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상관없어
나타난 건 나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정형되어 형태를 갖춘, 하나의 건축물이었다.
붉은 지붕과 갈색 벽.
모든 게 나무이긴 해도 튼튼해 보이는 외형의 커다란 건물이 땅 위에서 솟아오른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뀨이!”
건물이 다 나온 뒤, 라임이가 다시 한 차례 몸을 떨었다.
쿠구궁-!
그러자 그 건물 주변에 다시금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타난 건, 건물 외벽과 같은 색의 나무 울타리들이었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다.
약 130cm 정도의 높이.
김준식의 가슴팍까지 오는 정도의 울타리가 건물을 넓게 둘러싸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보면 누구든 예상할 수 있었다.
나타난 게 바로 축사라는 것을.
“뀨~!”
그걸 반증이라도 하려는 듯, 라임이가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그러자 울타리 안쪽으로 김준식에게 친숙한 녀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꼭꼬오-”
“꼬오~”
바로 쌍닭이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평소에 날카로웠던 인상과 달리, 조금 둥근 느낌이 들었다.
‘호오, 괜찮은데?’
김준식은 곧장 울타리를 넘었다.
원래라면 사람만 보면 달려드는 게 바로 쌍닭의 습성이었다.
“꼭꼬오-”
“꼬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김준식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녀석들은 천하 태평하게 바닥을 쪼며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 숨지도 않았다.
원래 동굴에 살던 녀석들은 따로 굴을 파서 그곳에 둥지를 튼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조차 없었다.
마치 이 넓은 공터가 지기 앞마당인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허, 진짜 공격성이 없어졌네?’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아무리 라임의 설명을 들었어도 게이트는 게이트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본다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생산형 게이트라니. 미쳤네.’
세상에 알려진 게이트는 두 종류였다.
사냥 형태인 레이드와 함정을 뚫는 메이즈, 세상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전부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하나가 더 있던 것이다.
바로 생산형 게이트였다.
몬스터의 공격성보다, 안에서 생산에 관련된 걸 중점으로 둔.
말하자면 농장화 된 게이트의 종류였다.
하지만 이런 게이트는 발견된 적이 없었다.
아니, 없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생산되는 몬스터는 공격성이 없어지니까.’
일반 전투와 함정 게이트가 야생이라면, 생산은 가축이었다.
전투나 함정에서 잡은 몬스터 역시 맛은 좋다.
그만큼 높은 금액으로 판매할 수 있는데, 생산 게이트에서 얻은 건 그걸 웃도는 것이다.
식자재만 보면 엄청난 이득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한다면 공격성도 없고 방어력도 없단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미 길들여진 몬스터.
그걸로 게이트를 방어할 방법은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걸 선택하는 녀석이 없었겠지.’
선택하는 순간 당한다.
방위는 물론, 무언가 조치할 방법도 없다.
그나마 있는 이득이라고는 식사할 때 맛있는 게 전부인 현실.
그러니 이걸 선택하는 게이트 종족이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난 다르지.’
정확히는, 라임이는 그런 걸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고? 애초에 라임이 자체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작은 슬라임이어도 녀석은 A급 이상의 힘을 가진 녀석이다.
그의 몸은 이미 수천 마리의 슬라임이 밀집된 형태다.
작은 모래가 모여 사막을 이루듯, 작은 슬라임이라도 모이면 모일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다.
그런 라임이 관리하는 게이트다.
그러니 굳이 다른 몬스터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었다.
홀로 군단을 상대하는, 말 그대로 먼치킨을 보여줄 수 있는 녀석이니까.
‘여차하면 나도 참여하거나 녀석들도 좀 부르지 뭐.’
거기에 김준식 자신도 있었다.
비록 요리사의 능력이지만, 어중간한 녀석들은 단번에 썰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급하면 민준호나 이서아를 불러도 된다.
녀석들이라면 아무리 바빠도 자신의 부탁은 들어줄 테니까.
그리고 언젠간 녀석들에게도 이 게이트의 진실을 말해줘야 했다.
‘물론 당장은 아니지만.’
이걸 알리면 여파가 커진다.
