맞추게 돼요.
원작에서, 춘향이에게 수청들란 이유를 중심으로 변학도가 오라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질 장부는
전개 내내 나왔던 양반들과도 관계가 없고, 춘향이와 학도의 사이와도 관계가 없고,
심지어 변학도 본인이 한 일도 아니고 그 몸 원래 주인이 했던 짓이에요.

그냥 초반에 잠깐 등장했던 "이몽룡에게 걸리면 변학도가 끝장나는 물건" 이에요.
이제까지 변학도가 해왔던 일들, 소설의 전개와 관계없이요.

그래서 뭐랄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느낌이 듭니다. 변학도를 끝장내기 위한 기계장치의 신이다!!!!! 이 느낌이요.
분명 초반에 던져졌던 떡밥인데 좀 뜬금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좋아요. 약간 삐그덕거리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분명히 앞에 나왔던 떡밥이니까요. 놀랍기도 하고 작가님 자체의 내공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기도 하고, 이 긴장감을 어떻게 잘 활용하시느냐에 따라 결말의 퀄리티가 달라질 거란 기분도 듭니다. 그 떡밥 회수 안하는 게 더 이상했을 거란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그 다음 편에 "사실 그 죄질 장부 형방이 다 파기했습니다" 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생긴 긴장감이 갑작스럽게 없어집니다.
충격이나 공포라기보다는 허무감이나 얼떨떨함이 남습니다.


떡밥 회수한지 1편만에 없어져요......? 왜죠?



그리고 형방이 장부를 다 파기했다고 한 바로 그 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변학도가 관노비를 해방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이몽룡이 얼굴을 싹 바꾸어 변학도를 잡아들입니다.

새로운 위기가 생겼습니다. 단 한 화 만에요. 새로운 긴장감이 또 갑작스럽게 생깁니다.


그런데 발단-전개-위기 동안 계속 갈등과 위기감을 조성하던
양반들은 아무것도 안하고,
춘향이도 이 중대한 순간에 가만히 있고,

변학도가 오라를 받는 이유는 자신이 "관노비를 해방했다" 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양반들이 변학도가 관노비 해방했어요 하고 이르는 것도 아니고요.

계속 갈등을 조성하던 요소들은 어디로 가고, 대신 앞에 잠깐 나왔던 죄질 장부가 나왔다가 없어지고, 뒤를 이어서 관노비 해방이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맥락이 없고 뜬금없어 보입니다.


그 뜬금없는 위기를 타고 절정으로 넘어가는데, 이 절정 역시 단 한 화 만에 끝납니다. 그래서, 절정 부분에서 그때까지 느껴진 위기감이나 긴장감이 폭발하고, 독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기보다는

갑자기 생긴 위기가 "또" 손쉽게 해결되는구나. 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 두 번의 반전은 갈등을 극대화해서 카타르시스를 주거나,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기보다는 갈등을 축소시키고 흐지부지하게 해버려요. 그래서 절정이 약해집니다.

전개 내내 중심이 되었던 위기가 극대화되어서 폭발하려는 순간에,
맥락없이 다른 위기가 나타나서 물타기가 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반전이 거듭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사실은.......
(저도 반전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소설이
너무 착해요.


여기에서 너무 착하다는 건 소설 내에 "옳은 것" 이 있고 작가님이 그것의 편을 너무 노골적으로 들어주고 있다는 뜻이에요.

작가님이 만들어주신 세계에서 주인공은 약간 마이너리티거나 아웃사이더, 어쩌면 루저라고 볼 법도 한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사람이에요.

주인공의 주변에는 못된 사람도 있고 주인공을 해치려는 사람도 있고 주인공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주인공인 착한 사람이 제일 세고 그 사람을 이곳저곳에서 도와주면서 해피엔딩이 이루어집니다.

갈등이 있다 해도 너무 주인공이 뜻한 대로 술술 풀립니다.

주인공은 선하고 착하고, 그런 자신의 사상을 펼쳐나가고, 주변에서는 주인공의 그런 행보를 지지하고 도와주고 사랑하고, 주인공의 노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갈등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쉽게 풀립니다. 엄청나게 빠르게 문제가 해결되고요. 주인공이 몇 마디 말한 걸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들이 다반사입니다. 그나마 물 대기에서는 납득할 만했지만...... 다른 것들은, 글쎄요.


