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 프로의 의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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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4:4 비겼어. 상대팀에도 해트트릭이 나왔고 맘은 개한테 넘어갔어.”
“하아. 이걸 홈에서 비기네. 축구 참 어려워.”
“보통 우승팀도 승률 60%대야. 이 정도면 충분히 잘 하고 있는 거야. 아직 우리팀이 1위라고.”
“네. 그렇죠. 씻고 스트레칭 할게요. 집에 갑시다.”
“그래.”
만원관중 앞에서 마인츠 2팀은 만하임을 상대로 비겼다. 교체 출전해 마인츠 데뷔전을 치른 패트릭 로버트는 아무 활약도 못 했다.
다음날 1팀의 경기가 있다. 2부 리그 6라운드 베헨 비스바덴 원정.
비스바덴은 마인츠 바로 위에 있는 도시다. 서울 강남과 강북처럼 라인강을 사이에 끼고 위아래로 마주보고 있는 도시. 훈련장에서 비스바덴 경기장까지 고작 30분 거리다.
거리가 이렇게 가까우면 라이벌 더비가 형성되는데 두 팀은 워낙 만나지 못했기에 서로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인츠가 2부 리그에 있던 시절 비스바덴은 4부 리그에 있었고, 마인츠가 1부 리그에 있는 동안 비스바덴은 3부 리그의 지박령이었다.
심지어 3부 리그 시절엔 마인츠의 오펠 아레나를 대여해 홈경기로 사용하던 이웃사촌이었다.
지난해 승격을 이뤄 실로 오랜만에 만난 사이.
원정 같지도 않은 가까운 거리. 요즘 한창 불타오르고 있는 마인츠 시민들은 단체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15000명 정원의 베헨 비스바덴 경기장이 오랜만에 매진을 이뤘다. 이 중 5000석이 마인츠 공식 서포터 자리였고, 추가로 추정 4000명 정도가 마인츠 시민이다. 절반 이상을 원정팬이 차지한 것이다.
글로~리글 로리 로리 뚜~기~
글로~리글 로리 로리 뚜~기~
오오오오~ 마인츠~ 우리의 마인츠~
국제자본 물러나라~ 최강의 마인츠~
닐카프마 필요없어~ 무적의 마인츠~
뚜기 응원가와 닐카프마 안티곡이 교대로 울려 퍼진다. 원정팀이 홈팀을 압도한다는 즐거움 때문인지 관중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컸다.
강창덕은 컨디션이 71%밖에 안 된다. 이 정도면 평소 실력의 20%이상 깎여나간다고 보면 된다. 전날 탈진할 정도로 뛰어서 하루사이에 전부 회복하는 건 무리였다.
강창덕의 자리엔 패트릭이 들어갔다. 전날 20분을 소화한 패트릭이 교체멤버로 대기하고, 우측 윙 포워드 선발은 찰리 무손다가 뛴다.
삑!
경기가 시작되었다. 마인츠는 평소처럼 라인을 올린 채 점유율 축구를 했다.
다니 올모를 중심으로 하는 패스 플레이. 기본적으로 실력이 더 좋을 때 효과가 좋은 전술이다.
다니 올모, 산드로 토날리, 리들리 바쿠, 이 세명의 미드필더들이 패싱 플레이를 하면 상대는 쫒아 다니다가 지친다.
뺏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공간을 내줘서 위기를 몇 차례 겪고 나면 물러설 수 밖에.
미들진이 밀리니 상대는 물러설 수밖에 없고 골대 앞에 갇혀버린다. 결국은 수비에 집중하다가 롱볼에 의한 운 좋은 역습을 노릴 수밖에. 이러면 원하지 않아도 바르샤식 티키타카를 할 수 밖에 없다. 바르샤보단 어설프지만 상대는 그보다 더 못하니까.
승리를 위해 갇혀 있는 상대를 두들긴다. 그러면 골이 들어간다.
다니 올모가 패스의 중심이 되어 이곳저곳 엿보다가 우측 전방에 기습적으로 찔렀다.
찰리 무손다가 쇄도한 후 공이 나가기 직전 중앙으로 꺾었다. 무손다의 패스는 골 냄새를 맡은 피에테 아르프가 달려들어 다이빙했다. 경합하는 수비수보다 딱 한 뼘 먼저 달려가 발을 갔다댔다.
골 냄새. 위치선정. 수비수와의 몸싸움. 마무리까지. 피에테의 모든 게 완벽했다. 피에테는 찰리 무손다에게 다가가 웃으며 안아줬다.
“좋았어. 찰리.”
“그래. 날 믿고 찌르라고. 다니. 내가 스피드로 다 해결할게.”
다니-찰리-피에테. 이적생 3인방은 최근 함께 다니더니 호흡이 굉장히 좋아졌다. 특히 찰리의 적응력이 눈부시다. 임대 이적 3주 만에 완벽히 마인츠에 녹아든 모습이다. 임대경험이 많고 독일어를 알아듣는 덕택에 빠르게 적응한 듯했다.
