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영어 대 십자수
미래펀딩 로보츠는 여러모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협회에서 입장 발표 없이 침묵하자 야구계 늙은 고인물과 기업들이 실력행사를 했다.
미래펀딩을 비난하는 기사가 쏟아졌으며.
“너도 사표야?”
사람을 빼갔다.
사람이 없으면 구단은 해체되겠지.
“죄송합니다. 여기 있으면 평생 야구계에 못 있어서.”
“에휴. 타코도 가고, 투코도 가고, 이제 2군 감독까지 사표라니.”
“감독님도 탈출하시죠. 여기 있으면 평생 왕따 당합니다.”
“내가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 나까지 떠나면 어린 선수들이 불쌍하잖나. 쯧. 800억 부울 정도면 뭔가 의지가 있나본데 바뀌길 바래야지. 찍혀서 죄 없이 퇴출당한 양반들 모아봐야지.”
“크윽. 죄송합니다.”
야구계 선배들의 협박에 못이긴 코치들과 직원들이 하나둘 사표를 쓰고 도망쳤다.
그와 함께 선수들에 대한 접촉도 이어졌다.
거기 있으면 야구판에 끼지 못한다. 감독 코치는 안 할거냐?
우리랑 계약하자.
미래는 다른 구단과 계약해도 그냥 보내주기로 했다.
귀가 얇거나 은퇴 후 코치, 감독까지 생각하는 선수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미래 구단에서는 연차 무시하고 실력에 따른 계약을 제시했고, 연봉이 마음에 들지 않은 선수들은 다른 구단과 계약을 맺었다.
미래펀딩에선 진짜 자유롭게 풀어줬고, 이탈이 계속 이어졌다.
대신 유망주에 대한 계약 몇 건 성공했다.
[2년차 유망주 류원상 5년 25억 계약]
[1군 경험 없는 이지운 4년 14억 계약]
FA고 서비스타임이고 나발이고 전부 무시한 선수 가치에 따른 계약.
다른 구단으로 가면 이렇게 받지 못한다.
심지어 해외에서 적절한 이적료의 오퍼가 오면 몰래 이적료를 받고 자유롭게 풀어주기로 했다.
년차 상관없이.
어린 유망주들이 좋은 조건에 계약하며 하나 둘 남는 선수가 생겨났다.
그리고 미래펀딩 로보츠에선 어떤 선수가 어떤 조건에 계약했고, 어떤 선수가 어느 구단으로 갔으며, 그 때 미래에서 아무 조건 없이 풀어줬음을 확인해주는 영상을 홈페이지와 유투브에 꾸준히 올렸다.
매일 저녁 예하를 통해 계약 소식이 알려지고, 타구단으로 이적하려는 선수를 풀어준 소식을 전했다.
순식간에 구단 전력이 반토막 났지만, 생각보다 여론은 나쁘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트레이드를 할 때만 해도 욕하는 이가 많았는데 구단주의 발표 이후 지지자가 늘고 있다.
불공정한 제도를 이용해 선수 몸값을 후려치는 타 구단은 나쁜 편.
기자를 이용해 욕하면서 뒤로는 자유롭게 풀어주는 선수를 끌고 가는 타 구단은 나쁜 편.
그들을 상대로 손해 보면서 정의와 공정함을 지키는 미래펀딩은 좋은 편.
아주 명쾌한 선악 구도가 만들어지면서 지지하는 이들이 점차 늘었다.
올해 성적은 몰라도 최소한 구단 이미지는 굉장히 좋다.
그보다 놋네 자이언트.
참 신기한 구단이다.
야구단을 운영하는 이유가 기업 홍보와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함인데 욕먹을 운영을 하면서 성적까지 안 좋아 이중으로 이미지를 깎아먹는다.
그럴 거면 아예 운영하지 않는 게 이득 아닌가.
우리는 구단이 약해지더라도 홍보효과는 톡톡히 누리니 마케팅 측면에선 이득인데.
국회에선 특검이 구성되니 마니 하다가 표류했다.
