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정석_48. 유비, 누워있던 용을 만나다(특별 채용)(下)

이렇게 빈손으로 신야에 돌아온 유비는 목이 빠지게 제갈량의 방문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었고, 유비는 몹시 화가 치밀었다. 비록 지금은 보잘것없는 신세지만, 유비는 한때 좌장군 벼슬을 받고 조조에게 영웅 소리를 듣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시골에 묻혀 사는 어린 선비가 유비를 무시하고 있으니, 유비는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이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는 관우와 장비도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형님, 아무래도 제갈량은 헛된 이름만 있는 녀석인 것 같습니다. 천하 영웅인 형님께서 직접 찾아가니, 자신의 얕은 재주가 들통날까 봐 만남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 그럴수도 있겠구나···”
잠시후 관우, 장비가 물러가자, 이번에는 서서가 유비를 찾아왔다.
“원직, 제갈량이 나를 너무나 무시하고 있소!”
유비가 불만이 가득 찬 얼굴로 말하자, 서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장군, 장군께서는 대업을 이루어 천하 백성들을 구제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천하를 위하는 분께서 한낱 체면과 자존심을 앞세우면, 과연 천하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 제환공께서는 이름없는 신하를 만나러 다섯 번이나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장군의 위명이 제환공보다 높다고 생각하십니까?!”
서서의 말을 들은 유비는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선생 말이 맞소.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공명선생을 만날 때까지 기쁜 마음으로 융중을 찾을 것이오!”
며칠 뒤, 유비는 관우, 장비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운과 함께 융중으로 향했다. 마침 집에 있던 제갈량은 유비의 방문에 무척이나 당황했는데, 이는 제갈량이 유비를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제갈량은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견주면서, 천하영웅을 모시고 대업을 이루려는 높은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 천하에 영웅이라 할 사람은 몇 명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조조가 장강 이북을 평정해 천하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지만, 제갈량은 조조와 악연이 있었다. 제갈량은 서주에 살던 시절 조조의 대학살을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에, 조조에게 강한 적개심이 있었다.
강동의 손권도 영웅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갈량은 맏형 제갈근을 통해 손권에 대해 많은 것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손권은 재주는 뛰어났지만, 천하를 제패하려는 야심이 부족한 전형적인 수성(守成)형 군주였다. 이는 과거 손책이 죽으며 손권에게 했던 말과도 일치했다.
유표 역시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는 형주를 지키는 데 급급할 뿐 천하에 대한 포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 밖에 익주의 유장, 서량의 마등, 한수가 있었지만 모두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유비는 반쪽 짜리 영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조가 유비를 원소보다 높이 평가했을 정도로, 유비는 분명 영웅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해 떠돌이 생활을 거듭했고, 지금은 빈손이나 다름 없는 처지였다. 북으로는 조조가 호시탐탐 유비를 노리고 있었고, 남으로는 유표가 유비를 경계하고 있었다.
제갈량은 유비를 섬길만한 군주라고 생각했지만, 유비가 대업을 이루기엔 너무 늦었다고 판단 하였다. 그래서 유비가 두 번째 융중을 방문했을 때, 일부러 그를 피했던 것이었다. 그러면 자존심이 상한 유비가 자신을 포기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유비가 또 다시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제갈량은 제갈균에게 거짓말을 시켰다.
“균아, 유공에게 내가 자고 있다고 말하렴.”
“···.알겠어, 그렇게 할게.”
제갈량은 끝까지 유비를 피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이 자고 있다는 말을 들은 유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깨우지 마십시오. 공명 선생이 잠에서 깰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유비는 방안에서 조운과 차를 마시며 제갈량이 일어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한 시진(時辰: 약2시간)쯤 지났을까, 방문이 열리면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남양의 시골사람이 게으르기 짝이 없어 귀한 손님을 기다리시게 했습니다. 소인 제갈량이라고 합니다.”
유비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8척 장신에 얼굴이 새하얀 청년이 의관(衣冠: 남자의 웃옷과 관. 정식으로 갖춰 입는 옷차림)을 정제(整齊: 격식에 맞게 옷을 갖춰 입음)하고 서 있었다. 유비는 조운을 밖에서 기다리게 한 후, 제갈량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 하였다.
