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혼돈공 파헤치기
흔적은 많은 것을 말한다.
당장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떠나간 자리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던가.
우리는 어제의 흔적, 그 더께의 집합일 다름이 아닐까.
'길아 무지개별 관리자님을 만났던 건 확실하지?
그분에 대해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기억나는 대로 말해봐.'
'내가 부탁 드리러 무지개별에 갔을 때 한 번 본 게 전부야.
그분은 계속 우리 가족을 지켜본 거 같았어.
그리고 키 크고 마른 것만 기억나. 얼굴은 기억이 안 나.'
딱히 도움 될 정보는 없었다.
얼굴을 기억할 수 없게 인식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점 정도를 알았다.
중출일을 잘 쓸 수 있는 것도 혼돈공의 영향인 걸까?
'길이야 그러면 수명 같은 거 막 설명해줬던 건 어떻게 한 거야?'
'얼굴 보고 설명을 들은 게 아니고 머리 속에 기억이 따로 있어서 들으면 떠올랐어.'
최근 기억이나 감정 공유도 해 본 입장에서 이런 게 가능하면 강제 기억 전이도 충분히 가능하실 것 같다.
'어찌되었든 정신적으로 엄청난 힘을 지니신 건 분명하네!
모든 초월자가 이런 게 되리라곤 여겨지지 않거든?
길이야 그러면 아까 기억에서 본 대로 부탁을 들어주신다고 한 다음 여기서 15년 간 기다리다 내가 온 게 끝 맞지?'
'응! 흐흐. 계속 반가워 형아!'
'길이 복이가 함께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내가 더 반가워!'
정서 그루밍을 마치고 각자 성흔을 살펴보기로 했다.
'길이 복이 각자 성흔을 물고 뜯고 맛보는 거야.
우리가 경험한 것 이외에도 어떻게 쓰이고 쓸 수 있는지 찾아보는 거다?
아마 같은 분께 받은 능력이니까 알면 알수록 뭔가 더 나오는 게 있을 거야!'
'네!'
'응!'
흉화가 가진 성흔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아는 것이 힘'이란 문구다.
오랜만에 깊이 침잠해 스스로를 살피기로 했다.
'찰(察).'
===
>상태창 - 찰(察)
이름 : 대형(大兄)
별호 : 흉화(凶禍)
나이 : 15
남은 수명 : 17년 * 양도, 강탈 가능
배후성(背後星) : 무지개별 관리자
전용 특성 : 이세계 환생자(준 신화)
전용 무공 :
[상태창 - 관(觀)* 2성(成)],
[상태창 - 찰(察)* 1성(成)],
[별다른 반려* 3성(成)]
성흔 :
[혼돈공(混沌功)*]
- 혼돈의 결 2성(成)
- 중출일 4성(成)
종합 능력치 :
[체력 1.01성*(星)],
[근력 1.01성*(星)],
[민첩 1.01성*(星)],
[내공 1성(星)]
===
별호가 스스로도 붙는 거였나?
아니면 토루에 이름이 퍼져서 가진 명성 덕일지도 모르겠다.
수명.
양도와 강탈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대상이 있다는 것.
길이 복이에게도 수명이 떴었던 걸 기억하면 우리끼리 양도도 가능하다는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끼리 교환할 일은 없을 테다.
그러니 뺏거나 받아올 대상이 생겼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기능이 추가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관으로 살펴봤던 것들의 목록이 뜬다.
기록을 따로 열람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편리다.
관에서 외부의 기록들이 정리 되었다.
찰에서는 내부의 기록들이 남아있다.
지난 찰에서의 기록이 날짜와 함께 남아 있다.
나중에 떠올리기 편한 기능 같다.
기억은 나도 할 수 있으니 이 기능으로 능동적인 정리나 분석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반려 기능에서는 이번에 기억을 공유하면서 단순히 의사 소통을 넘어선 연결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기능을 스스로 늘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이점인 것 같다.