임시주총이 열리니 그 후에 하자는 거다.
백제그룹정도 크기면 여당 야당 모두 돈을 뿌렸을 테니 되도록 조용히 덥히길 바라는 게 느껴진다.
백제가 이기면 우릴 조질 테고, 우리가 이기면 백제를 손절하겠지.
일주일, 5거래일동안 백제그룹이 5연상했고, 그동안 폭풍전야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예하와의 밤마저도.
“......”
“왜 그렇게 쳐다봐. 오빠?”
눈 깜빡깜빡 하는 여우.
“암 것도 아냐.”
매일 옆에서 자며 잔혹하게 고문하는 녀나.
“어... 지금... 아. 맞다. 오빠 전화할 시간이야.”
“그러네. 거긴 저녁인가.”
회귀 후 이틀에 한 번씩 부모님께 꼭 전화한다.
회귀를 확인한 후 가장 처음 했던 다짐이다.
코인 거래를 하다가 보름씩 잊은 적도 있지만, 마음만은 똑같다.
예하가 비서가 된 후 스케줄을 챙겨줘 이제는 놓치지 않고.
“네 엄마. 어디? 이스탄불?”
지중해를 반 바퀴 돌았네.
“좋아요? 네. 보고 싶어요. 아무 일 없죠. 예. 괜찮고요. 거기는요? 문제없죠?”
-호텔방에 모여서 삼겹살 구워먹으려고. 세상에 여기 김치도 판다. 호홋. 아 그리고, 작은집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구나. 그래서 예약 취소 가능한 지 알아보고 있단다.
“그래요? 그런데 왜요? 여행이 싫은가?”
-아니. 민서가 영어학교 가기로 했대. 그래서 한국 가야 한대.
민서는 작은 아버지의 딸이다.
올해 네 살인데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귀염둥이다.
그런데 영어학교? 영어학교 가려고 한국에 온다고? 유럽에서 영어 쓰면 되잖아. 그게 더 빨리 늘 텐데.
그보다 한국 오면 경호팀을... 아니 그보다 왜 굳이 영어학교 따위를.
네 살짜리 아이를?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지를까?
아 답답해.
답답하지만 친척 어른인데.
그래도 난 미래를 살다 왔잖아.
지르자.
“엄마.”
-어.
“옆에 작은 아버지어머니 계세요?”
-니 작은엄마만 같이 있어. 취소할 수 있는 지 물어봐달래.
“제 아버지도 있어요?”
-어.
“그럼 스피커폰으로 받아주세요.”
-그래. 켰어.
목소리가 멀어지고 울린다.
“아버지 들려요?”
-들린다.
“제가... 아들이... 좀 건방진 말 좀 해도 될까요?”
-해. 나중에 한국 가서 버르장머릴 고쳐주지 뭐.
아빤 이런 게 참 좋더라.
“그럼 나중에 맞을 각오하고 건방 좀 떨게요.”
-어 그래라.
“짝은엄마.”
-어 그래. 잘 지냈어?
“예. 한국 오고 싶으시고, 그 이유가 민서를 영어학교에 넣기 위해서랬죠?”
-응. 그래. 비용은 우리가 구했어. 3월 전까지 가서 준비만 하면 돼.
“이거 되게 건방진 소린데. 제가 민서 정말 좋아해요. 너무 귀여워요. 평생 책임져줄 수 있어요. 미국에 살고 싶으면 보내주고 미국에 회사 하나 차려서 시민권 사줄 수도 있어요. 이건 진짜 안 아까워요.”
실제로 그렇다.
44살까지 살았을 때도 24살까지 자란 민서는 끝까지 귀여웠다.
다만 내가 돈이 없고 빚에 치여 밥벌이가 힘들어 귀여워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더 귀여워해주고 싶다.
-그래. 고.. 고맙네.
“제가 민서 좋아해서요... 그래서 건방진 말 좀 할게요. 죄송해요.
