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화
IT버블이 지구를 강타했을 때 모든 IT 기업의 주가가 하늘을 뚫고 치솟았다.
심지어 IT와 전혀 연관 없는 비료회사가 회사 이름이 IT를 연상시킨다 해서 몇 배씩 오르기도 했다.
그런 미친 시장은 버블붕괴로 무너지고 거의 모든 기업이 상장폐지 됐다.
하지만 시체의 산에서 일어선 진짜배기, 아마존이나 구글 같은 몇 안 되는 IT기업은 IT버블 때의 모든 파이를 독식했다.
블록체인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은행 송금서비스를 대체하려는 리플, 금 같은 순수 가치자산이 되려는 비트코인 등 수천 종류의 코인이 각자 개성을 앞세워 버블을 일으키고 있다.
1차 버블이 서서히 꺼지고 있는 지금, 미래에 실제 수익을 창출할 옥석가리기에 들어가야 한다.
“녹음기라며? 그래서 먼저 만든 거 아냐?”
“녹음기도 미래수익이 되죠. 하지만, 이건 준비 단단히 해야 해요. 특허 낼 수 없으니 선점 효과를 먹어야 하죠. 이거 말고 특허를 선점할 수 있는 게 있어요. 투표체인.”
“투표?”
“부정선거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죠. 미래엔 모든 선거가 블록체인 앱으로 이뤄질 게 분명해요.”
3년 후 우크라이나에서 부정선거논란이 일어나 민란과 시위, 학살이 일어나게 된다.
그 후 재선거가 열리는 데 이 때 최초로 블록체인 앱을 통한 선거가 이뤄진다.
그리고 단 4년 만에 전 세계 모든 선거투표가 블록체인 앱을 통하게 된다.
여당이 반대? 독재자가 반대?
반대하는 순간 부정선거의 의혹이 일어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울며 겨자 먹기로 모든 국가의, 아니 북한을 제외한 모든 선거가 블록체인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 특허를 선점한 기업이 있다.
투표 특허 하나로 훗날 세계 100대 기업에 들어가게 되는 기업.
그들이 내년에 선거앱을 출시하니 그 전에 선점해야 한다.
“오프라인 확인 후 각자 고유번호를 부여받고 투표하면 블록체인으로 엮어 위조, 변조가 불가능하게 만들면 되겠죠. 투표와 개표에 수천억 드니까 그걸 우리가 먹는 거예요.”
“어. 이해했어.”
“만들어줘요. 바로 특허내야 하니까 베타버전이라도 빠르게.”
“어.”
“급해도 잠은 자면서 일하시고...... 밥은 먹었어요?”
“어. 컵라면.”
동욱과 상철이 대화하고 있을 때, 뒤에 있던 예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둘이 너무 비슷하다.
허름한 옷차림, 지저분한 헤어스타일, 대충 때우는 끼니.
대신 자기분야에서 천재.
투자의 천재와 블록체인 천재의 만남은 많이 닮아 있었다.
쳉겨 줘야겠다.
에휴.
윤동욱 저 남자 챙겨주지 않으면 굶어죽을 거 같아.
내조라고 하나.
내조래 맙소사.
흐흣.
“얜 또 왜 이래? 약 먹었나?”
갑자기 얼굴이 풀어진 예하가 이해되지 않는다.
대체 어디가 재밌는 거지.
“암것도 아니야. 데헷.”
“이상하다. 이상해. 형. 갈게요.”
“어. 수고.”
예하의 영문 모를 표정을 보다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예하는 보약 잘못 먹은 까치처럼 헤롱거린다.
위에서부터 따라온 경호원 다섯과 1층 곳곳에 은신하던 경호원들이 에워싸는데.
“아. 목적을 잊어버렸잖아. 정말 죄송해요.”
정작 여기로 온 이유를 잊었다.
12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형. 그 프로그램. 코인 자동 거래.”
“어? 누구더라... 누구지... 아. 이용호! 야! 에이씨 못 듣네. 쟤한테 가서 말해.”
김상철은 이러고 코딩의 세계에 빠져든다.
불러도 대답없는 이용호란 사람은 코딩의 세계 속에 있고.
이게 코더의 세계인가.
“저기요. 상철이 형이 맡긴 게 있다던데요.”
“에?”
“코인 자동거래 프로그램이요.”
“아. 그게...... 이거였나.”
잠시 쓱쓱 찾더니 유에스비에 넣고 건네준다.
그리고 다시 코딩의 세계로.
“이거 사용방법좀요.”
“하아. 진짜.”
짜증?
나 사장인데.
내 돈인데.
비밀로 했더니 진짜.
버스터 콜 발동해? 내 밑으로 형 위로 다 집합?
이용호는 프로그램을 열고, 사이트를 열었다.
“바이낸스 매칭 됐고, 여기에 숫자입력. 직관적. 끝 됐죠?”
구매 버튼에 구매란 글자가 없다. 칸만 있다. 진짜 성의 없네. 어떻게 직관적이란 거지?
“어어. 네.”
“다음 후오비. 형식은 달라도 이해되죠?”