후반부 갈등이 사라지는 장면이 가장 그렇습니다.

작중에서 변학도는 사또의 권한으로 관노비 문서를 전부 불태우고 관노비들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줍니다. "이젠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라" 고 말하면서요.

그리고 이 관노비들은 변학도에게 감사하고 저마다 잘먹고 잘삽니다. 그리고 다들 변학도의 이 행동을 칭송합니다.

단 하나 이 행동을 잘했다고 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암행어사 이몽룡으로, 변학도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던 그는 변학도가 관노비를 해방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국가의 재산을 없애버렸다고 분노하며 변학도를 오랏줄에 묶습니다.

그런데 온 남원민들은 변학도를 구제하기 위해 이미 방안을 만들어놓았으며 묶여 있는 학도를 보고 다들 울면서 사또를 외쳐 부르고 그 모습을 본 이몽룡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신분 해방에 대해 다루었던 다른 명작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특히 그렇습니다.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중후반부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흑인노예 해방에 대해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갑작스럽게 자유를 얻은 노예들은 순식간에 혼란 상태에 빠집니다.

갑작스레 노예상태가 풀리자 흑인들은 자유에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곧 자신의 행동이나 인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변사또전의 노비 해방처럼요.

그런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에서는, 책임을 요구받는 상황이 오자 흑인들이 얼떨떨해합니다.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던 것이 당연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유를 얻게 되자 그 자유는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됩니다. 사촌형에게 물려받은 안 맞는 명품 청바지 뭐 그런 느낌으로요.

예전 같았으면 주인이 노예의 인신을 책임진 상태에서 당연히 노예에게 해주었던 것들, 병을 치료하는 것이라든지 새 옷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흑인들에게 주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직장을 구하러 다니고 아프면 병원에 가야 했고 약을 구해다 먹어야 했는데, 흑인들은 이제까지 이런 일들을 해본 적이 없었고 할 줄도 몰랐습니다.

거기다 이들 중 일부는 갑자기 속박이 풀리자 그동안 못해보았던 것들을 실컷 하기 시작합니다. 과음이나 도박 같은 것들이요.

갑작스럽게 옛 주인의 집에서 나가야 하게 되면서 길거리에 나앉은 흑인들은 차라리 주인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울부짖기도 하고요.

거기다 북부의 백인들은 자기가 흑인들을 자유로 만들어주었으면서도 인종차별하며 흑인들에게 일자리를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북부에서 온 한 귀부인이 "새 유모를 찾고 있다, 괜찮은 사람이 있느냐?" 고 주인공인 스칼렛에게 묻는데, 스칼렛이 웃으며 "해방된 노예를 소개해주겠다" 고 말하자 "더러운 흑인에게 아이를 맡기냐?" 고 질색하지요.

그래서 흑인들은 일자리도 찾지 못하고, 몇몇은 굶다 못해 범죄로 빠져들고, 병들고, 술에 취하고, 남부의 기존 기득권층은 전쟁 때문에 빈곤해져 남부가 혼란에 빠지는 장면을 세세하고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작품에 대해 좀 좋게 써놓았기는 했는데...... 노예제 미화에 인종차별, 증오범죄 미화까지 가지가지 하는 소설입니다. 변사또전과는 아주 반대의 스탠스에 자리하고 있어요. 이 글은 나쁜 여자 같은 소설입니다.)