“한나라 황실이 무너지고 간신들이 날뛰어 황제폐하께서 가시밭길을 걷고 계십니다. 저 유비는 스스로의 덕과 기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천하에 대의를 펼치고자 했으나, 지혜가 부족해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품은 대의만은 꺾이지 않았으니, 제가 앞으로 어찌 하면 좋을지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자 제갈량이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동탁이 거병한 후로 각지에서 호걸들이 주(州)와 군(郡)을 차지한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조조는 원소에 비해 명성이나 군사력이 부족했지만, 원소를 꺾고 최강자의 자리에 우뚝 섰습니다. 이는 조조가 천시(天時: 하늘의 도움이 있는 시기)를 활용했을 뿐 아니라 지혜를 잘 썼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조는 백만의 군사를 거느린 채 황제의 이름을 빌려 제후들을 호령하고 있으니, 조조와 맞서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손권은 강동을 차지한 지 3대가 되었는데, 지세는 험준하고 민심을 얻어 지혜로운 이들을 거느리니, 우호세력으로 삼을지언정 도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남은 곳은 형주와 익주입니다. 형주는 북으로 한수, 면수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남해까지 물길을 통한 이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동쪽으로는 오, 회계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파(巴), 촉(蜀)과 통하니 군대를 키울 수 있는 요충지입니다. 하지만 형주의 주인인 유표와 그 자식들의 능력이 부족하니, 이는 하늘이 장군께 내리는 땅입니다.
익주(益州)는 밖으로 지형이 험하고 안으로는 기름진 들판이 천리에 달하니, 하늘이 내린 부유한 땅입니다. 과거 한고조께서도 익주를 기반으로 삼아 제업을 이루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익주의 주인인 유장은 어리석고 나약해 장로에게 북쪽을 내주고 있고, 나라는 부유하지만 백성들을 보살필 줄 모르니, 익주의 지혜로운 선비들은 훌륭한 새 주인을 얻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황실의 후예로 천하에 신의를 보이셨으니, 익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충분 합니다. 장군께서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신 후 서쪽과 남쪽으로 융(戎), 이(夷), 월(越)족 등 이민족과 화친하고, 동쪽으로 손권과 동맹을 맺으시면 기반을 탄탄히 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 중원에 변고(變故: 뜻밖의 사고나 재앙)가 있기를 기다려 상장(上將)에게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완, 낙양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장군께서 직접 익주의 군사들을 이끌고 진천(秦川: 장안 일대. 진령산맥과 위수 사이)으로 진격하신다면, 백성들이 광주리에 술과 음식을 담아 장군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업을 이루고 한실을 부흥시킬 수 있습니다.”
“오오···”
이에 유비가 탄복하는데, 제갈량이 지도를 가져와 펼치며 추가로 설명을 해 주었다. “장군께서 대업을 이루시려면 북쪽은 천시를 확보한 조조에게 양보하시고, 남쪽은 지리의 이점을 가진 손권에게 내어주십시오. 그 대신 장군께서는 인화(人和: 사람들의 화합)를 얻으셔야 합니다.
먼저 형주를 손에 넣고 서천을 점령해서, 솥의 발처럼 천하를 셋으로 지탱하는 형세를 만드십시오. 그런 다음에야 중원을 노릴 수 있습니다.”
그러자 유비가 제갈량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명 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푸른 하늘이 보이는 듯 합니다. 이 유비가 비록 재주는 부족하지만, 선생께서 밖으로 나와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하지만 제갈량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천하를 셋으로 나누는 계책을 드린 것은 여러 차례 저의 집을 방문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일 뿐입니다.
저는 어리석고 천성이 게을러, 대업을 돕기에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저 같은 시골사람은 그저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사는 것이 맞으니, 장군께선 다른 훌륭한 인재를 찾으십시오.”
이에 유비가 눈물을 흘리며 넙죽 엎드린 채 입을 열었다.
“선생께서 저를 버리고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면, 천하의 백성들은 누가 구제해준단 말입니까?!”
그러자 제갈량이 황급히 유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장군께서 소인을 그리 높게 평가해주시니,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207년 건안12년 겨울, 유비는 융중을 세 번이나 방문한 끝에 제갈량이라는 뛰어난 지략가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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