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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니르 님의 서재입니다.

아포칼립스의 신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아함(阿含)
작품등록일 :
2022.05.11 10:08
최근연재일 :
2022.11.29 22:00
연재수 :
2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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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80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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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693,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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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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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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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9. 천마대전 5

DUMMY

연소의 3요소는 가연물, 산소, 점화원.

설령 내가 무얼 태울지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일반적인 불의 성질 자체가 그랬다.


‘가연물은 마나, 산소는 풍우룡의 숨결, 점화원은 권능으로 대체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위력은 예의 유피와의 결전에서 사용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바닥에 깔린 천마를 향해 쏘니 아마 이 숨결은 지축을 뚫고 반대편에여 튀어나오리라.


“키야아아악! 죽인다! 죽인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천마가 끝없이 발버둥 쳤다.


-이미 늦었어.


“키야악! 키약! 키약! 캬오오오오!!”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럴수록 유피의 먹구름 거인이 그를 더욱 단단히 옥죌 뿐이었다.

짐승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자신의 최후까지 비명을 지르는 것뿐.


<마신공(魔神功)-제 2마, 마흉(魔凶)>


─투콰앙!!


유리감옥에서 탈출했을 때처럼 열심히 양의 마나를 방출해보지만 이는 모두 유피의 먹구름 거인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잘 가. 넌 우리가 만난 가장 강한 적이었어.


그 강함에 경의를 표하며 나는 살며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적어도 지구의 자연에선 찾아볼 수 없을 열(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선보이는 것은 양기(陽氣)의 극치.


<용의 숨결(Dragon Breath)-푸른 불꽃(靑火)>


다만, 그 색은 붉지 않고 푸르렀다.


─푸화학!!!


“죽이면 안 돼!!!”


멀리서 장자의 애처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애절한 비명에 답하기에는 아쉽게도 너무 늦어버렸다.


숨결은 이미 쏘아졌고 이를 막기에는 장자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다.

이미 쏘아진 숨결을 막는 것은 그 유피조차 불가능한 일.

아니, 이를 잠시라도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쨍강!!


숨결의 여파를 견디지 못했는지 장자가 만들어낸 영역은 결국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영역이 파괴되었기에 우리는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내 숨결을 정면으로 맞은 천마는.


-살아있다고? 아직도?


놀랍게도 그 형체가 온전히 남았다.


하늘을 향해 쏘아내도 구름을 뚫고 대기권을 넘어 저기 우주까지 날아가는 숨결이 오직 단 한명을 지워내기 위해 쏘아졌다.


적어도 지구상에는 이를 맞고 버틸 이가 없다고 자신한 공격이었단 말이다.


-물질계의 모든 걸 태울 수 있는 공격이었는데... 어떻게?


“쿨럭!”


그때 장자가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검게 죽은 피가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려주었다.


─화르륵!


그때 장자가 상자에서 꺼낸 족자에 불이 붙었다.

내가 뿜어낸 것과 같은 푸른 불꽃이.


“단순히 힘의 여파로 영역이 깨진 것이 아니군. 영역을 희생하여 벗의 공격을 막은 것인가? 이 남자, 악운(惡運)이 강하다.”


그때 유피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해 설명해줬다.


장자는 자신의 영역을 희생하여 숨결을 막고 천마를 살린 것이다.

천마는 내가 뿜은 힘의 여파로 인해 현재 기절한 상태.

하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변명은 나중에 듣겠다. 처벌은... 따로 필요 없겠지. 영역을 잃었다는 것은 그대가 쌓아올린 술법 전체가 무너져 내렸음을 의미할 테니.”


장자는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천마를 택했다.


“하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엎드려 빌 건데 제발 제게서 무아마저 뺏어가지 말아주시어요.”


끝을 내려는 유피를 밀치고 장자는 죽은 듯 잠이 든 천마를 껴안은 채 눈물을 보였다.


“비켜라. 저 자를 지금 끝내지 않으면 분명 후환이 된다.”


하지만 유피는 냉정했다.


“그만 하자.”


장자를 떼어내고 끝을 보려는 유피는 결국 내가 말렸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여자의 눈물에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억제하는 성분이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그 필사적인 모습에 동정을 느낀 걸 수도 있으며, 어떻게든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는 장자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낀 걸 수도 있었다.