우리 할머니 초졸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다고 할머니의 아버지를 욕할 순 없죠. 그 당시로썬 딸을 초등학교라도 졸업시킨 게 대단한 거잖아요. 맞죠?”
-어. 그런데 왜?
“부모님은 다 자식 잘 되길 바래서 교육을 열심히 시키겠죠. 그런데 그 교육의 방향이 부모님의 입장과 부모님의 삶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요. 자식이 살아갈 미래를 생각해 교육시켜야 하는데 부모님은 부모님의 삶을 기준으로 생각하죠. 할아버지가 우리 부모님 키울 때도 육이오 시대를 기준으로 교육했을 것이고, 제 부모님이 절 키울 때도 인터넷 없던 시대 기준으로 교육했죠.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죠. 잘못한 게 아니죠. 그냥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에요. 아이 세대를 기준으로 교육하는 게 아니라 부모님 세대를 기준으로 교육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뭐가? 영어학교 보내는 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어린 조카놈한테 뜬금없이 욕먹고 있으니 기분이 안 좋겠지.
이스탄불 호텔에서 다같이 삼겹살 구워먹는다는데 주위가 쥐죽은 듯 조용하다.
부담스럽다.
“제가 민서를 좋아해서 하는 말이에요. 영어학교 필요 없어요. 보내지 말아주세요.”
-왜?
“기술 발전은 생각보다 빨라요. 5년 후면 거의 완벽한 통역기가 나와요. 10년 후면 오차 없는 통역기가 생길 테고요. 핸드폰에 대고 말하면 거의 동시에 상대 귀에 자기 언어가 전달될 거예요. 영어가 적힌 사진을 스캔하면 완벽하게 번역될 테고요. 그때는 영어가 필요 없겠죠.”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니?
“당연히 모르는 것보단 잘하는 게 낫죠. 그래도 시간이 아까워요. 민서가 지금부터 영어를 공부하면 네 살부터 초중고까지 거의 만 시간을 영어에 쏟겠죠? 그렇게 공부해도 통역기보다 영어를 못할 거예요. 그럼 의미 없죠.
미래에도 번역 검수나, 동시통역사의 직업이 있겠지만, 지금과는 숫자 자체가 다를 거예요. 외국에서 20년 살던 사람들이나 그런 일을 하지 민서가 하는 공부는 무의미해요. 차라리 영어 외울 시간에 십자수를 하는 게 더 생산적이에요.”
-시... 십자수?
“영어를 만 시간 공부하느니 십자수를 만 시간 뜨고 그걸 영상으로 찍어요. 민서는 그것만으로도 평균보다 훨씬 잘 살 수 있을 거예요. 십자수 아니면 실뜨기? 아니면 털실 목도리 짜기? 아니면 에콰도르 소수민족 언어? 이런 게 영어보다 나아요. 공부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통역기 못 이겨요.”
-그... 그럴듯하지만 학교성적은? 당장 영어시험이 없어질 리 없잖아.
“맞죠. 0점 맞겠죠.”
-그래서 해야지. 공부를 못 하면 주눅 들고 자신감이 없어져서 다른 것까지 못하게 되고 우리 딸이 왕따 당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니. 대학도 못 가면 얼마나 슬퍼하겠어.
“그런데요. 이건 미래 예측이 아니라 그냥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씀 드릴게요. 지금 신생아가 적다고 난리잖아요.”
-어. 그런데?
“민서가 인구절벽 세대인 것도 아실 거고요.”
-왜 모르겠니. 그걸로 하도 난린데.
“민서가 수능 볼 때 되면 지방대 전부 사라져요. 입학할 학생 수가 지금의 절반밖에 안 되거든요. 지방 국립대와 지방 명문대를 제외하면 나머지 전부 서울 시내에서 대학 다닐 수 있게 되요. 지방대는 전부 공원으로 바뀌고요. 민서가 공부를 전국 꼴찌해도 제가 있는 도봉대 올 수 있어요.”
-어... 그래도 도봉대는.
도봉대가 왜요?
우리 도봉대 얼마나... 크흑.
