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산은 내려가기 위해 오르는 것이다.
어느새 달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동그랗게 보일 것이다.
기울었던 달이 차듯, 찬 달이 기울기도 한다.
노인은 시간에 의해 능력을 잃은 이들이고,
아픈 사람은 병에 의해 능력을 잃은 이들이다.
그 외에도 능력을 잃고서 의기소침한 인간들은 참 많다.
다시 할 수 있도록. 그 능력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란다.
능력이란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원래 못하던 것이 아니라 하던 것을 하지 못하는 기분.
줬다 뺏는 것이란 말이다.
주어진 것의 소중함을 알던 길이는 이곳에서 진짜 등산이란 걸 해보고 싶었다.
산.
땅보다 높은 곳.
단순히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좋아했던 길이.
오를 수 있다는 능력이 좋았던 것도 같다.
이제 어디든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주어졌으니 다른 재미를 찾아야 한다.
길이는 흉화에게 말했다.
"형아. 저 여기 있는 산들을 알고 싶어요.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산을 타고 싶어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에도 올라보고 싶고요.
거기서 가장 유명한 산들을 다 올라보고도 싶어요.
소소한 동네 산들도 좋아요.
거기서 맞는 햇살과 바람.
구름과 비, 눈도.
그저 함께라면 조금 힘들더라도 다 좋아요.
높을 수록 좋아요.
더 오래 함께 내려올 수 있어서."
변신해서 육성으로 말까지 해서 설득력은 굉장했다.
길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들어줄 수 밖에 없는 부탁이었다.
"그래, 우리 등산가가 되자.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는 기도 더 잘 쌓일 거야.
사부님께 명산 소개도 받고 등산 계획도 짜서.
산행 하면서 공부하면 좋지 뭐.
여기서 할 수 있는 수련은 등산하면서도 가능한 거야."
흉화 모르게 선장에게 자신의 퇴직을 알리고 온 사부님은 아침 식사를 기다리시는 중이었다.
아침 공부와 수련을 시작한 지도 어느새 나흘 째.
길이의 바람은 그렇게 찾아왔다.
식사 거리 챙겨오면서 소밀 씨에게 상담 받아보면 좋겠지?
'복이야 너는 길이 의견이 어떻니?
산 타는 거 좋겠어?
복이는 뭐 하고 싶어?'
옆에서 묵묵히 듣던 복이가 역시 변신을 하더니 육성으로 말을 건넨다.
"형. 나는 친구가 사귀고 싶어.
세상에는 우리 같은 영혼 친구들이 분명 있겠지?
그런 친구들 만나러 돌아다니고 싶어.
산 가면 산에서도 찾고,
다른 데서 있으면 다른 데도 찾아갔으면 좋겠어.
형, 오빠 말고도 친구 사귀고 싶어!
더 이야기 많이 나누고 싶어!"
"친구를 사귀어도 같이 다니는 건 힘들지도 모르는 데 괜찮아?"
"그런 거 상관 없어. 그냥 사귀고 싶어!"
그냥에 담긴 여러 의미가 흉화의 마음을 흐트러트린다.
'"알았어. 이야기 나누어 보자. 둘 다 할 수 있을 거야."
이것도 사부님을 비롯해 상담을 요한다.
길이와 복이가 하고 싶은 게 분명히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뭐 어차피 혼돈 결 따라 온 행선지이다,
흉화는 아이들 하고 싶은 거 같이 하면 족하다 여겼다.
아직 스스로의 욕망과 마주하지 못한 그였다.
아, 내공 부자로서 맘껏 내공 쓰고 싶은 맘은 안 그였다.
고양이로 돌아와 길이가 말한다.
'밥 가지러 가면서 들어요 형.'
'그래 움직이자.'
'예전에 그러니까 여기로 오기 전에 비닐 막 뜯어먹은 거 기억하세요?'
'하, 밥은 안 먹으면서 비닐 씹던 거?
기억 나지.
어이가 없기도 했고 하지 말란 거 하는 거에도 웃겼고.