물론 사회적인 여파가 아니다.
새로운 게이트의 사실은 분명 놀랄 일이지만, 김준식이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재료를 또 다 뜯길 순 없지.’
영웅들은 가뜩이나 먹성이 가득한 녀석들이다.
그런 년놈들에게 이걸 알린다?
그땐 그대로 이 게이트 자체가 거덜 날 수도 있단 뜻이었다.
‘솔직히 저 둘만 있으면 다행이지. 쟤들한테 들켰다간 다른 놈들한테도 걸릴 게 분명하거든.’
가뜩이나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다.
언제든 서로 연락할 수 있으니 한 명에게 알리면 다른 녀석들에게도 알려진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당분간은 좀 편하게 있자.’
그러니 비밀로 해야 했다.
배에 거지가 들어앉은 열 명을 당장 먹이기엔 김준식 본인이 너무 귀찮았다.
적어도 녀석들을 먹이고도 재료 수급이 가능할 때까진 비밀로 하는 게 가장 좋았다.
‘그나저나 닭만 있는 것도 문젠데.’
김준식은 축사를 둘러봤다.
엄청난 넓이의 축사에는 오직 쌍닭만 덩그러니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허전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당장 생성할 수 있는 건 쌍닭이 전부였으니까.
이유는 바로 게이트의 등급이었다.
‘현재 게이트 등급은 E급이니까.’
라임이가 흡수한 쌍닭 게이트.
원래부터 E급이긴 했지만, 사실 처음엔 F급으로 강등된 상태였다.
이유는 바로 생산직 게이트였다.
게이트를 새로 바꾸려는 순간, 그 게이트는 초기화가 된다.
하지만 김준식과 라임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대로 유지한다는 선택도 있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E급 게이트를 그대로 두면 함정 형태의 게이트였으니까.
하지만 그들에겐 함정이란 건 귀찮은 일이었다.
거기에 나오는 몬스터라고 해봐야 쌍닭이 전부였고 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하나다.
다양한 식자재.
닭은 물론, 돼지, 소, 물고기 등.
요리에 필요한 갖가지 재료가 0순위였다.
그러니 과감히 초기화한 것이다.
생산형 게이트는 그 모든 걸 충족할 수 있으니까.
단지, 게이트를 처음부터 성장시켜야 한다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뭐, 그래도 방법 자체가 없는 건 아니지.’
게이트의 성장 방식은 흡수.
다른 게이트를 흡수해서 일정 점수를 얻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제약은 있었다.
바로 자신보다 낮은 등급의 게이트는 흡수할 수 없는 것이다.
F급이야 최하위니 상관없다.
하지만 E급은 F급 게이트를 흡수할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E급이나 F급이 D급이나 C급을 흡수할 수는 있었다.
그렇다고 높은 등급 게이트가 낮은 등급을 흡수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E급이 D급에게 전쟁을 걸고.
D급이 승리하면 E급은 자연히 D급에게 흡수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전쟁이다.
그런 전쟁에서 강대국은 약소국에게 전쟁만 걸 수 없을 뿐.
전쟁이 걸려 오면 그대로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준식은 세 개의 게이트를 흡수한 것이다.
비록, 거기 안에 있던 게이트 종족 녀석들은 공격성이 짙어 죽였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뭐 살아 있어도 도움이 될까 싶긴 했지.’
하나는 늑대 몬스터인 울프였고, 다른 두 개는 인간 형태의 고블린이었다.
고블린은 인간 형태라 좀 아쉽긴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울프보다 더 심한 공격성을 가지고 있으니 방법 자체가 없던 것이다.
김준식은 축사 탐색을 끝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야, 라임아. 지금 점수 몇 점 남았댔지?”
“뀨? 뀨이!”
“흐음, 2점이라······.”
D급 게이트 하나에 점수는 4점이다.
그걸 세 개 클리어했으니 총 12점을 얻은 상황.
하지만 F급에서 E급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총 5점이 필요했다.
그렇게 남은 것이 8점.
D급으로 승급하기 위해선 10점을 얻어야 하니 남은 건 2점이었다.
최소 E급 게이트 하나.
