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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팀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산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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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팀
작품등록일 :
2022.05.11 22:48
최근연재일 :
2022.08.2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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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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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얼음산의 주인 48화

DUMMY

“게 아무도 없느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무도 없느냔 말이다!”


그 뒤로도 몇 번을 소리쳐 보았지만, 이 드넓은 황궁에 들리는 소리라곤 오로지, 타닥타닥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뿐이었다. 그의 꺼져가는 목소리 또한 저 뜨거운 소리에 금방 잡아먹혔다.


황태자는 화염에 잠긴 복도 한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이 나라는 끝이야.”


그 밖에 남지 않았다. 그가 평생 의지해 온 선황 폐하도 돌아가시고, 불의 수호자 자렌은 그를 살리기 위해 희생했다. 하지만∙∙∙. 이 목숨 하나 붙어있다 한들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복도에 난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도 온통 불, 불, 불이었다.


이건 끝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끼이이익-.


불길한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타다 남은 조명등이 떨어져 내렸다. 황태자도 그걸 보았으나, 그에게는 피할 의지가 없었다. 그는 멍하니 서서 생각했다.


‘아. 이 나라는 불로 시작해서 불로 끝나는구나∙∙∙.’


그러나 황태자가 예상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복도의 한쪽 면을 깨부수고 튀어나온 형체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를 빗겨나간 잔해들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황태자는 더듬거리며 눈앞에 보이는 조그마한 등의 주인을 불렀다.


“자∙∙∙ 렌?”


머리카락의 절반이 다 타버렸을지언정 그 색만큼은 뚜렷하여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자렌! 너 살아 있었어?”


그가 도망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본 자렌은 에일린이라는 마법사를 상대로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 죽은 줄 알았다. 반가움과 안도에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그러나 뒤돌은 자렌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는 더 이상 안도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오늘 마주한 수많은 끔찍한 것 중 가장 끔찍해 보였다.


“살아있는 거∙∙∙ 맞아?”


황태자는 자렌처럼 보이는 것이 다가오자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것은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 방금 뭐 하려고 했나? 죽으려고?”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지만, 저 건방진 말투는 분명 그가 아는 자렌이 맞았다.


제 발에 찔려 눈을 또르르 굴리는 황태자를 보고 자렌은 화가 치밀어 소리쳤다.


“제정신이야? 지금 제국이 위험에 빠졌는데 황태자라는 놈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고 해? 그럼 남은 백성들은? 가족들이 걱정되어도 집에 가지 못하고 네놈을 지키려 황궁에 남아있는 병사들은? 지금 이러는 동안에도 죽어가는 소중한 목숨은!”


분노에 찬 자렌의 외침은 채찍과도 같아서 시끄러운 소리를 뚫고 정확히 황태자를 후려쳤다. 그러나 그에게도 할 말이라면 있었다.


“대체, 대체 나에게 뭘 하라는 거냐! 내가 너처럼 수호자의 힘을 쓸 수 있기를 해, 황위를 물려받았어?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단 말이다∙∙∙. 나보고 어쩌라고!”


끝내 황태자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것도, 그럼에도 저항 하나 못하고 도망쳐야만 하는 것도, 자렌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 것도 전부 서러웠다.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자렌은 서럽게 우는 황태자를 보다 고개를 내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황태자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두 사람의 몸이 함께 주저앉았다.


무릎 꿇은 자렌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네가∙∙∙ 황제야.”


“∙∙∙!”


손에 잡힌 사람이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는 것이 느껴졌다. 자렌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선황이 죽은 순간부터 너는 이미 황위를 물려받은 거야. 미안하다. 빨리 알아차려 줘. 네가 해줘야 해. 나 혼자서는 이 나라를 지킬 수 없어∙∙∙.”


황태자는 눈을 깜빡였다. 혼자서 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니, 그녀답지 않은 말이었다. 자렌은 이 제국에서 무적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솔직히 재수 없어서 싫어했다. 오늘, 황태자는 눈물 한 방울 없이 전신으로 우는 이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꼈다.


‘너도 무력감을 느끼는가? 나처럼?’


자렌에게 잡힌 부분이 뜨거웠다. 열기가 어깨를 타고 내려와 그의 심장마저 괴롭혔다.


‘그럼에도∙∙∙ 타오르려는가? 반 쪼가리만 남은 그 몸으로? 고작 마법사 하나 상대하고 그 모양이 되었으면서? 어차피 못하는 거 포기하면 되잖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렇게 황제는 그의 제국 벨라블을 깨닫는다.


‘아, 이래서 불인가.’


자렌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황제는 떠오르는 두 눈동자가 태양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비네리온 벨라블, 할 수 있냐.”


“∙∙∙너도 같은 꼬맹이인 주제에, 황족을 무시하지 마라!”


“고마워, 황제.”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허세를 알아차리고 비웃는다거나, 뭔가 지시 같은 것도 없었다. 자렌은 그저 그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황궁을 휘감고 있던 불꽃들도 그녀를 따라 전부 나가고, 혼자 남은 비네리온은 몸을 일으켰다. 긴장한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진행을 방해하는 바람에 그는 벽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 두 다리가 가속도를 받아 점차 빨라지고, 그는 긴 복도를 걸으며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뭘 할 수 있을까∙∙∙ 뭘 해야 할까∙∙∙!”


태양을 마주한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깨달으면서도 찬란함에 눈이 멀어 결국 그 뒤를 쫓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황궁을 뛰쳐나온 자렌은 매서운 기세로 달려갔다. 그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 자렌은 그 한 사람을 마주쳐 가던 길을 멈추었다.


“자렌.”


“문.”


자렌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묵묵히 기다렸다.