“대학 골라가는 거야 다음문제고 그보다 기업에 사람이 없어요. 인구폭발 세대가 그때 되면 다 70대라서 일 할 사람이 없어요. 기업들은 사람 뽑으려고 난리니 지금 대학들처럼 혜택을 뿌리겠죠. 아마도 고졸이 취업하는 게 일반적이 될 거예요. 고등학교 졸업생을 회사로 데려와서 회사일 가볍게 가르치면서 대학 4년 뒷바라지 해 주겠죠. 민서가 어른 되면 그렇게 될 거예요. 사람이 없으니까.”
진짜 이렇게 된다.
80년대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회사가 고졸자에게 찾아와 돈 주고 원하는 국가 유학비용 주면서 제발 취직해달라고 한다.
성적? 필요 없다.
미친놈만 아니면 된다.
-...... 그래서 공부시킬 필요가 없다는 거야?
“제가 말했잖아요. 민서 귀엽고 귀여워해주고 싶다고요. 민서가 만약 영어를 너무하고 싶어 한다면 하게 해줄 거예요. 그런데 네 살 민서가 그러고 싶대요? 그냥 민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세요. 뛰어놀게, 친구들하고 수다 떨고 모래밭에서 뒹굴게 해 주세요. 그러다 뭔가 하고 싶다고 하면 다 해줄게요.
물론 짝은 엄마 생각이 확고하면 그렇게 하셔야죠. 다만 전 민서가 허비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그래요. 어린 시간에도 나름 소중한 게 있을 텐데 미래에 쓸 일도 없는 지식을 강제로 넣느라 어린 시간을 버리는 게 아까워요.”
-...... 음.
-우왕? 오빠 목소리다? 오빠?
나갔다 왔는지 민서 목소리가 들린다.
“민서야~”
-우왕. 오빠당. 핸플빠.
“... 그거 가오리한테 들었지. 그 아저씨 나쁜 사람이니까 그 아저씨 말 들으면 안 돼.”
-나쁜사람? 우왕? 아닌데 웃긴뎅.
어. 웃기지.
“민서야. 영어학교 갈래? 가고 싶어?”
민서를 설득한다.
-엉!
뭐?
왜?
너에게 미래 통역기의 눈부신 발전과 인구절벽 세대의 입시경쟁 해소를 설명해 줘야해? 너 이해할 수 있니?
“왜?”
-엄마가 가래.
“......”
-동욱아. 숙모가 생각 좀 해볼게. 네 말이 맞는 것 같고 민서가 하고 싶어 하는 게 뭔지 궁금하네. 우선 끊을게.
작은엄마는 민망했던지 서둘러 끊었다.
“네.”
뚜뚜.
후우.
설득 되었나.
이래도 보내겠다고 하면 어쩔 도리 없다.
민서 인생이고, 그 엄마의 판단이니까.
그냥 좀 안타깝다.
민서는 경쟁에 치이지 않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즐겁게 살면 좋겠는데.
하며 돌아서는데 예하가 바싹 붙어있다.
“흐에 깜짝이야.”
진짜 놀랬다.
예하는 날 보며 눈을 깜빡깜빡 거리는데 별이 쏟아지는 거 같다.
“왜?”
“멋져. 간달프같아. 대현자. 세계의 모든 걸 아는 사람. 엘빈 호킹 박사. 미래학자. 멋져. 오빠 이렇게 멋지면 반칙이잖아.”
“넌 내 말을 믿니?”
“어. 들어보니 맞는 말이잖아. 후에. 언니들 애 낳으면 말해줘야지. 나도 영어공부가 제일 싫었는데.”
그래.
한명이라도 지지자가 있으니 좋네.
자연스레 키스로 이어졌다.
여기까진 오케이니까.
- 작가의말
미래 이야기는 100% 픽션이며 뇌내망상입니다
비축분이 69화까지 쌓여있네요,
즉 20화 미만이 되었다는 거애요!
다시 비축분 20화가 넘을 때마다 연참할 거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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