“벗이여, 이 자는 살려두면 후환이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괜찮겠나?”

“그때도... 우리는 셋일 테니까! 아니면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거야?”


이번에도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언제나 옳은, 이성적인 선택만을 하는 건 아버지만으로 족하다.


우린 이보다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가 강해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나의 도발에 유피는 가소롭다기보단 흥미롭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훗, 벗의 자비에 감사해라.”


막 목숨이 꺼질 위기를 넘긴 천마였지만 사실 그보다 위험한 상태에 몰린 것은 그가 아닌 장자였다.

술사의 영역은 그 술사의 근간이 되는 곳.

영역을 잃으면 술법을 잃는다.


‘신화시대부터 쌓아왔을 그것을 바치다니... 장자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장자는 그리 슬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듯 보였다.

말하지 않았는가.

그녀와 나는 닮은 꼴이라고.


마침내 제 것을 제 손에 쥔 그녀는 지금, 여기 있는 누구보다 행복해보였다.


‘죽더라도 자신의 손에서... 라는 거겠지?’


정신적으론 유감이 많아도 신체상으로는 미인이 틀림없는(장자가 가진 특성 중 하나는 그 이름부터가 자연 미인이다.) 장자의 무릎을 벤 채 천마는 곧 죽을 듯 숨을 헐떡댔다.


“무아야! 내 아가! 괜찮니? 제발 눈 좀 떠봐...”


승리는 언제나 달콤할 줄 알았는데 마치 죽어가는 자식을 보는 것처럼 그를 품에 안고 절규하는 장자의 모습을 보니 어째선지 입맛이 썼다.

스승이라는 존재가 우리를 버리고 다른 제자를 택해서가 아니다.


리버스의 원로가 무림의 수장을 선택해서가 아니다.

그저... 그녀를 부모와 다름없이 생각할 데미안과 청명이 생각나 짜증났다.


‘여러 의미로 죄 많은 여자네.’


물론 그 의미가 긍정적이진 않다.

남자를 울리면 나쁜 여자지만, 자식을 울렸을 때는 못된 여자가 되는 법이니.


‘예로부터 스승은 부모와 같다고 했다지. 하지만 정말 부모 같은 스승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오늘따라 유독 누나가 보고 싶다.

강적을 물리쳤다는 기쁨은 사라지고 씁쓸함만이 입안을 맴돌았다.


“크윽!”


천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렸다.


“무아야! 정신이 드니? 스승님이야. 스승님이 왔어요. 내 얼굴 좀 봐봐. 응?”

“스승님... 설마 이걸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긴, 한 차례 싸웠다고 모든 앙금이 다 풀리면 전쟁이 왜 있고 증오가 왜 생길까.


“미안해요... 내가 미안하여요.”

“제발! 그 미안하다는 소리 좀! 우욱- 쿠웨에엑!”

“무아야!”


천마가 다시 피를 토하자 장자가 기겁하고 달려든다.

몸이 좀 상하고 내상을 좀 입긴 했지만 목숨에는 지장 없어 보이는 천마와 영역의 무리한 사용과 도술을 성법으로 전환함으로서 술사의 근간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다시 이전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지 가늠도 되지 않는 장자.


누가 봐도 더 위험해 보이는 건 후자였으나 장자는 자신이 칼에 찔리는 것보다 천마가 종이에 베이는 것에 더 신경을 쏟는 그런 인물이었다.


한 차례 피를 토하고 숨 쉬는 것이 한결 편해졌는지 천마는 여태까지 담아둔 모든 원망을 쏟아냈다.

어미에게 제 섭섭함을 털어내는 자식처럼.

마치 주변의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왜... 저를 혼자 두셨습니까? 차라리 저도 무림 밖으로 데려가셨으면... 왜 치우를 미치도록 내버려두셨습니까? 왜 제 벗의 고독을... 제게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장자가 리버스에서 다음세대에게 행하는 교육이라는 것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조금이지만 알 것 같았다. 그 아집까지도...


장자도 답답했으리라.

한번 실패했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또 다시 자신의 제자가 미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두려웠으리라.

그러다 만난 나라는 존재에 감사했으리라.


‘유피, 저 아저씨 말하는 거 너랑 닮지 않았어?’