“오우. 피에테. 골~ 엄청난 골 냄새를 잘 맡아. 역시 독일의 해리 케인. 큰 키에 몸싸움도 훌륭하고 빨라. 게다가 슈팅 정확도도 좋고. 완벽한 스트라이커야.”
-네 다음 해리
-제2의 메시도 아니고 제2의 호날두도 아니고 고작 케인에 비교하는 ㅋㅋㅋ
-케인이 뭐? 케인이 어때서?
-네다음닭 나오세요
-강하다 마인츠
“골 세레머니도 가볍네. 이제 이정도 골로는 별 감흥 없다는 건가. 어라? 저기 관중석이 좀 시끄러운데? 어? 어라? 강? 강창덕이다. 관중석 최상단에 강이 있다. 잠깐 나 공식 방송 말고 캠 좀 켤게.”
-네 필요없고요 경기중계나
-강은 왜 벤치로 안가고?
-오늘 교체멤버도 아니니까 못 들어가지
-그래도 벤치에서 볼 수 있지 않나?
-볼 수 있을걸 쟤 전략코치도 겸하잖아
-17살 짜리가 코치라고? 구라즐
-코치맞음 연수중이라고 홈피에 뜸
-진짜 소년 가장이네
-전략코치가 필요하냐? 워낙 연봉 비싼 놈들이라 알아서 잘하는데
강창덕은 교체멤버에서 빠진 김에 관중석에서 경기를 봤다. 마틴 웰링에게 전술지시를 하기엔 경기장보다 관중석 구석에서 보는 게 편하다.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한 채 관중석 최상단 기둥 뒤에 자리 잡았다. 여기서 음질 좋은 조이스틱 무전기를 누르며 지시하는 것이다.
마인츠의 전술은 거의 완성되었고, 이제 선수들도 알아서 잘 한다. 그래도 지니의 세밀한 지시사항은 계속 나온다.
“좌측 풀백의 컨디션이 안 좋아. 술이 덜 깼나봐. 찰리에게 더 과감히 돌파하라고 해.”
“아론 마틴에게 오버래핑을 줄이라고 해.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
“개리의 크로스가 안 좋아. 오른쪽 위주로 풀어봐.”
조이스틱 무전기를 누르며 지니가 시키는 대로 한참 수정했다. 그러는 와중에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허허. 구경만 하려니 답답하지? 그래서 게임 컨트롤러까지 들고 있고.”
“네?”
돌아보니 나이 지긋한 아저씨였다. 마치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짓던 아저씨가 말했다.
“자네의 사기적인 시야와 패스감각을 생각하면 답답한 게 당연하겠지만, 결국 마인츠가 이길걸 세. 허허허. 잘 만들었어. 좋은 팀이야. 고맙네. 고마워.”
팬이 고맙다고 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건 선수로서 보람이 아니라 구단주로서의 보람이겠지.
아저씨가 조심히 말했다.
“사인 하나만 해 줄 수 있는감? 우리 딸애가 팬이라서 말이야. 바쁘면 경기 끝나고라도.”
“아뇨. 해드릴게요.”
이게 프로의 의무겠지. 아저씨는 강창덕에게 등을 돌렸다. 거기에는 No.32 KANG 이 적혀있었다. 메인 스폰서 마크도 언더아모인 따끈따끈한 신상이다.
아저씨 등에 두꺼운 매직으로 휘황찬란한 사인을 하는 사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강?”
“혹시 강창덕? 맞나? 맞네.”
“와우~ 캉찬떠기~”
걸렸다. 완벽히 포위되었다. 마틴 웰링에게 지시하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마리엘도 떼어놨는데 큰일이다. 이 사람들이 해를 끼치진 않을 것 같지만, 혹여나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면 향수의 마지막 장면처럼 잡아먹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질서의 독일. 둘러싸고 한마디씩 하더니 어느새 흩어진다.
“경기는 봐야지. 그래도 하프타임때 사인 좀 가능해?”
“네. 고마워요.”
“힘내라고. 자자 해산합시다.”
“뚜기 힘내! 지지마!”
“힘내! 지지마!”
사람들이 둘러싸고 한마디씩 하더니 자기자리를 찾아간다. 경기 중에 사인 요청은 매너에 어긋나는 걸 아는 사람들이다. 강창덕은 결국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하프 타임 때 사인해드릴게요.”
“그래. 그래. 그거면 됐어.”
고마운 관중들은 은근슬쩍 주위를 둘러싸고는 접근하는 이들에게 조용히 설명했다. 덕분에 강창덕은 편안히 경기를 볼 수 있었다. 대신 마틴 웰링에게 지시를 내릴 수는 없었다. 조이스틱을 악세사리처럼 들고 마음 편히 경기를 봤다.