최근 판타지 소설 조지 R. 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미린의 여왕이 된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은 노예제를 완전 혁파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러자 미린의 귀족들이 반 대너리스 파벌을 형성하고 대너리스를 공격하고, 노예상들을 부추겨서 혼란 사태가 찾아오면서 몇몇 해방노예들은 차라리 노예로 돌아가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 조지 R. R. 마틴은 본인의 소설에 나온 정치 활동 묘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난 봉건 시대와 로마 제국 등에 대한 많은 역사적 자료를 읽었습니다, 또 최근의 정치에 대한 것도요. 그리고 내가 깨달은 건 그 문제들이 징글맞다는 거죠. 많은 판타지 콘텐츠들은 그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어요. 좋은 사람은 좋은 왕이 된다. 음, 좋은 사람이 언제나 좋은 왕이 되는 건 아니죠. 그리고 나쁜 사람이 언제나 나쁜 왕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이건 훨씬 복잡한 문제예요. 내 인생을 걸쳐 봤을 때, 내 생각에 아마 대통령 중 가장 착한 사람은 지미 카터일 겁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착한 인간으로서, 하지만 좋은 대통령은 아니었어요. 아니었죠. 보편적인 선함으로 그냥 세상이 꽃밭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본 나쁜 사람은, 예를 들자면 리처드 닉슨이죠. 닉슨은 어떤 면에선 나쁜 대통령이었지만, 어떤 면에선 매우 뛰어난 대통령이었고 중국을 개방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관노비 해방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부작용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자유는 자신이 투쟁해서 얻어낼지라도, 처음 얻어냈을 때에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으니까요.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프랑스 혁명기의 혼란상만 들어도 그래요. 공포정치, 테르미도르 반동,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가 일어나고 나중에는 왕정이 복고되기도 하고요. 이렇게 큰 혼란을 빚어냅니다. 독일 제정 붕괴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의 혼란상만 보아도 그렇고요.

하물며 남이 옛다 하고 갑자기 던져준 자유는 어떨까요?
변사또전에서는 그런 혼란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좋은 세상이 되겠지! 하고 던지신 다음에
이렇게 이렇게 해서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십니다.

그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의 부작용은 없습니다.


그래서 변학도의 주변 인물들은 인형이나 프로그램 데이터처럼 보입니다. 학도가 명령값을 넣으면 프로그래밍한 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요. 변학도가 노비를 해방한다 -> 노비들은 잘산다 변학도를 좋아하게 되었다 뭐 이런 식으로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물들이 평면적이에요.
주인공인 변학도까지도요.

사평님 비평의 댓글에서 작가님도 "주인공이 무채색이라서 그런 것 같다" 고 하셨는데, 제가 역혼술사를 다 읽지 않아서 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변사또전에서도 주인공에 개성이 없습니다. 변학도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보이지 않아요.
그냥 "착하고 정의로운 주인공 캐릭터" 의 스테레오타입 같아요. 거기에 양념도 솔솔 들어가고 작가님만의 특별한 요리법으로 구워지고 볶이고 데쳐져야 하는데 그게 없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이건 중편소설의 어쩔 수 없는 한계점 같기도 했고...... 장편소설이면 주인공을 데리고 지지고 볶고 뭘 더 해볼 수 있는데 중편소설은 아무래도 분량이 좀 그렇고, 변사또전 자체가 캐릭터보다는 사건이나 작가님이 하고 싶은 말에 치중된 글이라서 그러기가 어려웠을 것 같았습니다.
캐릭터 자체의 설정에 "작가가 하고 싶은 말" 을 녹여내면서 매력을 만들어내면 될 것 같은데 이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ㅠㅠ

그런데 그것보다 다른 남원민들이 평면적인 게 더 불편했습니다. 결말에서 마을 주민들이 울면서 꿇어앉아 사또를 외치고 사또를 풀어달라고 하는 장면은 정말 부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뭘 하든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는구나, 주변에서는 무조건 학도를 지지해주는구나,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캐릭터들이구나, 싶어서요.

노비문서가 다시 생기고 기존의 관노비들은 다시 관에 귀속되고 사또 저희를 책임져주십시오 하는 장면에서는...... 이 부분을 해피엔딩처럼 느끼시는 분이 많으셨을 테고, 작가님 본인도 해피엔딩으로 쓰셨겠지만,
저에게는 해피엔딩...... 인가? 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해피엔딩인데 뭔가 약간 좀 그런 느낌이요.


물론 부작용이 완전히 서술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관노비 해방 뒤에 남원 공기관의 노동력이 줄어들어, 할 사람이 없어진 일들은 "남원의 짐이 되어 버렸고, 변학도의 짐이 되어 버렸다" 고 언급됩니다.

그런데, 변학도만의 짐이 되었다고 나왔을 뿐입니다.
관노비들에게는 그냥 좋은 일이었다고만 나옵니다.