어느새 정신을 차린 미나가 유피에게 농담을 걸었다.


─퍽.


‘조용히 해라. 지금은 진지한 분위기이다.’


유피는 미나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손날로 내리치며 훈계했다.

이 순간에도 유피와 미나는 계속 티격댔다.


‘이 눅눅한 감자튀김 같은 게!’

‘뭐라? 내가 눅눅한 감자튀김이라면 그대는 곰팡이 핀 백설기이다!’


장자는 가만히 천마의 모든 원망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감정의 골이 너무 깊었다.

세월도 세월이지만 천마는 무림 세력의 수장이었고 장자는 그 경쟁조직 리버스의 원로.


때로는 상대방을 용서하고 싶더라도 용서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장자의 얼굴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달관이 담겨있었다.

아마 무림인들이 말했던 무림을 배신한 창녀.

그 역할을 마칠 생각인 것 같다.


바로 그 제자에게 죽어줌으로써...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술식을 포기했을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나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이것은 감히 3자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했다.


“스승님, 그럼 안녕히...”


천마가 칠흑 같은 강기가 이글거리는 손으로 장자의 목을 쥐었다.

그녀를, 스승을, 무림을 배신한 창녀를 죽임으로써 이 모든 비극을 비극으로써 끝내려했다.


하지만 유피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퍼억!


유피가 천마의 얼굴을 걷어찼다.

우리 중 장자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볼 수 있는 미나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그 유피가 나선 것이다.


우리 모두 갑작스러운 상황에 말리지도 못하고 입을 세모꼴로 한 채로 유피와 천마를 지켜봤다.


“큭, 쿨러헉!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이건 무림의... 아니, 우리 사이의 문제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천마는 스승과의 일에 타인이 끼어든 것이 분한지 화를 냈다.


“흥! 닥쳐라. 어리석은 것!”

“뭐, 뭐라? 감히 본좌에게!”


─탁!


유피가 주먹에 얻어맞아 쓰러진 천마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놀랍게도 그렇게 맞고도 멱살을 잡을 만큼의 옷이 남아있었다. 나중에 원단을 물어서 비슷한 옷을 하나 지어가야겠다.)


“분명 나는 너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감히 내가 끼어들 만한 일일지도 모르지. 허나,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저 자도 그대만큼 힘들어 했다는 것. 그리고 이 슬픔과 괴로움을 알아줄 사람은 이제 서로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후회할 선택을 하고 싶은 것이냐, 천무극!”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상대를 용서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차라리 누군가 등을 떠밀어주길 원할 때.

그런 유치하고도 구차한 변명,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할 순간이 찾아오기를 바랄 때가.


유피는 이 순간 누구보다 훌륭히 그 역할을 수행했다.

서로 배신으로 인한 원망과 애증밖에 남지 않았다하더라도 이 둘에게 남은 유일한 연결고리.


광마(狂魔) 치우.

장자는 자식 같던 제자를 잃었고 천마는 형제와 같은 친구를 잃었다.


아직 메워지지 않은 감정의 골이 깊었지만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으로 그 둘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흑, 흐윽!”


그의 싸늘한 얼굴이 울상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슬픔이 복받쳐 올라 참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아마 이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네, 네가 무엇을 아느냐! 네, 네가 감히!”


감정에 휩쓸려 그는 말을 똑바로 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아까 말했듯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후는 당사자끼리 해결해라.”


유피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섰고 남겨진 천마는...


“흐윽! 흐어어엉! 흐아아아아! 허어어어엉!”


모든 억압이 풀리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정말 아이처럼 울었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짊어진 것처럼 울었다.

마치 자신에게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울었다.


심장을 쥐어짜듯이 우는 그의 모습에 내 얼굴을 만져보니 나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신으로서의 나를 자각하면서 공감능력은 대부분 사라진 줄 알았는데...’


장자와 천마는 서로 부둥켜안고 치우라는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


그리고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청명과 데미안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귀엽게 고개를 갸웃댔다.


***


천마는 이후 장자와 한참을 더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떠났다.

그리고 우리는 장자와 미나를 부축하고 근처 도시로 가 머물 곳을 찾았다.

그도 그럴게 집이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자신의 물건에 애착이 심한 듯 보였던 장자였지만, 그녀는 오히려 후련해보였다.