길이 복이와 좀 더 다양한 교류를 시도해 보아야지.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하루 만에 신체 능력치들이 무려 0.1이나 올랐다.
아마 운동 처음한 헬린이들의 초반 득근과 같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헬린이도 되어 보지 못한 몸이었기에 여기에선 외공을 좀 배워보고 싶다.
금광불괴 외치며 맞아 보는 건 나의 작은 로망이었기에.
근데 금광불괴와 관련된 능력치는 체력도 내공도 아닐 거 같은데?
살펴본 상태창은 그랬다.
본격적으로 혼돈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 본다.
명상을 시작했다.
어제 대 씨 문지기가 한 말이 떠오른다.
'다 자기 복'이란 말.
길흉화복을 운명이라 여기며 그저 수용하기만 하는 이 시대 사람들.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우리가 길흉화복이다.
우리가 당신네들의 운명이다.
운명은 곧 혼돈이다.
방향은 알 수 없으며 오직 움직임만 있을 뿐.
작용과 반작용이 법칙으로 작동하듯,
당신과 우리는 원인에 따른 결과를 내리라.
그리고 마땅히 받아야 할 것, 응보를 받게 하리니.
혼돈의 주인께서 우리에게 임하라 명하셨다.
'형아!'
'형! 형! 형! 형!'
둘이 날 불러 정신을 차렸다.
생각이 갑자기 널뛰더니 강림이라도 된 양 떠들었다.
기억이 온전하게 있는데, 부끄러워도 다행이라 여겨진다.
마지막에 임한다는 혼돈의 주인이 중요할 거 같다.
'혼돈의 주인'이라는 거창한 이명을 지닌 존재가 몇이나 될까.
혼돈과 관련된 인물이나 신도 몇 없을 것 같은데.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존재는 크툴루쪽의 존재들?
누가 내린 것 만큼이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힘을 좀 더 살펴보자.
혼돈의 결과 중출일이 하위 항목으로 들어가 있다.
혼돈공을 통해 이 힘을 다룰 수 있다는 이야기 같다.
우연히 주운 고대심법과 다른 존재의 성흔.
같은 범주로 묶기엔 좀 넓은 것 같지만. 혼돈공은 해냈다.
정말 알 수만 있다면 뭐든 익힐 수 있는 걸까?
익힐 수 있는 정도의 앎을 알 수 있을까?
일단 혼돈의 결 같은 경우는 거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던 반려 특성 덕에 무엇인지 감을 확실히 잡았다.
예외의 경우라고 봐야 할 거 같고 중출일은 평소의 난이도를 모르겠다.
어려운 무공이었는지 처음 배운 무공이라 비교할 대상이 없다.
고양이도 이리저리 몸짓을 하면 펼칠 수 있는 쉬운 무공이라 여기기도 했는데.
내공을 느끼게 거의 바로 느낀 셈이니 내 오성이 뛰어나게 다시 태어난 게 아니라면 혼돈공의 힘이다.
아는 것을 넘어서 의지에도 힘을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의지에 힘을 준다는 것에서 길이의 말이 떠올랐다.
혼란스런 마음을 인지 못했다는 사실.
괜찮지 않은 상태를 괜찮다고 여겼던 점까지.
혼돈공은 '혼란'의 상태를 정상으로 여기게끔 하는 게 아닐까?
혼란이 패시브 상태인지라 다시 혼란에 걸려들지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 겪는 혼돈은 그저 다양한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을 뿐.
일반적이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혼돈의 왕이 보우하시는 건가.
당장 통제할 수단이 여의치 않고 문제가 발생하는 게 아니라면 알고 넘어가는 수밖에.
혼돈공, 확실히 단순한 무공 따위가 아님은 분명하다.
혼돈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
정말 혼돈에 대한 공부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럼 공부가 무엇인지 그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 건가?
혼돈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정의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정의 내리기 그만하고 지금처럼 궁리하고 살피고 쓰면 될 것이다.