“...네.”
“다른 것도 같아요.”
“구간에 매수예약 뿌리는 건요?”
“하아. 그건...”
“큰 물량 자동으로 잡아먹는 건?”
“그건...”
일단 기능은 다 들어가 있다.
버튼에 글자만 없을 뿐.
“됐죠? 수고요.”
다시 코딩의 세계로.
“8개밖에 없는데요. 30개 사이트 의뢰했는데.”
“하아. 바빠요. 기다리면 금방 해줄게요.”
저 금방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서 내가 물주라는 걸 아는 건 김상철 뿐인데 김상철부터가 관심이 없다.
층을 내려가 유성주를 만나서 프로그램을 오늘 안으로 부탁했다.
질질 끌던 거래 프로그램이 그날 완성되어 밤늦게 도착했다.
역시나 이공계를 갈아 넣으려면 눌러야 한다.
모든 프로그램을 깔았더니 마우스 오토클릭이 서로 충돌하는 게 있다.
컴퓨터를 여섯 대 늘려서 컴퓨터마다 다른 사이트를 운용하게 했다.
충돌 확인하고, 각종 기능 제대로 돌아가는지 확인하는데 이틀이 걸렸다.
“오빠 주말 내내 방에만 있었어.”
“바쁜 거 알 잖아.”
“그래도 운동은 해야지. 지금 최고의 트레이너 알아봤거든.”
“아유 잔소리. 이거 안하면 다음 거래 때 3박4일 붙어있어야 하는데? 잠도 못자고.”
“히익. 중요한 일이었네요.”
“어. 그러니 방해 노노.”
30개 코인거래소 세팅이 끝났다.
이제 혹시나 컴퓨터가 고장 날 때를 대비한 예비컴과 백업컴까지 준비했다.
“고생 끝!”
“와아아아.”
하는 예하의 가슴속에 내심 섭섭함이 밀려왔다.
고생하는 건 싫지만, 밤샘하는 그 시간동안 가까워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동욱 오빠.”
마루에서 주로 소파를 닦는 루비가 불렀다.
“어.”
“머리는 왜 길러? 일부러 기르는 거야?”
그 말에 예하도 눈을 빛냈다.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다.
“아니. 귀찮아서. 외형 따위 신경 쓰기 귀찮아.”
44살까지 살았다.
돈 한 푼 없이 빚더미에서 아프신 부모님 모시며 살았다.
맛을 느끼는 것도 사치고, 외형에 신경 쓰는 건 엄청난 사치다.
그 성향이 지금도 이어진다.
맛있는 건 알겠는데 딱히 땡기지 않는다. 먹으면 먹는 거고 아니면 말고다.
비싼 걸 먹든 참치마요삼각김밥을 먹든 똑같이 생존을 위한 섭취다.
옷도 좋은 걸 입고 싶은 욕구가 전혀 없다.
얼어 죽지 않을 정도, 알몸이 아닐 정도면 뭐든 상관없다.
머리 또한.
“귀찮아서 한 번도 안 잘랐어. 군대 제대하고 나서.”
“헐. 귀찮아서라니. 그럼 머리 자르러 갈래?”
“아니. 귀찮아. 자야겠어.”
머리 자르느니 자는 게 100배 이득.
이틀간 계속 세팅하느라 힘들었어.
“그럼 여기서 잘라줄까?”
루비가 눈을 반짝이며 부엌에서 가위를 집어 철컹철컹하며 말했다.
루비가 의욕적으로 나서면 들어줘야할 것 같다.
삶의 모든 의욕을 잃은 불쌍한 애가 저러면.
“어... 그래.”
“여기 앉아봐.”
부엌의자 밑에 커다란 비닐봉투 여러개를 깔고 부른다.
앉으니 쓰레기봉투를 넓게 펴 가운데 구멍을 뚫고 목에 씌운다.
“뭔가 전문적이네.”
“해봤으니까. 내가 아이돌 안 됐으면 미용사 됐을거야. 하아. 차라리 그랬으면 행복했겠지.”
야야. 그러지 좀 말라고.
“에휴. 해봐.”
“어.”
루비가 분무기를 찾다가 수돗물을 손에 묻혀 머리카락을 만지며 적신다.
예하는 옆에서 재밌겠다~ 하며 구경하고 있고.
“자른다.”
“어.”
루비가 더벅머리를 한손 가득 쥐고 부엌 가위를 밀어 넣었다.
사사락. 찍찍.
“어? 다 안 잘려.”
“미용가위 아니라서 그런 거 아니야?”
“어. 몰라.”
사각삿삿.
“아이씨 질겨.”
쓰악.
쥐어뜯네.
“악. 아퍼.”
가위로 쥔 채로 당기지마.
“힉. 미안해.”
“뽑지 마. 아직 대머리 되긴 싫어.”
“푸훕. 넵.”
잠시 고민하던 루비는 머리카락을 서너 가닥 골라잡고는 호도독 잘랐다.
“조금 잡으니까 된다.”
“오올.”
조금씩, 조금씩.
이거 언제 끝나냐.