그렇게 엄마 젖이 그리웠을까 가슴 아프기도 했고.'
'몸이 막 그걸 원했으니까 한 거긴 하죠.
거기서 그리움이나 배고픔 같은 건 여기 와서 해결된 거 같아요.
그런데 하지 말란 거! 금기를 어기는 느낌은 못 느꼈어요.
그 금기 어기기를 하고 싶어요!'
'금기(禁忌). 터부(taboo). 흐음.'
여기 오기 전 금지된 모든 것을 풀어주고 자유롭게 행동했던 기억이 남아서 저런 걸 원하는 것 같다.
길이나 복이가 자유로운 건 상관 없다.
무림에서의 금기는 무얼까.
고인이 된 사부나 사문 욕 보이지 않기?
흡성대법 따위의 흡기술 익히지 않기?
채양보음, 채음보양 같은 거?
피로 하는 무공, 시체로 하는 무공?
뭐 여러 범죄 행위는 치워두자.
군이나 관과 엮이지 않는 것도 있다.
오지랖 부리지 않는 게 불문율이긴 하지.
'그래 길이야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이자.
나쁜 짓만 안 하면 되겠지.'
'또 또 어머니들을 돕고 싶어요. 어미 고양이, 어미 개 등등 모든 어머니요.'
'응?'
거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에 대한 복지를 하자는 이야기인가?
종을 불문하고?
'그러니까 어떤 도움? 구체적으로.'
'밥도 주고 약도 주고. 일하게도 해주고. 보호가 필요하면 보호도 해주고.'
'어. 다른 의미의 모국(母國)이라도 만들어야 할 이야기인 거 같은데.
일단 이게 굉장히 많은 손이 필요한 일인 건 알지?'
'네. 주변을 도와주는 것도 쉽지 않아요.'
할 수 있는 건 한다.
할 수 있으니까 한다.
해야 하니까 한다?
'우리의 17년을 여기에 전부 쏟아 부어도 될 지 모르겠지만.
길이가 원한다면 열심히 고민해볼게.
당장 하자고 하기엔 부족한 게 있거든. 제일 부족한 건 사람.
우리 셋. 사부님이 도와주신다면 넷.
이들로는 당장 시작도 쉽지 않을 거야.
그래도 그 뜻은 밝히는 게 좋을 거 같네.
우리 길이 대단해.'
주변에 도울 수 있는 것부터 돕자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흉화가 그리는 건 나라를 세우는 거대한 건국 이야기였다.
내려가기 위해 오르는 것처럼.
나눠주기 위해 오르는 것.
그것이 기회든 재화든 무엇이든.
그 무언가를 나눠주기 위해 올라야 할 것 같다.
얼마나 지속될 지 모르고, 성좌님이 어떻게 볼 지도 모르겠으나.
길이가 하고 싶다고 하니, 나도 덩달아 하고 싶어졌다.
원래 그렇게 모든 일이 시작되곤 하지 않을까?
다른 이의 꿈이 내 꿈이 되는 일.
원래 꿈이란 건, 좋은 꿈이란 건 널리 퍼지는 거니까.
힘든 어머니들이 없는 세상?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
사실 모두가 행복한 세상 같은 이야기 같고.
현대에서도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지만.
눈 앞에 있는 것들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할 수 있다면 족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와중에 벌이는 파괴와 혼란에 성좌님이 분명 만족하리라 여긴다.
[낫과 망치의 건국자 : 여성 동지들을 위한 나라!
힘을 보탤만 한 것 같군.
기다려 보게. 다른 동지들을 모아보지.]
[아톰 아빠 : 뭔가 멋진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 같군요. 건국 서사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요. 부디 희극이 되길 기대할게요.
선계약이 될 지 또 배후성님과 상의 해야겠네.]
[가장 위대한 정복자 : 과정에서 피는 얼마나 흘리게 할 거에요?
물론 제가 원하는 건 피가 아니라 정복 그 자체!
나라를 세우는 데 정복이 빠질 수 있을까요?
어떤 것들을 정복할 지 기대하고 있을게요.]