더 이상 이곳에 올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우리는 리버스로 복귀해야했지만, 여러 사건들로 인해 그러기가 어려워졌따.

그렇게 우리는 며칠의 시간을 더 중국에서 머물러야했다.


그리고 2월 28일.

내 생일이 찾아왔다.


누나는 다음 생일은 꼭 함께 보내자는 약속을 지키고자 우리가 있는 중국으로 왔다.

대외적인 이유는 무림과의 협상을 위한 것이었다.


“오랜만이야!! 오구오구, 우리 코르~ 잘 지냈어요?”

“어린애 취급 하지 마. 나도 이제 다 컸거든?”

“친구들 앞이라서 부끄러운 거야~?”


나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볼을 비비는 누나의 모습에 유피는 마치 못 볼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아무래도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누나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지! 오늘 하루 동안 코르는 내 거야! 베이징에 쇼핑할 곳이 많다는데 놀러가자!”


유피는 데미안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함께하는 걸 거절했고 청명과 미나만이 우리를 뒤따랐다.


장자는 우리를 뒤따라오려다가 누나와 눈이 마주치고 어쩐지 기가 죽어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넌 오지 마. 넌 안 끼워줄 거야. 거기서 반성하고 있어.’라는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따돌림 당하는 아이라도 된 것처럼.


“근데 미나랑 유피는 생일이 언제지?”

“내가 3월이고 미나가 4월일 거다. 그러고 보니 벗이 제일 생일이 빠르군.”

“그럼 코르한테 존댓말을 해보는 건 어때?”

“그대나 먼저 내게 존대하는 게 어떤가? 가장 어린 미나여. 거기에 털은 자랐나?”

“왜? 직접 확인하고 싶어?!”


유피와 미나는 오늘도 바람 잘 날 없이 티격 댔다.


“이익! 고작 한 달 차이거든?”

“네가 내게 말을 놓고자 한다면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의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내게 말을 거는 수밖에 없다. 아마 그때의 내가 지금의 너와 동갑일 터이니. 물론 과거로 가는 것이 가능할 리 없으니 평생 존대해야겠군.”


그들은 나이와 생일 순서에 신경 쓰는 한국의 문화를 너무도 잘 이해한 듯 보였다.


“아참! 벗이여, 우리의 탄신일(말 그대로 신이 태어난 날이었기에 생일보다는 탄신일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은 고려하지 말도록. 다음세대의 신들은 보통 태어난 날을 챙기지 않는 편이니까. 이후, 만 단위의 세월을 살아갈진대 그쯤 되면 케이크에 꽂을 초를 찾는 것도 일일 것이다. 뭐, 그래도... 태어나주어 고맙다.”

“생일 축하해! 코르!”


유피는 그렇게 말하고 데미안을 데리고 떠났고 우리도 쇼핑을 하러 떠났다.

굳이 매년 연례행사처럼 지내온 일을 그 한 마디에 그만두기엔 우리 둘만의 생일파티는 너무 내 삶에 뿌리박힌 것이었다.


‘그래도 일 년 중 하루를 즐겁고 행복한 날로 고르는 것이 나쁜 건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이런 모습이 되기 전까지는.


생전 처음 하는 누나와의 쇼핑.

누나는 아주 재밌는(누나의 입장에서) 제안을 하나 했는데 그것은 사고 싶은 옷을 서로 바꿔 입는 것.


나는 경기를 일으키며 거부했지만, 누나에겐 내가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그럴듯한 명분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옷을 고를 때 자신 위에 옷을 걸쳐보거나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나온다.

하지만 객관적인 시선에서 이 옷이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확인하기란 요원하기만 하다.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는 다른 법이니까.


이건 마치 쌍둥이처럼 꼭 닮은 우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옷을 입은 남매의 모습이 마음에 들면 자신에게도 틀림없이 어울릴 것이기에 이를 구매하면 된다는 참신하다면 참신한 그런 방법.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여자가 바지를 입으면 편한 걸 좋아하는 것이 되지만 남자가 치마를 입으면 그대로 변태로 낙인찍힌다.


시계라면 몰라도 옷에는 큰 관심이 없는 나는 그렇게 하루 종일 옷 입히는 인형이 되어 갈아입힘 당했다.