"관노비의 문제때문에 부가 공평하게 돌아가지 못하고, 경쟁력이 하락되었음을 왜 알아주지 않는걸까." 라고 하는데
관노비 해방 뒤에는 무조건 부가 공평하게 돌아가고 경쟁력이 상승하기만 하는 것도 아닌걸요.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지 말입니다.


변사또전의 외전 "공보 신문" 에서도 변학도가 만든 공보 신문의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변학도는 백성들을 위해 공보 신문을 만들지만, 처음 공보 신문이 만들어졌을 때 다들 먹고 살기 바빠서 신문을 보지 못합니다. 변학도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광고와 연예란을 만드는데, 그러자 남원민들은 연예란에만 신경을 쓰게 됩니다. 이 부분의 서술은 아래와 같습니다.


"씁쓸했다.
정작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은 정치와 사건인데, 그 곳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먼 곳만 바라보지 않는가."

"이러한 문제는 현대에서 더욱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
(중략)
모뉴엘 사건이 일어나고 2일도 지나지 않아서, 국민들은 그 사건을 잊어버렸다.
정보의 바다라 불리는 인터넷 사이트들의 검색 키워드는 그날 한 방송이 무엇인지, 어떤 연예인이 무엇을 했는지, 또는 해외의 어느 팀이 축구를 하는지로 바뀌어 버렸다."

"조금이라도 올바른 소식을, 그리고 빠른 소식을 전해들으라고 만든 언론인데 그 의도를 '자신들의 관심사'를 채우는 것에만 급급해 하니 씁쓸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 부분은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것들은 가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고 뉴스를 보나 신문을 보나 영양가있는 것들은 하나도 보지도 않고 게을러빠져서 정치에 관심도 없고 대학까지 나왔다는 것들이 말이야 쯧쯧 20대 투표율이 가장 낮다면서? 쯧쯧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쯧쯧"

......이 느낌이 나는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세련되지 못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작가님이 갑자기 글에서 툭 튀어나와서 독자들한테 한탄하거나, 어리석은 군중들 쯧쯧 하면서 가르치려 드시려 한다는 불편함이 뒤따랐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냐면요.

제가 위에서 말한 "얼음과 불의 노래" 노예제 혁파 뒤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지잖아요. 노예제를 혁파한 것 때문에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보여" 주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 정치란 쉬운 문제가 아니구나...... 하고 그 혼돈파괴망각을 보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변사또전에서는 그걸 서술자가 "말해" 줍니다. 그것도 한 가지 문제점만을요. 그 말에 공감은 하지만, 너무 단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조금 지루했습니다. 명절날 어르신들 훈계말씀 듣는 거 같았거든요. "요즘 것들은 가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고 뉴스를 보나 신문을 보나 영양가있는 것들은 하나도 보지도 않고 게을러빠져서 정치에 관심도 없고(이하생략)" 이거요. 그 말씀이 맞는다는 건 알지만 지루하고 도망가고 싶잖아요. 그런 거랑 비슷했습니다.


작가가 자기 생각이나 이상을 글에 담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변사또전" 은 그게 세련되지 않게 표현된 게 지루함, 불편함과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저를 홀리게 했던 그 디테일이 어디 갔는지, 솔직히 말하자면 안타까웠습니다.

작가가 주장하거나 제안하고 싶은 부분들은 세세하게 쓰고 자기 이론의 후폭풍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데 내 말대로 하면 이렇게 될 거야! 하면서 자기 이상이 잘 해결될 거라고 말하는 걸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단편적인 현상을 해설로 쓰시는 게 아니라 복합적으로 일어난 현상들을 진지하게 전반적으로 묘사하면 훨씬 퀄리티가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히 복잡하고 복합적일 수밖에 없는 사건을 쓰시는데, 그것들을 너무 쉽게 단편적으로 쓰셔서, 맥이 빠집니다. 작가님이 갈등을 싫어하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결말이 아쉬워요.

사람이 하는 일들이 이렇게 줄줄 잘 풀리기가 쉽지 않고 단순하게 후딱후딱 갈등이 사라지기가 쉽지가 않은데 변사또전에서는 그게 이루어집니다.

