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산의 주인 53화 (2부 1화)
안녕. 제 이름은 슈나입니다.
나이는 고작 열여섯이지만, 이래 봬도 열두 동생들의 든든한 맏이입니다. 자식이 열셋이라니 부모님 금실이 아주 좋은 모양이라고요? 하하. 사실 저와 제 동생들은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에요. 길거리 고아들을 지금의 아버지께서 모두 거두어 주신 거지요. 그래도 저희는 친형제나 다름없을 정도로 사이가 좋습니다.
“슈나! 어디 가?”
“헤이리! 좋은 아침~. 나는 빨래하러 가.”
저기 뛰어오는 소녀는 셋째 헤이리입니다. 동생 중 저를 가장 잘 도와주어 항상 고맙고 든든해요.
“아이참! 슈나, 집안일 혼자 하지 말라 했잖아! 내가 동생들을 불러올게, 같이해. 그런데 혹시 반 봤어? 아침부터 안 보이던데?”
“응? 난 못 봤는데. 반은 책을 좋아하니까 작은집에 있는 게 아닐까?”
작은집은 술통 나무 위에 지어진 오두막집인데, 저희 형제들의 비밀 공간입니다.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해 손수 지어주신 거라 위치는 비밀이 아니지만···. 아무튼, 어른은 출입 금지예요! 저희들은 혼자 있고 싶거나 조용히 쉬고 싶을 때, 장난감이나 책을 들고 작은집에 오릅니다. 모두가 작은집을 좋아하지만, 특히 책을 좋아하는 둘째 반이 기장 애용하고 있어요. 하루종일 그곳에 콕 박혀 나오지 않는 일도 허다합니다.
“와, 또? 내가 오전만큼은 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하고 올라가라 했는데 말 진짜 안 들어! 반부터 잡아 와야겠어. 슈나, 꼭 기다려!”
“응~. 헤이리, 힘내.”
저야 반의 집중하는 모습을 좋아하지만, 헤이리의 생각은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두 팔을 걷어붙이며 작은집을 향해 비장하게 뛰어가는 헤이리를 차마 말리지 못하고 뒤에서 작게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어차피 반은 고집이 세서 헤이리가 뭐라 한들 소용없을 게 뻔합니다. 헤이리가 어서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할 텐데요.
“읏차! 오늘도 빨래가 많네?”
“슈나.”
헤이리를 보내고 나서 커다란 빨래통을 낑낑거리며 드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분명 바라멜이에요.
“역시! 바라멜~. 잘 잤어?”
“으···. 숨 막혀, 슈나.”
“저런! 미안해. 너무 귀여워서 그만.”
“뭐래···.”
우리 보물. 바라멜은 열세 명 중 막내입니다. 바라멜은 제 동생이지만 정말 예쁘게 생겼어요. 갈색으로 익는 밀밭처럼 풍성한 머리카락과 속눈썹, 사과처럼 붉게 익은 볼, 동글동글한 팔과 다리. 누구라도 이 아이를 보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저희는 바라멜을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아이가 워낙 수줍음이 많기 때문에 티 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자제하고 있습니다.
“왜 형제들이랑 같이 안 놀고?”
“슈나가 혼자 있으니까···. 도와줄게.”
“허어어어-. 너무 귀여워!”
“아잇, 진짜!”
“슈나, 나도 도와줄게.”
“같이 하자.”
“너희들···!”
역시 제 동생들이 최고입니다. 정령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제 동생들이지 않을까요? 제게 이렇게 예쁜 동생들이 생기다니 꿈만 같아요. 그때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는 아직도 그 지옥 같던 남작가에서 학대당하며 살고 있었겠지요.
촤악-!
“으악!”
“슈나 딴생각 한 대요!”
“그렇다고 물을 뿌리다니··· 이리 와!”
“꺄악!”
으으···. 축축해. 동생들과 한바탕 빨래를 가장한 물놀이를 하고 났더니 홀딱 젖어버렸습니다.