그것만 흡수하면 김준식이 원하는 아머드 피그와 화이트 카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좋아, 라임, 레몬. 이만 나가자.”
“뀨~!”
“뀨이-”
김준식은 둘을 데리고 다시 게이트 밖으로 나왔다.
물론, 관리를 위해 안쪽에 슬라임 몇 마리를 두는 건 잊지 않았다.
“뀨!”
“뀨이-”
“아, 걱정하지 마. 슬라임들이 다닐 수 있는 틈은 만들어 줄 테니까.”
게이트를 빠져나온 김준식은 곧장 능력을 사용했다.
그리고 열려 있던 벽을 다시 메꾸면서 작은 구멍 하나 역시 몰래 만들었다.
이제 식당과도 가까워졌으니 굳이 스스로 해결할 필요 없이 식당에서 해결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끄응, 그럼 이만 돌아갈까?”
시간을 보니 벌써 늦은 저녁이 된 상황.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지 놀라면서도 김준식은 두 슬라임을 데리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띠리리리-
식당 문을 걸어 잠그는 찰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얜 왜 또 전화한 거야?’
아까 전 통화했던, 민준호였다.
심지어 지금 걸린 게 끝이 아니었다.
전화 숫자를 보니 5번은 통화를 걸고 있던 상태였다.
“여보세요?”
-오, 드디어 연결됐네. 뭘 하는데 이렇게 전화를 안 받냐?
“잠깐 일 좀 보느라고. 근데 뭔 놈의 사내새끼가 다섯 번이나 통화를 걸어? 할 일 없냐? 바쁘다면서?”
무슨 스토커도 아니고 다섯 통이나 전화를 거는 걸까?
두 번 정도 걸고 안 받으면 문자나 남기고 포기할 줄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아하하! 바쁘지! 그래도 전할 게 있으니 건 거 아니겠냐?
“그래, 그래. 그래서 뭔데? 지금 나 많이 지쳤으니까 본론만 말해라.”
-음, 알았다. 뭐 나도 바쁘긴 하니까······ 일단 전화한 이유는 새 게이트 때문이다.
“새 게이트?”
-그래.
민준호의 말에 김준식은 내심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게이트라는 게 언제든 나올 순 있다지만, 반나절도 안 지난 상태다.
근데 그게 벌써 나오다니?
“그래서, 어떤 건데?”
-네가 아주 좋아할 만한 물건이지.
민준호는 김준식에게 찬찬히 새로운 게이트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을수록 김준식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호오, 그게 나오는 게이트라고?”
-그래, 근데 문제가 하나 있다.
“문제?”
-그래, 그 게이트가 나온 위치가 다른 길드가 담당하는 위치거든. 일단 나온 거 알려 달래서 알려주긴 했는데······ 괜찮겠냐?
“흐음, 뭐 문제가 될 게 있냐? 거기서도 블랙 카드는 쓸 수 있잖아?”
-흠, 협회 게이트만큼은 아니어도 일단 출입에 문제는 없지.
“그럼 됐어.”
길드 담당 지역? 상관없다.
그들은 애초에 보스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진짜 공략법은 그게 아니란 걸 김준식은 알고 있었다.
-그러냐? 아, 그리고 만약 그거 얻으면 나도 좀······.
“그래, 알았으니까 주소나 찍어서 보내. 당장 내일이라도 출발할 테니까.”
-약속 잊지 말고! 알았지?! 이번엔 어떻게든 시간 내서 그쪽으로 갈 테······!
뚝-
김준식은 곧장 전화를 끊었다.
저 말을 계속 받아주면 피곤한 건 자신뿐이었다.
같은 말만 수십 번을 반복할 녀석이니까.
띠링-
‘그래도 일 처리는 빠르네.’
어느새 들린 알람 소리에 김준식은 다시 폰을 확인했다.
거기엔 이번에 나온 게이트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라임아, 오랜만에 준비 좀 해야겠다. 레몬이 너도 어떻게 하는지 잘 배우고.”
“뀨~!”
“뀨이!”
힘차게 대답하는 두 슬라임을 어깨에 올린 채 김준식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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