반대자인 이몽룡은 이건 아니라고 반발하긴 하는데 그의 반박은 소설 내부에서 채 열 줄도 안 나옵니다. 그리고 변느님께서 일갈하시자 이몽룡은 단 1편도 안되어 팍삭 찌그러집니다.

심지어 이몽룡을 사랑하는 춘향이마저 변학도를 보며 "저런 남자를 한순간 마음에 두었던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고 해요. 이몽룡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학도의 사상, 그의 가치관을 지지하고 존경한다는 뜻인데......


저는 그 가치관에 공감을 하지를 못하겠고 학도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몽룡이 "그렇다고 양반과 천민이 같아질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고 하자, 학도는 "너 같은 돌머리도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주지." 라고 했는데,

저는 돌머리입니다. 학도가 뭐라는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춘향전의 배경이 되는 조선 중기는 아직 신분제가 존재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제 배를 불리는 변사또를 향해 백성들을 살피라 호통치는 이몽룡의 모습은 마치 영웅과도 같았다.
변학도가 본 이몽룡은 그 자신이 양반임에도 백성들을 먼저 살피는 위정자요, 법의 집행자였다.
그것이 진정한 양반의 업,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근본이라 생각했다."

변학도는 말합니다.

"양반이란 자가 감히 하늘 아래 사람을 차별하는 문서를 허락하는가? 천민은 사람이 아니란 건가?"


1. 양반은 신분제 사회에서 가장 높고 고귀한 자이다.
2. 그러므로 백성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
3. 그러므로 사람을 차별하는 신분제는 없애고 백성들을 평등하게 사랑해야 한다.


......어?

신분제 사회에서 가장 높은 자이므로 본이 되어야 하는데,
그 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높은 지위 원천인 신분제를 인정하면 안 된다고요?


1.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 그럼 제가 알아듣게 수정하셔야 합니다...... 돌머리도 알아들을 수 있게 해주신다면서요. ㅠㅠ
2. 저 말 뜻이 맞다 -> ......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기본적으로 인간 사회가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시작하는 이야기잖아요. 위가 아래를 사랑하고 베풀어야 한다는 거니까요.
계급을 무너뜨리자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원작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변학도에게 백성들을 사랑하라고 호통친 것도 애초에 "신분제에 묶인 생각" 으로 한 거고요. "양반으로서" "신분제의 위에 있는 자로서" 아래를 사랑하라고 호통친 거죠.

그런데 위아래를 없애버리면 어떻게 위가 아래를 사랑해요?


변학도는요.

1. 신분 차별을 없앤다.
2. 양반들이 일반 민중들을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마음가짐으로 사랑한다.


이거 두 개를 동시에 원하고 있는데....... 이거는 불가능하지 말입니다. 조선의 반상제와 현대의 계급제는 분명히 다른데 이건 현대의 계급제에서나 가능한 일이에요.

변학도의 사상은 빼도박도 못하게 21세기 한국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17세기 조선의 이몽룡에게 강요하고 있어요. 400년 동안 사상의 흐름을 무시하고요.

놀랍게도 이몽룡은 거기에 감화됩니다.

그런데 감화되기에는 변학도의 논리가 빈약한 편입니다.


이 논리배틀의 주제 자체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 에서 신분제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거든요. 이몽룡의 논리는 플라톤의 논리와 비슷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특질에 의해 구분된다. 현명한 이들은 머리, 용기있는 이들은 가슴, 그리고 절제가 필요한 이들은 배이다. 이들은 서로 협력하며 사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가장 현명한 이들에게 가장 높은 지위, 통치할 수 있는 권리가 돌아가야 한다."

이건 신분제와 계급제 옹호자들의 기본 논리입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태어날 때부터 노예로 태어나는 자들이 있다" 고 노예제를 옹호했지요. 만약 변학도와 플라톤이 논리배틀에 투입되었다면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인간의 몸에는 머리가 할 일과 가슴이 할 일과 배가 할 일이 있다. 그런데 너는 머리를 사랑한다고 해서 가슴과 배 없이 머리만 세 개 붙이고 다니려느냐?"
이몽룡이 말하려던 부분도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변학도는 이것을 사랑의 문제로 끌고 내려가요. "왜 천한 신분인 성춘향을 사랑하면서 다른 천한 자들은 사랑하지 못하느냐? 왜 신분제를 인정하느냐?" 하고요.

