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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팀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산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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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팀
작품등록일 :
2022.05.11 22:48
최근연재일 :
2022.08.2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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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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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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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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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얼음산의 주인 52화

DUMMY

문이 없어졌다.


본래라면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옆에 있을 터였다. 항상 그랬으니까. 문은 몸도 좋지 않으면서 자렌이 조금이라도 아플라치면 아무리 주변에서 뜯어말려도 그녀의 곁을 지키고 떠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텅 빈 옆자리를 보게 되었을 때 심장부터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청소하던 하녀, 경비를 서고 있던 보초병, 야채가 가득 든 수레를 끌고 가던 하인∙∙∙ 그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붙잡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뒤로 전혀 보지 못했네요.”


“어∙∙∙. 제가 여길 지키는 동안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글쎄요? 저는 잘∙∙∙.”


자렌은 황궁 입구까지 나가고 나서야 겨우 문을 봤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문 님이라면 어젯밤 잠시 갈 곳이 있다며 성 밖을 나가셨습니다. 그땐 옆에 황궁의가 있어 그냥 다친 사람들을 도우러 가나 보다 했는데 지금 보니∙∙∙.”


병사가 말을 하다 말고 머뭇거려서 자렌이 그를 재촉해야 했다.


“어∙∙∙ 그러니까, 그때 문 님과 함께 왔던 일행 중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여인이 마법사 에일린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에일린은 그녀가 죽였다.


“황궁 안을 정리했던 병사들에게 에일린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대신, 상처를 치료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붕대나 약 같은 것이 피 웅덩이 옆에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고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일단은 문 님이 마법사와 한패일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 중입∙∙∙ 자렌님!”





크리스와 하인이 텅 빈 침대를 발견한 그 시각.


다시 정신이 들자마자 병사에게 뛰어간 자렌은 그에게서 ‘찾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만 듣고 왔던 길을 터덜터덜 되돌아갔다.


급하게 짐을 챙기느라 엉망이 된 오빠의 방도 다 확인하고 온 뒤였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문은 그녀를 떠났다.


‘어라, 여긴 어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풀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도무지 길을 찾을 의욕이 들지 않아 그냥 정처 없이 걸었다.


걷고 있되 걷는 것 같지 않으며 보고 있되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정말 이 세상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딱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왜 이리 다 사라진 것 같지∙∙∙.’


사각사각.


두 다리에 풀이 쓸리는 소리만이 그녀의 정신을 이 땅에 잡아두는 것 같아서 자렌은 열심히 걸었다. 그러기를 오래,


“자렌!”


누군가가 그녀를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대답할 마음이 들지 않아서 멍하니 계속 딴청을 피우게 되었다.


“여기 있었구나. 없어져서 놀랐네.”


크리스는 반응이 없는 자렌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가갔다. 자렌이 왜 풀 죽어 있는지는 그녀가 걸어간 방향을 알려준 병사에게 대강 들어 알고 있었다.


‘이럴 땐 어떻게 말해야 하지.’


크리스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그렇게 그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자렌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크리스, 업어줘.”


“그래.”


깔쌈하게 대답한 크리스는 바로 쭈그려 앉아 등을 내밀었다. 가만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의 등 뒤로 작은 몸이 풀썩 얹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라 그런데 나 일어날 수 있을까?’


잠시 아차 싶었으나, 그의 우려와는 다르게 자렌이 워낙 가벼워서 휘청임 하나 없이 무사히 일어날 수 있었다.


‘휴∙∙∙. 다행이다.’


오늘따라 하늘엔 별이 가득 차 있었다. 소리의 공백을 메꿔야 했던 크리스는 학교에서 잠깐이나마 배운 것들을 떠올리며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와, 별 진짜 많다. 내가 살던 곳은 불빛이 너무 많아서 별이 거의 안 보였는데 여기는 진짜 잘 보이네. 그거 알아? 별은 멈춰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회전하고 있어. 게다가 우리가 서 있는 방향에 따라 별의 회전 방향도 달라지지∙∙∙. 잠깐, 근데 이거 여기도 그런가∙∙∙?”


크리스가 세계관을 고민하는 사이, 자렌은 크리스가 수다쟁이인 것에 안도하며 팔뚝을 꾹 깨물었다. 뭔가 이 사람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았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 말고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 그 씩씩했던 모습으로만 남아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렌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크리스는 그녀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사람의 감정을 알고 싶을 때 심장 박동에 집중해 보라고 알려준 것은 자렌이었으므로. 그의 등 뒤에서 상처받은 심장이 아프게 울고 있었다.


“별의 밝기는 사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거리에 따라 밝아 보일 수도, 어두워 보일 수도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별의 밝기를 겉보기 등급과 절대 등급으로 나누었지.”


크리스는 등 뒤의 사람에게 들리지도 않을 말을 하고 또 했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자렌이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안녕, 크리스.”


“안녕, 자렌.”


“∙∙∙.”


자렌이 뭔가를 더 말할 듯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모습이 어딘가 불편해 보여 크리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 아직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봐.”


“아하.”


크리스는 그냥 수긍하기로 했다. 가끔 사람들은 모른척해 주기를 바랄 때가 있는데, 지금 자렌의 태도가 딱 그랬다. 역시나 그가 관심을 끊은 척 다른 곳을 보고 있자 자렌이 눈에 띄게 안도하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큽∙∙∙.”


이번엔 자렌이 물었다.


“왜 그래? 너야말로 어디 아파?”


“아니. 공기 마시다 사례 들어서.”