동생들의 장난 때문에 잠시 끊겼지만, 아무튼. 저는 이곳에 오기 전 까진 헬버튼 남작가에서 시종으로 일했습니다. 원래라면 저 같은 고아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자리지만, 황제 폐하께서 취약계층 의무 고용 제도를 실시하면서 저에게도 기회가 왔어요. 많은 지원자를 제치고 합격했을 때는 제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머지않아 그 반대였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요.
매일 심한 폭언과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저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사람 중 하나인 집사는 우스갯소리로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해서 저를 뽑았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저는 남작가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당장 먹고사는 게 어려워질 테니까요.
“얘들아. 아버지는 어디 계셔?”
“연구실!”
“그래? 고마워! 나는 이만 가볼게.”
“피이. 슈나는 우리랑 안 놀아주고 맨날 아버지한테 가더라.”
“어쩔 수 없잖아. 슈나의 꿈은 수도의 관리가 되는 것인걸. 그러려면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
‘미안···!’
동생들이 저에게 서운해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는 꼭 관리가 되고 싶은걸요. 대신에 이따 동생들이 잠들기 전 동화책을 읽어줘야겠습니다.
아, 제가 헬버튼 남작가에서 고생한 것까지 얘기했나요? 저를 그곳에서 꺼내준 사람이 바로 저희 아버지십니다.
그 당시 헬버튼 남작가에서는 애지중지 키웠던 도련님이 가출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남작은 남작 부인에게, 남작 부인은 집사에게, 집사는 시종들에게, 시종들은 가장 어렸던 저에게 화풀이를 해서 매를 맞게 되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당장 죽을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던 것 같아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망치고 있었으니까요.
쫓아오던 남작가의 하인들을 피해 달리던 저는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아버지와 부딪혔습니다.
[얘야, 많이 다쳐 보이는데 괜찮니?]
뻗어오는 가느다란 손과 숙여진 허리를 따라 폭포수처럼 굽이쳐 흐르던 물빛 머리카락. 저는 아버지를 처음 만난 순간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물빛 머리카락은 물의 수호자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냐구요? 맞아요. 저희 아버지께서 바로 물의 수호자 누만이세요.
“무려 12시간입니다.”
“오, 진짜 비약적으로 늘었는걸? 역시나 배합의 문제였던 건가.”
“그러게요. 진작 성분에 집중하기보단 배합을 신경 써 볼 걸 그랬습니다. 당신이 맞았어요.”
“띄워 줄 필요 없어. 어차피 나는 뒤에서 입만 떠들었을 뿐이니. 결국엔 네가 한 거야.”
끼이익-.
“아버지?”
“오, 슈나 왔니?”
“네. ···물님도 안녕.”
저는 아버지 옆에 있는 푸른 사람에게도 조심스럽게 인사해 주었습니다. 물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수호하는 4대 힘 중 하나, 물 그 자체입니다. 물님은 사람들 앞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래도 저희 형제들에게는 가끔 이렇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말을 걸어줍니다.
물님은 아름답고 신기하며, 어딘가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안녕, 슈나.”
음···. 하하···. 얼굴이 화끈거리네요. 이상하게 물님의 앞에만 서면 심장이 간질거려요. 다른 사람들 대하듯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고 싶은데 잘되지 않습니다. 저는 물님의 시선을 피해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오늘도 연구 중이세요?”
“응. 이것 보렴. 이번에 발명한 방법으로 혈액을 12시간 동안 보관하는 방법을 찾아냈단다.”
“와! 정말 대단해요.”
“그렇지? 12시간으로는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구나.”
저희 아버지께서는 요즘 혈액을 장기간 보관하는 연구에 빠져 계십니다. 과다출혈로 목숨이 위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목표래요.
아버지는 힐 제국에 처음으로 고아원을 세운 장본인입니다. 고아들을 모아 보살펴 주고 있던 아버지께서 물의 수호자가 된 이후로 힐 제국에 저 같은 아이들을 위해 많은 시설이 생겼다고 해요. 아버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젠 의술까지 공부하고 계십니다.