그래서, 몽룡이 학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학도가 몽룡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논리로는 신분제 옹호론자들과 토론해서 이기지 못합니다.

머리를 사랑한다고 해서 머리만 세 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배를 사랑한다고 해서 배만 세 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변학도가 진짜 신분제 옹호자들의 논리를 격파하려면 이몽룡이 이런 류의 반박을 했어야 했고, 변학도가 여기에 대한 답을 해야 합니다. 사랑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요.


그런데 이몽룡은 이런 류의 반박은 전혀 없고 그냥 머뭇거리다가 얼굴만 빨개집니다. 그리고 나는 백성들을 진짜로 사랑하지 못했나봐 ㅠㅠ 하면서 부끄러워하고 내려가고요. 솔직히 이 부분에서 조금 김이 샜어요.


이몽룡은 유학을 공부했고 관련 시험으로는 전국최고권위를 가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했어요. 유학에는 음양론, 정명 사상 등 신분제 사회의 논리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여러 이론들이 있습니다. 죽도록 공부만 했고 모든 유학 서적들을 독파했을 과거 급제자라면 얼마든지 이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있었을 겁니다. 이몽룡의 지식 수준에서 마땅한 수준의 답변이 나와야 합니다.

얼굴 빨개지면서 내려가는 게 아니라요.

이건 전국수학올림피아드에서 혜성같이 나타나 대상을 받은 천재 고등학생이 9X9=81을 못 하는 거랑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몽룡은 그렇게 했습니다.


이건 마치.......
나루토 결말.......

나루토 결말에서, 10년간을 끌어온...... 원나블 하고 누구나 다 알던 그 만화에서 나루토는 입털기 몇번으로 적들을 감화시키고 마무리에서는 나루토와 사스케가 싸우다가 쓰러지고 나루토가 다시 설득하니까 사스케가 눈물을 흘리면서 나뭇잎 마을로 돌아와서 사쿠라랑 애낳고 자기는 나돌아다니면서 사는 그런.......

그런 것을 보았을 때의 허무감이 찾아왔습니다.......

다시 관노비 문서가 생기는 거 보면서 '해피엔딩...... 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때도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나뭇잎 마을에 있는 기존의 문제점 증오의 연쇄를 해결하지 않은 채 경제만 발전시키고 나루토가 호카게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요. 그때도 '어...... 나루토랑 히나타가 결혼했으니까 됐어' 싶었거든요.

물론 사스케도 나루토의 설득에 그냥 귀환해서 사쿠라랑 애낳고, 자긴 나돌아다니면서 살고, 나루토는 경제호카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사가 그렇게 될 때도 있지 않나요? 그런 걸 감안해 봤을 때 오히려 현실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전국수학올림피아드에서 대상 입상한 천재 고등학생도 9X9=81을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고요. 걔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죠.
이몽룡도 그냥 변학도의 일갈에 얼굴 빨개져서 부끄러움 느끼면서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아직 어린 소년인데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부분은 작품을 보면서 가장 기대하는 장면이란 말이에요.

"변사또전" 의 절정 부분, 변학도가 오라를 받아 이몽룡의 앞에 꿇어앉은 상태에서 논리 배틀을 벌이는 장면은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독자들이 가장 긴장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변학도는 이제까지 남원 고을에 선정을 베풀어 더욱 잘사는 고을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변학도가 어떻게 남원을 좋은 고을로 만들어갈까? 그리고 춘향전 원작의 전개를 비틀어 암행어사 이몽룡의 처벌을 피해갈 수 있을까? 이 두 개가 독자들 초유의 관심입니다.

변학도는 여러 문제들도 효과적으로 해결하고 관노비들도 풀어주고 남원 고을민들의 사랑도 받는 좋은 사또가 됩니다. 그리고 위기-절정 부분에서 원작대로 이몽룡이 옵니다. 춘향이 자유고요. 변학도의 죄는 장부에 낱낱이 적혀 있지만 사실 그거 형방이 다 파기했고 이몽룡은 아직 어린애로 변학도에게 호의까지 보입니다.