[나일 캣맘 : 고양이를 비롯해 모든 어머니들의 나라.
모성의 여신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확실히 공동 과제로 가야겠어요!]
[나라 잃은 이들의 잊힌 창업자 : 소외 받는 이들을 모아 나라 만드는 데는 저도 관심 있습니다.
이 혼란한 시국을 정리해주기 바랍니다.
도울 이들의 범주를 넓히길 바랍니다.]
여러 성좌들의 성원에 온갖 상념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과제가 주어지고 수락하면 후퇴도 못한다.
하지만 행보에 의의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깊은 고민 가운데 소밀과 마주했다.
"소밀님 식사는 조금 있다가 준비해주시고 상담 좀 가능할까요?"
"네, 물론입니다."
주방에 손짓을 한 소밀이 방으로 흉화를 안내했다.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시죠. 어떤 일이신가요?"
어떤 순서로 이야기를 꺼낼 지 고민하다 그냥 순서대로 꺼내기로 했다.
"산, 유령, 건국 관심 있으십니까?"
"네?"
"아차차. 너무 한꺼번에 말했군요. 하나씩 이야기 나누죠. 산에 대해 좀 아시는지요."
"큼. 질문이 좀 포괄적이신데 구체적으로 해주시겠어요?"
"등산을 좀 거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려 하거든요.
중원 명산들에 대한 정보.
이 장주, 나아가 복건에서 오를만한 산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정리한 책자가 있을까요?"
"흠, 산에 대한 지리지 같은 게 필요하신 건가요?
어디에 어떤 산이 있다는 개괄적인 지리지가 있기는 합니다.
챙겨드리죠.
또 이 복건은 대부분이 산지와 구릉입니다.
북쪽에 무이 삼령[武夷 杉嶺]이 있고 거기 무이산(武夷山)이 유명하네요.
구화산(九華山)이 서쪽에 있기도 하구요.
당장 떠나실 만한 곳은 구화산이고,
후에 북쪽에 무이산이 좋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등산은 좋아하시나요?"
"일 하느라 바빠서 산행은 못 해 본 것 같군요."
"모실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귀신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누고자 하는데요.
귀신을 다루는 영매나 영매사에 대한 정보가 좀 있는지요?"
"흠 서안의 모산파가 가장 유명랍니다.
퇴마를 목적으로라면 도가나 불가의 문파들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지요."
"사실 퇴마의 목적보다는 귀신이 어디에 있고, 어떤 곳에서 출몰하는 지 알려는 거라서 말이죠."
"제가 아는 바대로 말씀드리면 구천에 떠도는 혼은 대부분 원이나 한 때문에 남는 것이기에 좋은 경우가 드뭅니다.
그래서 참혹한 일이 일어났던 흉가같은 곳에 나타난다 하지요."
"답변 감사드립니다. 아까 건국 이야기를 드렸는데요,
서로에 대해 좀 더 알게 되면 그 때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하지요.
나중에 사부님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준비 된 아침을 들고 거처로 돌아가는 길.
흉화는 길이와 복이에게 조금 급하게 움직인 거 같다고 자백했다.
급할 수록 돌아가야 하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관계를 급하게 자꾸 맺다 보니 실수를 할 뻔 했다.
"식사가 좀 늦었구나."
"사부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희 산에 좀 가죠.
그리고 유령 좀 아십니까?
나라 세우는 데 함께 하실래요?"
흉화는 사부에게 거침없는 3연타를 날렸다.
소밀에게는 느껴졌던 거리감을 없애고 전력으로.
방금 한 다짐과 상반된 행동을 맘껏 저질러버렸다.
황당해 하는 사부를 뒤로 하고. 밥상을 피러 가는 흉화였다.
길이와 복이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엉덩이를 씰룩이며 뒤따를 뿐.
- 작가의말
버킷 리스트 짜다 급발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전개할 지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쓰다 보면 정해지겠죠.
길이도 계속 저 상태니 30편까지 달리기만 하겠습니다.
휴.
7월 4일 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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