“예하야 물 좀 묻혀줄래? 마르니까 잘 안 된다.”
“넹.”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던 예하가 물을 묻혀 주물주물 마사지했다.
“아 시원하다.”
“시원해? 두피마사지 좋아효?”
“좋아.”
오홍.
여자 둘이 내 머리에 붙었다.
루비는 아티스트의 눈으로 내 머리를 노려보며 조금씩 자르고 예하는 물을 묻혀가며 머리를 마사지해준다.
두 미녀가 달라붙어 만져주니 이런 호사가 또 없다.
백만장자의 애완견이 된 기분.
누가 머리를 만져주면...
잠이 쏟아진다.
“예하야 오빠 머리 받쳐줘.”
“넹.”
잠결에 들리는 두 여자의 목소리가 달콤하다.
“오빠 머리를 좀 왼쪽으로.”
“어. 언니......”
“쉿......”
목소리가 멀어져간다.
어떡하지?
오른쪽이 너무 짧아.
내가 할게 언니.
수습 가능해?
이건 아닌 거 같은데? 나와 봐
뒷머리 꽁지 일부러 남긴 거야?
어라 저거 뭐야?
“흐아아암.”
기분 좋게 깨어났다.
비닐을 뒤집어쓴 채 식탁의자에 앉아 있고, 여자 둘은.
“뭐하냐?”
앞에 무릎 꿇고 있다.
예하는 손을 들고 있고, 루비는 종이를 내밀고 있다.
“어... 그게.”
“뭔데?”
“시말서 입니다.”
“왜?”
루비가 대답대신 거울을 내밀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잘생겼네.”
“어?”
“군대 다시 온 기분이네. 일부러 까까머리 한 거야? 머리감기 편하겠네.”
“어?”
“수고했어. 여기 미용실 머리도 감겨줘?”
“어? 어.”
둘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날 화장실로 데려가고는 뒤로 눕힐지 앞으로 눕힐지 한참 다투다가 식탁 의자를 가져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예하가 내 머리를 바치고 루비가 물을 뿌리며 씻긴다.
예하는 내 얼굴에 가슴이 닿을 정도로 목을 안아주는 특별 서비스를 했다.
“그래. 수고했어. 이집 서비스 좋네. 나 좀 잘게.”
“어? 어.”
여전히 눈을 못 마주치는 둘을 남겨주고 내방으로 왔다.
방문을 잠그고.
거울을 봤다.
군대 머리도 이거보다 낫겠다.
아오씨.
왜 오른쪽 머리가 왼쪽보다 1센티 긴 거냐.
화내서 상황이 좋아지면 화를 낸다.
화내기 전에 상대가 미안해하는데 굳이 화낼 이유가 없다.
평범하지 않지만, 44살까지 살면서 기분 내키는 대로 화내는 법을 잊어버렸다.
일이 잘못됐을 땐 화낼 시간에 바로잡으려 노력해야 한다.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졌을 땐 화조차 이득이 있을 때만 화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좀......
신경 쓰기 귀찮다고 했더니 일부러 신경 쓰이게 만들려고 개판 쳐놓은 거냐!
한참 안방을 보던 둘은 바닥에 날린 머리카락을 치웠다.
루비는 그러고 한참 고민하다가 예하의 손을 잡고 작은방으로 갔다.
“예하야.”
“어.”
“오빠 너무 배려심 많은 거 같아.”
“맞아. 진짜 멋있지? 완전 짱이야.”
“어. ......”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 너 아랫집 내방에서 자면 안 되니? 나 오빠랑 자고 싶어, 그러니까 섹스하고 싶다고, 너무 멋있고 고마워서 말이야......
라고 말하고 싶은데 예하의 눈이 너무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순수한 사랑이랄까.
“에휴. 널 어쩌면 좋니.”
“응? 왜?”
“아니야.”
루비는 한숨을 푹 쉬었다가 예하를 봤다가 으어어 소리 내고는 집으로 갔다.
서울 북부 구치소 문이 열렸다.
터덜터덜 걸어 나온 지혜아빠를 지혜엄마가 달려가 안았다.
“고생했어. 고생 했어요 여보.”
“음.”
그 뒤로 십여 명의 변호인단이 서 있고, 그 뒤로 수백 명의 시민단체가 있다.
하나의 단체가 아닌, 각기 다른 단체의 대표들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변호사들이 사죄하고.
“저희가 돕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하시죠.”
시민단체가 달려와 뭘 돕겠다는 데 대체 뭘 도우려는지 모르겠다.
“여보. 차가 준비되어 있어요.”
“그래.”
수십대의 차문이 열려 지혜아빠를 모시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혜엄마가 이끄는 대로 걸어가 택시에 탔다.
“반갑습니다.”
“네.”
중년 부부는 말없이 손을 잡고 있었다.
택시는 옥수동으로 향했다.
옥수동 노스탤지어팰리스힐 4501호.
문이 열리자 동욱과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 작가의말
머리잘랐어요 헤헤 군대머리에요
블록체인 투표는 벌써 여러곳에서 시도중이더군요. 역시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한가봐요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