이것 저것 익히기 좋게 하는 능력이고, 혼란에 빠지지 않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뭐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소리.
공부하는 걸 나름 좋아했던 모범생 출신 흉화.
토루에서 익혀나갈 무언가를 찾아서 떠나리라 결심했다.
길이 복이에게 부탁하는 탐색이 아닌 제 눈으로 살피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어느새 떠들썩해진 광장.
'길이 복이 성흔 가지고 잘 놀았어?'
'응! 나 이제 결 찾기 되게 잘해.'
복이의 호언장담에 맘에 한결 여유가 깃든다.
'형아. 결 빛나게 하는 방법을 알 것 같아요.
결 찾기 할 때 심장에 힘을 주면 내공이 빠져나가면서 결이 반짝여요!'
내공 활용법을 알아오다니, 참으로 기특하다.
똑소리 길이와 자신감 복이가 함께라면 걱정이 없다.
그런데 길이 복이도 그렇고 나도 단전이라 말하는 부분이 아니라 심장 어림에 기가 들락날락거린다.
하단전이 아니라 중단전에 모으고 있는 걸까?
아니면 여기에서는 내공 쌓는 개념이 또 다른 걸까?
배운 게 없으니 운기조식도 모르겠다.
그냥 기가 잘 들락날락거리도록 연습이나 좀 해 두는 걸로 해야지.
바깥의 기운을 몸으로 돌려 그 기운이 몸에 남게 하는 게 내공을 쌓는 방법이었던 걸로 무협지들은 말했는데, 함부로 그런 걸 해보기가 겁이 난다.
주화입마가 그리 무섭다는 데 우리 셋 중 하나라도 잘못되면 손 쓸 방도가 없다.
아까 깨달은 혼란 면역 비슷한 것도, 주화입마에 적용이 되는지 모르고 말이다.
상시입마 상태가 아닐까 하는데?
예비 행선지 장주(漳州)에서 구할 싸구려 무공비급도 참고만 할 뿐 함부로 익히지는 못할 것 같다.
그리고 보니 돈 문제도 있군.
식량 자문과 토루 주선 비용으로 받을 화폐가 있을까?
마제은 같은 걸 잘라서 쓰는 시대인가?
원나라 때 교초라는 지폐를 잘못 썼다 망했다는 기억은 있다.
야명주가 제대로 작동했더라면 어떻게 잘 들고 가서 팔 수 있지 않았을까?
공부 거리 챙기면서 돈 될 거리도 좀 찾아봐야겠다.
'길이 복이 수고했어.
형이랑 같이 어떻게 하면 밥 많이 구하는지랑 토루 터 찾으러 다니는 거 구경 갈래?
따로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형아랑 같이 다니면서 뭐라도 배울래.'
'형 주변에서 뛰어놀래!'
성격 확실한 두 아이들.
흉화는 길이와 복이의 성장을 기대하며 움직였다.
***
[비밀교단의 명존 : 힘을 원하지 않는가?]
"평화를 원해요."
[비밀교단의 명존 : 알지 못했던 비밀, 앎, 지혜를 원하지 않는가?]
"당장 당신을 알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 걸요?"
[비밀교단의 명존 : 자네는 가까운 때에 무당에서 쫓겨날 운명에 기다린다네.]
"달게 기다리죠. 아니면 그때 와 주시겠어요?"
[비밀교단의 명존 : 다시 찾았을 때는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건가?]
"문전박대는 안 하겠습니다."
[비밀교단의 명존 : 끄응. 명교는 들어본 적 없나?]
"아 관심 없대두요. 안 사요 안 사."
[비밀교단의 명존 : 부디 주변을 살피고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게!]
잠에서 깬 젊은이는 개꿈을 꿨다며 방을 나서 찬물에 세수를 했다.
꿈에서 영업에 실패한 성좌는 그 취급에 떨면서도 다음을 기약했다.
- 작가의말
쉽지 않네요.
견디기도 쓰기도.
7월 5일 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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