“?”


크리스는 자렌이 그를 이상하게 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실실거리며 웃었다.


크리스는 이만 벨라블을 떠나 힐로 돌아가기 위해, 자렌은 무너진 수도를 복구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비네리온을 대신하여 사절단을 배웅하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자렌은 내심 서운했다.


‘얘기도 조금밖에 못 나눴는데∙∙∙.’


아쉽지만 힐 제국도 반란 뒷수습이 끝나지 않아 바쁘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여기!”


멀리서 유리가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동생을 발견한 크리스의 발걸음도 자연스레 빨라졌다. 케인, 유리, 그리고 루제르트는 그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뭐,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보고 있어?”


별생각 없었던 크리스는 자렌의 말투에서 당황을 읽고 나서야 나머지 사람들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제르트가 음울하게 말했다.


“둘이 같이 오네?”


크리스는 루제르트가 그런 아저씨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오다가 만난 건데.”


케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실실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렌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씨이. 대체 뭐야? 사람 기분 나쁘게 말이야.’


자렌은 수상쩍은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케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케인. 오기 전에 보고서는 받았어. 정리 잘 되어 있더라.”


“내 부관의 솜씨가 훌륭하긴 하지.”


케인의 입꼬리가 씰룩거리자 자렌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끊었다.


“알았어. 케인의 부관님 얘기는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아.”


민망함은 유리의 몫이었다. 그녀는 차마 상관을 때리지 못하고 조그맣게 볼멘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어디 가서 제발 그러지 좀 말아주십시오.”


그렇게 모두와 한차례 시끌벅적한 인사를 나눈 자렌은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씩씩하게 말했다.


“자, 이제 돌아가는 거지?”


케인이 대답했다.


“그렇지. 볼일은 끝난 것 같으니. 딱히 여기서 도울 수 있는 것도 없고 말이야.”


“응∙∙∙. 조금 아쉽네.”


“아마 금방 보게 될 거다.”


자렌은 케인이 아니라 크리스∙∙∙와 금방 헤어지게 되어 아쉽다는 뜻이었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또 놀려댈 것이 뻔하니 굳이 정정하지 않고 놔두었다.


몇 번의 회의 끝에 벨라블의 황제와 사절단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아직 벨라블과 힐 둘 다 마법사에게 대항해 뭔가를 하기에는 여력이 없다는 것. 당분간은 서로 회복에 전념할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게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어차피 마법사도 이번 일이 실패해서 타격이 클 거다. 그들도 당분간 몸을 사릴 거라 봐도 무방할 거야. 문제는 뮤아레트인데∙∙∙.”


벨라블에서 항상 제공받던 불의 수호자의 피마저 끊기고 힐 제국과 휘셀도 마법사의 위험성을 알게 된 지금 상황에서 마법사가 노릴 수 있는 건 뮤아레트의 사람들 밖에 없을 거라는 게 케인의 생각이었다.


“쩝∙∙∙. 접근은 계속 시도할 테지만∙∙∙.”


아직은 뾰족한 수가 없었다. 국력을 회복하는 동안 손놓지 않고 계속해서 방법을 찾아볼 예정이었다.


“뮤아레트에 이미 흙의 마법사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루제르트의 가정에 모두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우린 이미 흙의 마법사를 봤으니까.”


케인은 무시무시한 여자, 로테를 떠올렸다.


“자렌, 조심해. 그 여자는 정말 강해. 수호자인 나조차도 순수한 힘으로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어.”


케인의 경고에 자렌이 눈을 크게 떴다.


“뭐? 말도 안 돼!”


“유감이지만 사실이야. 대체 로테는 왜 이렇게 강한 거지? 불의 마법사는 그녀의 상대도 되지 않을 것 같던데. 속성이 이런 곳에서도 차이를 보이는 건가?”


크리스가 말했다.


“케인의 말대로 인간에게 우호적인 속성이 따로 있거나 그냥 개인 차일 수도 있죠.”


“으음∙∙∙.”


케인은 심각해졌다.


“만약 앞으로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마법사들이 다 그런 강자들이라면 많이 힘들어질 것 같아. 황궁의를 잡았다면 이것저것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쉽군.”


제국군은 끝내 문 일행을 찾지 못했다. 애초에 그들이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추적을 시작했을 땐 너무 늦어 있었다.


“자네밖에 없다! 최강의 수호자 크리스 힐!”


“켁. 멋대로 사람에게 기대하지 마, 케인. 누구 멋대로 최강이야?”


“넌 이럴 때만 나한테 반말하더라? 하나만 해, 하나만!”


자렌은 케인을 피해 도망가는 크리스를 보며 남몰래 웃었다.


‘크리스 힐. 수호자 아니라고 그렇게 잡아떼더니 결국 인정한 모양이네.’


“자, 자.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가.”


자렌은 갈 생각이 전혀 없는 건지 계속 떠들기만 하는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동시에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 재빨리 크리스를 끌어당겨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크리스, 고마웠어.”


자렌의 말을 듣고 그가 웃었다.


‘어∙∙∙.’


자렌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처음 보는 크리스의 환한 미소가 그녀의 눈동자에 크게 박혔다.


“잘 지내, 자렌.”


그렇게 크리스는 벨라블을 떠났다.


“음∙∙∙.”


열심히 걷고 있던 크리스는 문득 자신의 긴 앞머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앞머리나 길러볼까?”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1부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스토리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저는 잠시 휴재를 한 뒤 7월 14일 목요일에 2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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