처음에야 그런 내 모습을 재밌게 감상하던 미나와 청명이었지만 미나가 청명한테 뭣 좀 사주고 싶다며 어느새 우리 둘만 따로 다니게 됐다.


“많이 힘들어?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으며 쉴래?”

“맛은... 내가 고를 거야.”


뒤늦게 내 얼굴이 반쯤 죽어있는 걸 발견한 누나는 나를 아이스크림 가게로 이끌었고 나는 내 나름의 복수를 계획했다.


누나가 싫어하는 게 뭔지는 알고 있었으므로.

바로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


“에엑! 코르 너무해. 내가 민트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이런 걸 고르다니.”


하지만 누나의 말에 금방 마음이 약해져버렸다.


“그건 내가 먹을게. 다른 맛 먹어.”

“이미 맛이 조금씩 묻어버렸단 말이야.”


한탄할 노릇이다.

‘종교 지도자는 사실 무신론자’라는 모순도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리라.

어찌 보면 민트의 창시자라고도 볼 수 있는 누나가 민트를 싫어하다니.


이에 대해 설명하자면 다시 신화시대로 넘어가야한다.

봄의 여신 페르세포네는 분명 명왕 하데스의 아내이자 명계의 여왕이지만 하데스에게는 민테라는 불륜상대가 있었다.

자신을 납치하여 데려왔음에도 다른 상대가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난 페르세포네는 민테를 짓밟아 죽이고 밟으면 밟을수록 향이 나는 풀로 만들어버렸는데 이것이 바로 민트라고 한다.


‘흠... 싫어하는 대상을 가지고 만들었으니 싫어하는 게 맞나?’


사실 나도 그리 좋아하는 맛은 아니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딱히 찾아 먹지는 않는 맛.


“코르도 먹기 싫으면 그냥 안 먹는 게 어때?”

“난 내가 산 거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어! 이젠 어른이니까!”


하지만 민트는 이겨냈더라도 호기심에 고른 마라맛 아이스크림에 나는 무릎 꿇고 말았다.


‘어떻게... 아이스크림에서 짠맛이 날 수 있는 거지?’


동공이 잘게 떨린다.

마그네슘이 아무리 부족해도 이렇게 눈가에 경련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원래 달콤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던가?’


아이스크림 사이사이에 붉은 색의 고춧가루 같은 것이 박힌 것을 보았을 때는 당장이라도 던져버리고 싶었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대부분을 남겨야했던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오는 내게 누나는 무언가를 건넸다.


“코르가 시계에 관심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어서 한 번 찾아봤어. 조직에 있는 언니들 중에 시계 브랜드를 운영하는 분도 있기에 의뢰해봤지.”


상자의 가격만 해도 상당해 보이는 그것에 달린 로고는 그 매장조차 아무 곳에나 두지 않는다는 고급 브랜드의 것이었다.

그것도 시계 매장!


‘손목시계!’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다른 게 들어있었다.


“손목시계가 아니야...? 이건 손가락시계? 아니면 갓난아이용인가?”


사람의 손목에 끼기 위한 용도라면 충분히 손목시계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건 내가 끼기엔 너무 작았다.

기껏해야 검지손가락에나 들어갈까?


“시계반지래. 이쪽이 차고 벗기가 편할 것 같아서 찾아봤어. 짠! 커플링이다~”


그 말대로 누나 손가락에는 내게 선물해준 것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어져있었다.


“음... 마음에 안 들어? 바꿔올까?”


한동안 말이 없자 누나는 불안한지 내게 되물었고.


“천재적이야! 이 디자인!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지?!”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탁장시계 따위가 아니다.

벽장시계 따위가 아니다.

벽걸이 시계도 아니며 손목시계 또한 아니다.

기술의 발전은 본디 소형화.


‘이것이 기술을 끝인가...’


나는 천마와 맞붙었을 때 이상의 전율을 느꼈다.

화염조작의 궁극이 푸른 불꽃이라면 시계의 궁극은 시계반지인 것이다!


“휴우~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네. 코르는 뭘 준비했어? 아, 부담 주는 건 아니니까! 안 준비했어도 이 누나는 괜찮아!”


그제야 안심한 듯 말을 잇는 코레 누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누나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나는 이거.”