문은 여동생의 몰골을 보고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자렌∙∙∙!”


그는 엉금엉금 기어 자렌에게 다가갔다. 자렌이 급하게 그를 마중 나가려 했다가,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보았다가, 그래도 결국에는 오빠의 손을 잡았다.


문은 말했다.


“자렌! 그만하자. 어서 나와 함께 여기서 도망치자! 여긴 마법사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니∙∙∙”


‘문, 황제가 죽은 걸 알고 있구나.’


“가자∙∙∙. 제발∙∙∙!”


자렌은 애원하는 그녀의 오빠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문. 기억나? 우리 한참 가난해서 하루하루 겨우 먹고살았을 때 주변에 아무리 도와달라 애원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 그때 오빠가 그랬어. 우리는 저러지 말자고, 강자는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 나중에 힘이 세지면 우리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자고.”


자렌은 말하면서 말재주가 좋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어 놓을걸.’


“오빠가 가르쳐준 거잖아. 응? 그러니 그냥∙∙∙ 자랑스러워해주면 안 될까.”


“이상이었어.”


“응?”


문은 그의 순진한 여동생을 움켜쥐었다. 둘 중 한 팔에는 뼈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 느껴지는 섬뜩한 촉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꿈이 아니구나! 내가 잘 못 본 것이 아니야!’


문은 절규했다.


“이상이라고! 모든 이상에는 함정이 있다는 걸 알잖아! 네 몸을 봐!”


에일린과 싸울 때 검은 불에 닿은 부분이 녹아내렸다. 살덩이 틈새로 흰 뼈마디가 보이는 것이 그녀가 보기에도 끔찍했다.


“너는 강하지 않아! 그러니 그만둬. 마법사들 많잖아, 그 망할 불의 힘이 탐난다는 놈 많잖아! 줘버리라고 그냥!”


자렌은 침착하게 붙들린 팔을 빼냈다.


왼쪽.


“오빠, 오빠가 또 그랬지. 싸우는 사람은 무언가를 지키려 하기 때문에 강한 사람인 거라고. 왜 이래~ 나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야.”


오른쪽.


문은 손에 쥔 것이 하나씩 빠져나갈 때마다 절망했다.


‘아아∙∙∙. 이 아이를 말릴 수가 없어∙∙∙.’


자렌은 그에게 무언가를 더 말하고 그의 손을 완전히 떠나 버렸다. 문은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이 망할 놈의 입!”


문은 눈에 보이는 날카로운 돌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었다.


문은 렸을 때 잘난척하고 싶은 마음에 책에서 본 멋진 문구를 여동생에게 떠든 것을 후회했다. 몸이 약해 줄곧 무시당했던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은 자렌 뿐이라 그 애 앞에서는 더 신이 나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설마 자렌이 그 말들을 다 기억할 줄은 몰랐다. 아니, 기억은 해도 진짜 지키려 할 줄은 몰랐다.


그는 자신의 입을 짓뭉개 버리려고 돌을 들었다가, 차마 스스로를 내리치지 못하고 떨어뜨렸다. 돌은 애꿎은 그의 손만 긁고 지나갔다.


“아, 아아아, 아아아악!”





[수도에서 가까운 어느 도시]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잠자리에 든 사람들은 늦은 밤 발생한 화재에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뒤늦게 발견된 화재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점점 번져 도시 전체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비명과 구조 요청이 마을을 가득 메웠다.


“도와주세요!”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


“물을 가져와!”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바삐 뛰어다니고, 어린아이와 노인은 멀리 떨어져 걱정 가득한 눈으로 화재가 어서 진압되기를 바랐다.


“더는 물이 없어요!”


“큰일이다! 이를 어떻게 하지?”


벨라블은 원래도 물이 풍부한 국가가 아니었지만, 물의 수호자가 사라지고 나서 정도가 더 심해졌다. 도시에서 저장해놓은 물을 다 썼건만, 이 거대한 화재를 제압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람들은 점차 희망을 잃고 잿더미로 변해가는 삶의 터전을 황망하게 지켜보았다. 시간은 밤이었으나, 타오르는 불빛이 어두울 틈을 주지 않아 잔인한 광경이 고스란히 그들의 눈에 담겼다.


“도와주세요!”


그때, 어디선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 어머니가 쓰러져 계세요! 도와주세요!”


멍하니 있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어떻게 하죠? 안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요!”


“더 이상 물도 없는데∙∙∙! 젠장!”


도시 청년들이 이판사판으로 연장을 들고 소리가 들리는 앞에 모여들었으나, 집이 온통 불꽃으로 뒤덮인 뒤였다.


“이러면∙∙∙ 문을 부술 수도 없어!”


이 상태에서 무작정 그런 짓을 했다간 집이 통째로 무너져버릴 것이다.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지붕이 우지끈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안돼!”


안에 든 모자가 꼼짝없이 죽겠다고 생각한 순간, 무리를 헤치고 한 사람이 등장했다. 그는 맨 앞을 가로막은 청년을 밀치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들은 남자에게 닿은 불꽃이 저절로 꺼지는 것을 보고 놀라 눈을 부릅떴다. 집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지만 모두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이윽고 남자가 잔해 속에서 멀쩡히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대단해!”


“아이도 무사해요!”


남자의 양 팔에 안긴 아낙네도 정신을 잃었을 뿐 특별한 이상이 없어 보이는 데다, 옆에는 소년이 건강하게 뛰고 있었다.


사람들은 도시의 영웅을 둘러싸고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는 씩 웃었다. 그는 세상에서 그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을 가장 좋아했으므로.


“나는 마법사 플레임이다.”


작가의말

와, 오늘 비가 장난 아니네요. 모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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