그런데 삽시간에 분위기가 반전! 관노비들을 풀어주었다는 이유로 변학도가 갇힙니다. 미래를 바꾸지 못할 위험이 갑자기 팍 올라가는 거죠. 그러면 독자들은 3D안경이랑 팝콘 챙겨갖고 모니터 앞으로 달려옵니다.

작가님도 언뜻 언급하셨지만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로 천민과 노비의 존재를 인정했고 관에서 노비를 두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변학도는 그 관노비들을 풀어주면서 신분제를 거부했어요. 혁명적이죠. 작가님이 말씀하신 대로 변학도는 현대인의 감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17세기 인간인 이몽룡을 설득해야 해요. 다시 말해서 변학도는 지금 당대 사회와의 결전에 나서게 된 거고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논리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 최종보스전인데
주인공 vs 당대 사회를 유지하려는 사람.

상대방은 권력도 있지만 주인공이 갖고있는 무기는 오직 세 치 혀뿐
쩔죠. 대단한 최종보스전입니다.


그런데 이 사상 초유의 흥미진진한 논리배틀에서

변학도는 현대인의 사상을 외치면서 17세기 당대인인 이몽룡을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고, 그래 너도 신분제에 매여져 있는 인간이구나 네가 잘못되었다고만 꾸짖고(17세기에는 그게 당연한 건데.......)

신분사회의 수호자 최종보스 이몽룡은 고작 열 줄 정도, 결정적인 "한 방" 이 아니라 잽만 날리며 반박하다가 내려옵니다.

그것도...... 장원급제자의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는 논리로요. 변학도는 엄청나게 칭송을 받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데요.


최종 보스잖아요.......
근데 왜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려요?


남원민들은 다들 사또를 부르며 풀어달라고 우는데, 저는 학도와 몽룡의 문답 자체가 너무 허무해서 도저히 거기에 이입할 수가 없었어요....... 거기다 학도가 기껏 해방한 관노비도 다시 노비가 되어 관에 되돌아왔고요. 노비가 돌아왔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학도는 좋은 수령이고 그 노비들도 잘 보살필 테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겠죠.

그런데 그러면 인간을 모두 차별 없이 대해야 한다는 변학도의 사상은 어떻게 된 건지, 신분 차별을 만든 문서를 없애버렸다면서 왜 다시 그걸 받아주는 건지, 이렇게 될 거면 왜 노비 해방을 시킨 건지, 그냥 클라이막스를 위해서만 노비를 해방시킨 건지,
이게 대체 뭐인 건지 알 수가 없고.......


그런 식으로 끝나니, 작가님이 너무 공개적으로 변학도 편에 서신 것 같았습니다.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내고, 설정상 똑똑해야만 하는 이몽룡을 멍청하게 만들어서 변학도를 현명하고 정의로운 "변사또" 로 치장해주는 기분이었거든요.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읽고, 작가님은 현실 정치에 실망하고, 구태의연한 시스템이나 세상이 바뀌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소설을 통해 본인이 생각하시는 이상향을 그려보고 싶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학도와 같은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 약간 비딱하면서도 소탈하고 뭇 사람들을 사랑하고 가방끈이 짧거나 아는 것은 많지 않아도 마음이 진실한 그런 사람이요. 그리고 작가님 소설에 나오는 이상향은 그 마음이 진실한 지도자를 다른 사람들이 따르면서 이루어지지요.

그래서 작가님도 변학도의 손을 들어주신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작가님 본인께서 세상이 바뀌기를 원하셨기 때문에요.


변사또전이 사랑을 받은 것도 이해가 갔습니다. 작가님의 이런 진심이 공감을 얻어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냈다는 건 정말 중요한 점입니다.

여기에서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호평을 드리고 싶습니다.

작가님이 가지신 재능이자 저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은 다정한 분이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작가님 글의 세계는
"주인공에게만 다정한 세계" 였어요.
최종 보스도 주인공 말 몇 마디에 허무하게 가버릴 정도로요.......
때문에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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