나는 나보다는 누나에게 이것이 더 필요할 것 같아 생일 선물이란 명목으로 아르케를 넘겼다.


“이건... 괜찮겠어? 이거 하나면 코르가 갖고 싶은 시계 모두 다 살 수 있는데?”


그렇게 얘기를 들으니 솔깃하긴 했지만 내가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상관없다.


“괜찮아. 어차피 처치곤란이었고.”


참고로 장자는 모든 싸움이 끝난 뒤 영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아르케를 몰래 슬쩍하려고 했었다.

역시 잃은 경지가 많이 아까웠던 모양이다.

연단술을 익힌 장자라면 그걸로 선단을 만들어 경지를 복구하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나는 잠시 그때를 회상해보았다.


“이 도둑!!”


그렇게 화를 내는 내게 장자는 의뭉을 떨었다.


“저는 도둑이 아니어요. 그저 떨어진 물건을 주었을 뿐이어요.”

“이 점유이탈물횡령범!”

“뭔가 더 엄청나졌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서도...”


결국 장자는 툴툴 대며 내게 아르케를 돌려줬다.

그래도 스승인데 하나쯤은 줄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면서.


“그래도 2개는 너무 많아. 1개만 받을게.”


선물을 받은 누나의 얼굴엔 어째서인지 기쁨보다는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마음에... 안 들어?”


풀이 죽은 채 올려다보는 나의 모습에 누나는 어째선지 얼굴을 붉히고 가슴께를 움켜잡았다.


“윽! 심장이...!”

“누나!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이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누나의 상태를 살폈다.


“벼, 별 거 아니야.”


누나의 얼굴은 어째선지 더욱 빨개져 있었다.


“그냥... 코르가 이걸 받았다는 건 관리자를 만났다는 건데 단지 걱정이 돼서... 별 일 아닐 거야.”


그리 말하며 눈물을 훔치는 누나.


상위존재의 관심.

누구나 바랄 것 같지만 때로는 그 자체로 부담이 되기도 한다.

나비나 잠자리 따위가 인간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 과연 기뻐할까?

표본이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 또한 그와 같다.

십자가에 못 박히듯 고정되어 잘 만들어진 표본이 될 수도 있고, 상자에 갇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주어지는 먹이만 먹으며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괜찮겠지. 엄마가 신녀인데 뭐 별 일 있겠어?”

“그래, 알았어... 엄마하고 아빠한텐 누나가 대신 괜찮을 거라고 전해줄게.”


대격변 이후 맞이하는 두 번째 생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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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13장. 나에게는 좋은 사람 6 +1 22.11.29 81 2 18쪽
220 13장. 나에게는 좋은 사람 5 22.11.28 54 3 19쪽
219 13장. 나에게는 좋은 사람 4 +1 22.11.27 58 4 16쪽
218 13장. 나에게는 좋은 사람 3 22.11.26 50 5 17쪽
217 13장. 나에게는 좋은 사람 2 22.11.25 53 3 14쪽
216 13장. 나에게는 좋은 사람 1 22.11.22 58 2 21쪽
215 12장. 스승의 은혜는(The teacher's favor) 5 22.11.21 79 2 16쪽
214 12장. 스승의 은혜는(The teacher's favor) 4 22.11.20 49 3 17쪽
213 12장. 스승의 은혜는(The teacher's favor) 3 22.11.19 51 2 18쪽
212 12장. 스승의 은혜는(The teacher's favor) 2 22.11.18 61 2 16쪽
211 12장. 스승의 은혜는(The teacher's favor) 1 22.11.15 61 2 18쪽
210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6 +2 22.11.14 55 4 18쪽
209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5 +1 22.11.13 62 3 13쪽
208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4 22.11.12 59 2 14쪽
207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3 22.11.11 74 3 16쪽
206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2 22.11.08 67 3 19쪽
205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1 22.11.07 62 2 19쪽
204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10 22.11.06 60 3 11쪽
203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9 +1 22.11.05 90 3 17쪽
202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8 22.11.04 67 2 9쪽
201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7 +2 22.11.01 93 3 12쪽
200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6 22.10.31 80 4 13쪽
199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5 22.10.30 74 2 15쪽
198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4 22.10.29 76 4 18쪽
197 11장. 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3 22.10.28 77 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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