좌우로 흔들면 수비진도 좌우로 벌어진다. 다니 올모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미들진과 수비진의 두줄 수비를 홀로 헤집고 들어갔다. 무려 네 명을 제치고 골을 넣었다. 놀라운 개인기로 만든 골이다.
와아아아아아~
두 번째 골이 나오자 엄청난 환호성이 터졌는데 곧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글로~리글 로리 로리 뚜~기~
글로~리글 로리 로리 뚜~기~
골을 넣은 건 다니인데 강창덕의 응원가가 나왔다. 가까이 있는 팬들이 돌아보며 강창덕을 보고 노래를 불렀다.
이 장면을 지역방송 중계팀이 잡았다. 경기장 전광판에 관중들이 뚜기를 보고 노래를 하는 게 나왔고, 얼마 후 경기장 전체에 강창덕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글로~리글 로리 로리 뚜~기~
글로~리글 로리 로리 뚜~기~
“들려? 들리지? 강창덕이 마인츠에서 이렇게 사랑받는다고. 응? 왜냐고? 동양구단주를 왜 빠냐고? 쟨 말이지. 닐카프마의 음모를 최초로 알아냈어. 17살 생일이 되기도 전에 음모를 눈치 채고 파헤쳤어. 그때 비리를 저지른 이들 52명이 아직도 감옥에 있다고. 그 뿐이야? 그 후 이적시장에서도 훌륭히 지휘를 했지. 선수를 팔고 자유이적으로 영입해서 팀은 전보다 강해졌는데 무려 8000만 유로를 벌어들였어. 이게 말이 돼? 선수단을 강화시켰는데 돈을 이렇게나 벌었다고. 엄청난 수완이야. 물론 혼자 다하진 못했겠지만, 지휘의 중요성이란게 있잖아. 임시 구단주가 되자마자 이렇게 팀을 강화시켰으니 그 공이 크지. 이러니 마인츠를 날로 삼키려고 강등까지 시켰던 닐카프마에서 싫어하지. 얼마 전 꽃뱀 사건 알지? 닐카프마 새끼들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런 더러운 짓까지 하겠어. 강창덕은 우리가 지켜야 해. 얘가 워낙 어른스러워도 고작 17살이야.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글로~리글 로리 로리 뚜~기~
-글로~리글 로리 로리 뚜~기~
-로리 로리 하는거 같아서 기분이 좀 불편하네요
-로리 좋지~~~
ㄴ 너님 철컹철컹
-고개 돌아가는 거 파도타기 같다 ㅋㅋㅋㅋㅋ 연습한 거냐?
관중들의 고개가 하나둘 관중석 최상단 강창덕을 향해 돌아간다. 옆 사람에게 듣고, 혹은 중계 카메라를 보고, 주위를 찾다가 저 멀리 관중석의 강창덕을 본 것이다.
솔직히 노랫소리는 앞사람들 목소리밖에 안 들린다. 경기장 한가운데서 듣는 것보단 좀 덜하다. 앞에서 악을 쓰면 저 멀리서 온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꼬리를 잇는다.
그래도 고맙다. 출전도 안했는데 이렇게나 노래를 불러주는 게 너무 고맙다.
전반 종료 직전, 피에테의 패스를 받은 찰리 무손다가 한 골을 넣어서 3:0으로 벌어졌다. 이 경기는 질래야 질 수 없는 경기다.
‘지니야. 팩스 이 번호로 하프타임 지시사항 뽑아줘. 후반에 패트릭하고, 포수 멘사 꼭 출전시키고.’
-네.
파지지직
하프타임 지시사항은 꽤나 전력을 많이 먹는다. 강창덕은 버릇처럼 주머니에서 비상 식량을 꺼냈다.
스니커스. 딱딱하고 질기고 너무 달지만, 열량이 높은 스니커스.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데 강창덕 옆에 조용히 박스가 쌓인다.
스니커스 12ea 박스.
순례하듯 조용히 다가와 박스를 놓고 간다. 둘러보니 주위에 벌써 50박스가 넘게 있다. 경기를 보느라 몰랐는데 정말 몰래 놓고 갔다.
“헐. 뭐 이런 걸 다.”
앞으로 밥값 걱정은 없으려나. 한 달 식비가 2000만원 넘게 나가서 걱정이었는데, 팬들이 이래주면 고맙지.
전반이 끝나기 전에 구단에서 가드 6명이 다가왔다. 강창덕의 모습이 중계된 것을 보고 누군가 보낸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한 소요사태는 없었다. 관중들은 질서 있게 줄을 섰고, 사인을 받으며 힘내라고, 우린 너의 편이라고, 한마디씩 해 주었다.
그리고 스니커스 12개가 사인 값이라도 된 것 마냥 다들 스니커스 12개 박스를 하나씩 놓고 간다. 강창덕은 정성스레 사인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하프타임 내내 이러니 팔이 꽤 아프다. 다행히 후반이 시작되자 알아서 해산했고, 강창덕은 팔을 풀면서 경기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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