세상에는 차가운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 우리 아버지. 저는 저희 아버지를 세상에서 제일 존경해요.
“어···. 저는 이만 서재로 들어가 볼게요.”
“그래. 오늘도 힘내렴.”
“아버지도요.”
살짝 닫히는 문틈으로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물님이 보여 후다닥 고개를 숙였습니다.
“슈나는 참 순수한 아이야.”
“맞습니다. 처음에 슈나를 만났을 때 지나치게 사람을 피하는 모습에 걱정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바르고 착한 아이로 잘 커 주었습니다.”
“모두 네 덕분이지.”
“아닙니다. 제가 슈나에게 해준 것보다 슈나와 아이들이 제게 해준 것이 더 많을 겁니다.”
“너는 정말이지···. 그거 알아?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다.”
“하하.”
“누만. 나는 슈나를-”
문을 닫아도 저절로 들리는 소리였지만, 대화를 엿듣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저는 방 안 더 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서 저를 걱정하고 계셨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사람을 지나치게 피하는 아이. 옛날의 제가 분명 그러했기 때문에 부끄러워졌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당시 제가 만나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를 아프게 했는걸요. 지금은 그저 때가 아니었을 뿐이었다는 걸 알아요.
‘저야말로 아버지께 받은 것이 너무 많은걸요.’
따뜻한 집과 자상한 아버지, 사이좋은 형제들. 제 세상은 동화 속 그 어떤 이야기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더욱 빨리 관리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께서 제게 알려주셨듯, 저 또한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그들도 동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노라고 알려주고 싶습니다.
···세상에! 집중하다가 그만 형제들과의 약속 시간을 놓쳐버렸어요. 저는 미리 골라놨던 동화책을 챙겨 서둘러 서재를 나섰습니다.
“슈나!”
“빨리 와!”
“미안. 얘들아. 많이 기다렸지? 어라? 오늘은 반도 있네?”
“끌려왔어.”
이불 위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무표정으로 말하는 반을 보고 모두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잘했어. 자자! 다들 누워봐. 이야기가 시작될 테니까.”
“선생님~ 제목이 뭐예요?”
“어디 보자-. 제목은 금빛새와 은빛새란다.”
옛날 옛날, 아주 옛날에 검은새들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평화로웠던 이 마을에 금빛새가 태어났습니다. 모두가 아름다운 금빛새를 찬양하고 좋아했습니다.
얼마 뒤, 이번에는 은빛새가 태어났습니다. 특별했던 두 새는 금방 친구가 되었습니다.
“얘, 금빛새보다 은빛새가 더 아름답지 않니?”
“맞아. 그리고 금빛새는 으스대는 꼴이 재수 없어.”
금빛새는 우연히 친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느새 은빛새를 질투하게 된 금빛새는 생각했습니다.
‘은빛새의 날개가 더 예쁜 것 같아.’
금빛새는 자신의 날개를 떼어 버리고 대신 은빛새의 날개를 뜯어 자신의 몸통에 붙였습니다.
“으악! 저게 뭐야.”
“징그러워.”
은빛 날개만 달면 완벽해질 줄 알았던 금빛새의 생각과는 달리 친구들은 금빛새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금빛새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 저 하늘로 훨훨 날아가 버렸답니다.
-끝-
“···뭐야 이거 열린 결말이야?”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뒤 페이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김이 빠져버린 크리스는 동화책을 옆에 내려놓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쿵쿵!
“저-. 수호자님? 제발 한 번만 문을 열어주십시오. 이번엔 절대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한 시간? 삼십 분! 삼십 분이면 됩니다. 수호자님?”
문 뒤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크리스는 대답 대신 기지개를 켰다. 크세르트의 부하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을 얼려놓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소리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틀어막은 크리스가 중얼거렸다.
“아오 귀찮아.”
-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2부로 찾아뵙습니다.
2부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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